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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아이들

2011.05.27 00:02

그루터기 조회 수:987 추천:76

선유도 아이들

           -나를 찾아 온 세 번의 말씀

 

그 두 번째, 그 옥합을 깨뜨려

 그렇게

쉽지는 않았지만 아이들 중심으로 삶의 패턴을 바꿔가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고 또 때로는 힘이 들고

그러다가도 어떤 때는 즐겁고 기쁘고

아무 생각없이 아이들과 희희낙락하고

만화영화 시작하면 밥 하다가도 tv앞에 정신 놓고 앉아 아이들과 함께 만화영화 노래도 따라 부르고

그 때 제일 재미있게 보았던 만화영화가 [닐스의 모험]입니다.

내 시간을 아이들에게 조금씩 양보해 가면서

꽉 조이고 있던 끈이 풀리는 것처럼 삶이 느슨해져 가고

먼지 쌓인 책장을 그냥 두기도 하고

그리고 조금씩 바보가 되어가면서도

아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이들로 자라가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던 둘째 아이도 점점 차분해 지고

우아한(?) 생활 습관도 몸에 배 가던 초겨울에

아이들과 성탄 연습을 하던 11월 말, 바람 부는 날에

둘째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보러 왔습니다.

단지 아이를 보러만 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주님께서 아이의 엄마를 며칠간 우리 집에 머물게 하라고 하십니다.

저녁마다 일대일 양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남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깨어졌던 한 가정이 주님 안에서 다시 회복 되고

전 옛날의 균형잡힌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봄날의 소쩍새 소리와

여름날의 천둥 번개를 지나고

무서리 하얀 가을 아침의 국화 옆에선 누님 같이 조금은 성숙한 모습으로.

아침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향유 옥합을 드리고 나서 일 년 후

 마가가 전하는 복음서에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여자를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본문을 읽는 순간 저는 씩~ 회심의 미소를 날렸습니다.

'작년에 제가 드린 향유 한 옥합 잘 받으셨지요? 제겐 더 이상 향유는 없습니다.'

자랑스럽게 가슴까지 내밀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말씀묵상을 끝내려고 했지요.

그런데 제 눈을 끌어당기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 옥합을 '깨뜨려' 얼마나 큰 글자로 다가오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랑스럽던 마음과 생각을 접고 다시 마음을 주님께로 모았습니다.

그 옥합을 깨뜨리다니(?)

이번엔 제대로 된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깨 버려야 할 옥합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옥합의 주둥이를 깨야만 쓸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옥합을 깨뜨려야만 향유를 쓸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여자, 마가는 그 여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막14:9)하시던

주님의 말씀을 부연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 여자가 한 일이 그리도 의미 있는 일이 된 것일까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요?

향유 한 옥합 값어치에 상당한 헌금을 드리면 이런 황송한 격려를 들을 수 있을까요?

베다니의 그 여자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드린 그 여자가 부럽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그 여자가 부럽습니다.

어쨌거나 그날 아침

제 머릿속은 또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깨뜨려야 한다는 말씀인가?

 

틀을 깨라

 저는 남편에게 기대하는 일이 참 많았었습니다.

이리 말하면 지금은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기대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내가 세워놓은 기준을 가지고 남편에게 하는 요구가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원하는 남편이 되어 달라고 요구조건이 많았었습니다.

내 기준, 표현하기 쉽게 '사각 틀'정도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이 '사각 틀'을 남편에게 들이대면

어느 날은 머리가 삐죽 나와 있고

머리를 겨우 집어넣고 나면 팔이 불쑥 나와 있고

팔을 겨우 우겨넣고 나면 다리가 쑥 빠져 있고

뭐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이 '사각 틀'을, 내가 가진 기준을 남편에게만 들이댔겠습니까?

아이에게도, 성도들에게도 이 '사각 틀'을 들이대고 보면

모두 다 고쳐야 할 단점들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 조건도 많고 잔소리도 많았습니다.

상처를 주는 일도 받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날 아침

내가 가진 그 '사각 틀'을 깨라 하십니다.

내가 가진 기준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보라 하십니다.

'사각 틀'을 통해 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 하십니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일 뿐인데

나와 다른 것은 늘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교정하려고 드는 내 오만을 지적하십니다.

내가 남편에게 기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기대가 아니라

내 욕심의 다른 한 쪽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제, 그 기준을 내려놓고

그 '사각 틀'을 깨버리고 남편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존중하고 격려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종하라 하십니다.

마음으로부터 복종하라 하십니다.

내 오만과 편견이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내 용렬함이 그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날 아침 주님은

내 못난 자아상을

편협하고 이기적인

열등의식의 다른 얼굴인 자존심이라는 것에 숨은 내 실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내 기준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남편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은

첫 번째의 향유보다 더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아직, 지금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여전히 그 '사각 틀'을 들이댈 때마다 주님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바다처럼 수용하려면, 관용하는 사람이 되려면 그 '사각 틀'을 깨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선유도는

雨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