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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960: 하늘 시인(詩人), 성서의 문학적 놀라움에 대해

2012.04.02(월)

 

오늘 오후, 서울신대로 향하던 길에서 봄의 화신과 마주쳤다.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만년 정체구역인 서부간선도로를 통과하던 중, 그 도로 변에 가득한 개나리 꽃 무리를 대했다.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탓에 그 동네 개나리는 거의 만개했다.

 

갈 길이 바빴지만, 내가 누군가? 나는 뒤 따르던 차들을 줄 세워 놓고, 그 도상에 차를 세우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한 컷 질렀다. 봄비에 젖은 차창 속에 담긴 개나리 꽃무리를 봄 바구니에 담았다. 수년 째, 나는 봄을 앓아오고 있다. 물안개에 젖은 개나리 꽃무리로 내 심사에 인 봄바람을 잠재웠다. 그 한 컷, 몰핀으로 난 그 봄 통(痛)을 일시 억제했다.

 

문학적 표현을 도구 삼은 진리의 긴 생명력에 대해, 나는 오늘 강의를 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살아오면서 적잖은 글을 써 왔는데 그 글쓰기를 학문적으로 정리할 기회를 얻은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특히 기독교문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게 된 것이 신앙적 측면에서 소중하다. 그동안 나는 시중에 범람하는 신앙시들을, 아니 그 기독교시인들을 내심 경원시 해왔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등단과정을 거친 탓에 그 문학적 소양과 질적 농도가 너무 묽어 내 입맛에 비렸다. 그래서 ‘∼하소서,’ 류의 시인들이 역겨워 나는 기독교문학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유혹과 요청도 거부하고, 홀로 독야청청해 왔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오만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그런데 히브리 민족과 문학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문학적 어법 등을 강의하면서, 나는 새삼 성서의 문학적 놀라움을 발견했다. 성경이 만인의 고전 중의 고전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성서의 문학적 표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문학적 어법 때문이다.

 

"성서는 그 어떤 책이나 사상보다도, 근본적이고 우주적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는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이 만일 당대의 유식한 철학이나 신학으로 논증한 교리서가 되었다면 성서는 한 시대의 역사적 유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내용들이 바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문학적 형식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문학이란 어떤 사상, 즉 주제를 이야기 형식이나 시적 형식을 빌어서 이성에만 호소하지 않고 감성에 호소하여,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하여 깨닫게 하는 데 있다. 그러기에, 문학은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비유적이고 음악적인 어법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그 3년간의 언어는 철저히 시적이고 소설적이다." (홍문표 『기독교문학의 기본원리와 창작방법』서울:창조문학사,2005)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1-2-

이같이 말씀의 내용이 논리나 철학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유나 비유를 사용하여 구체적이면서도 감각적이어서 우리네 신앙적 심금을 가슴 깊이 울리고 있다.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라고 고백했지만, 시적 상상력의 대가이신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8:20-
고 시적 비유로 자신의 심사를 표현 하셨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수의 문학적 어법에 대해,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의 자질의 근저에는 예술가의 자질과 같은 것, 즉 강렬하고 불꽃같은 상상력이 있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히브리 문학과 성서와 예수의 문학적 상상력의 가치를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매인 교리로 폄하해 왔다. 소박한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 플라톤의 이원론은 매우 특별한 툴(tool)이었다. 즉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그것이다.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 것이고, 따라서 불멸적인 것이라 보았다. 이성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이데아의 세계다. 그러나 시는 언제나 보이는 현실세계만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을 모방하는 데 그친다고 플라톤은 생각한 것이다. 시인은 본질의 그림자를 다시 모사하는 데 그치는 자이므로, 이데아 왕국에서 시인이 추방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했다. 이데아 왕국에서는 감정은 비이성적이기에 이성적인 사람들이 경계해야할 대상이었다. 시는 교육적 가치가 없고, 인기를 노리는 모방적 시인은 영혼의 합리적 원리에 만족을 주지 않고 감정을 흥분시키고, 조장하는 쾌락적인 일만 하기에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시인추방설은 교부들의 문학부정론, 청교도의 문학부정론으로 이어져 왔다. 청교도들의 문학부정론은 첫째, 문학보다는 더 많은 결실 있는 학문이 있으므로, 사람은 문학보다는 다른 곳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더 좋다. 둘째, 문학은 거짓말의 어머니이다. 셋째, 문학은 악폐의 유모이다. 그것은 인간을 온갖 해로운 욕망에 감염케 만든다.(Philip Sidney, Apology for Poetry, in Criticism: The Major texts,
ed. Bate, p.97)

그리고 기독교문학이 교리를 전할 목적으로 쓰인 목적문학이고, 호교 문학이라는 점에서 일반문학이나 순수예술문학에 비해 질이 떨어지는 문학이라는 생각에 동의해 왔다. 엘리어트는 기독교시를 그런 관점에서 “이류(二流)의 시”라고 했다. 나도 기독교문학을 이같이 사고에 물든 무의식적 평가를 해 온 사람이다.

그러나 신앙문학의 목적은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거나 강요하는 식의 호교론적인 목적문학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냄으로 인류를 구원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표현하는 문학인만큼 세상 모든 문학을 초월하는 절대가치의 문학이다. 기독교문학은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를 문학적인 메타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지평을 확대해 가는 것이며,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가는 신앙적 비전이다. (이상은, 홍문표 『기독교문학의 기본원리와 창작방법』(서울:창조문학사,2005)에 기술된 내용을 요약해 봤다.)

한 편의 신앙 시(詩)가 교회 설립예배의 분위기를 한껏 고무시키고, 톡톡 윤기 나게 했는지는,
지난 예수제자교회 설립예배 시에, 나는 ‘여호와의 싹’으로 체험했다.

바라옵기는,

때마다, 일마다
나에게 부어 주시는 하늘 영감으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소박하고, 간명한 예수의 복음을
온누리에 전하는

하늘 시인(詩人)이.

나는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