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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아이들

2011.06.02 07:46

그루터기 조회 수:999 추천:69

선유도아이들

            -나를 찾아온 세 번의 말씀

 

그 세 번째,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름의 끝 무렵에 시작되는 해태양식은 겨울이 절정기 입니다.

여름이 막 물러서는 9월초부터 바다에 띄울 그물들을 새로이 준비하고

널따란 마당이나 빈 공터에 그물을 펼쳐놓고 포자 붙일 그물을 만듭니다.

그때쯤이면 바람도 뒤바람(북풍)으로 바뀌어 제법 선선하고 고슬고슬합니다.

그물 일 하기에 적당하지요.

그물 일이 끝나면 남쪽에서 굴 껍질에 붙여 싹을 틔운 김의 포자를 사가지고 와서

만들어 놓은 그물에 포자를 붙입니다.

김의 포자는 햇빛을 싫어해서 옛날에는 포자 붙이는 일을 밤에만 했었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어둠이 내리면 장불(동네 앞에 있는 바닷가)에 알전구 환하게 내걸고

온 동네 사람 다 모여 포자를 붙입니다.

웃고 떠들며 밤늦도록 포자를 붙이는 날은 온 동네가 꼭 잔칫집 같습니다.

환하게 불 밝힌 장불이 장관입니다.

밤늦도록 포자 붙이는 날엔 우리도 밤에 장불로 심방을 갑니다.

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기도해주고 포자 한 두 개씩 붙여줍니다.

그물에 붙인 김의 포자는 바닷물에 띄워집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그물들 사이로 김이 까맣게 자랍니다.

그러면 겹겹이 접어서 띄웠던 그물들을 한 자락씩 펴서 분망합니다.

분망하고 서너 주 지나면 그물들 사이로 김이 무럭무럭 자라 첫 번 김을 채취합니다.

채취한 김은 육지에 있는 김 공장으로 보내져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김으로 만들어집니다.

칼바람 소리를 들으며 김이 자랍니다.

하얗게 뒤집어지는 파도와 햇빛을 받으며 김이 자랍니다.

깊은 바다 속 소라들의 노래를 들으며 김이 자랍니다.

어부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김은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렇게 선유도의 어부들은

겨우내 추운 바다에서 김과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나서 10년 후

 주님은 똑같은 본문, 마가복음의 말씀으로 제게 오셨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제게 다가 오셨습니다.

주님께 좋은 일(?)

전 왜 이 말씀을 오늘에서야 듣게 된 것일까요?

첫 번째의 향유가 아이들 중심으로 사는 삶

내 이기심을 내려놓는 훈련이었다면

두 번째의 향유는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삶

내가 가진 기준을 내려놓는 훈련이었습니다.

전 그게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유치하게도 그것이 자랑스러운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삶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10년이 지난 후에야

그 두 가지 순종은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은 일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이제야 말로 주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나 보다 하고 기대합니다.

또 어 떤 사람은 향유를 허비한다고 힐난합니다.

그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에 더 가까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여자를 무안하게 합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 여자를 생각없는 여자라고 책망합니다.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왕이 되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더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여자가 하는 일을 내버려 두라 하십니다.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좋은 일 (?)

언제 주님이 당신 자신을 위해 뭔가 바라신 적이 있으셨던가요?

제자들에게 혹은 주님께 모여든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셨던가요?

참 생소한 장면입니다.

주님께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고치시고, 눈 붙일 겨를도 식사 할 겨를도 없이 동분서주 하시면서도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뒤의 뒷정리까지 몸소 하셨던 주님이신데

오늘은 좀 다르게 느겨집니다.

아니 다릅니다.

오늘 주님은 주님을 위해 향유를 허비한(?)일을 기꺼워하십니다.

주님께 부어 드린 향유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주님은 참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모가 되었다고 그 자체가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섬 사역 자체도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우선적으로 하면서

여전히 나 중심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10년 전 주님은

베다니의 마리아를 통해

아이에게조차도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나를 보게 하셨습니다.

아이에게도 '내 시간'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지독히 이기적인 나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 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 중심의 삶을 산다는 건 지식일 뿐이었습니다.

베다니의 그 여자를 통해

내가 가진 기준으로 사람을 보는 편협한 나를 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틀'에 다른 사람을 가두는 완고한 나를 드러내셨습니다.

남편에게도 복종하지 못하는 내가 주님께 순종한다는 건 이론일 뿐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의 향유로부터 10년 동안 주님은 꾸준하게 나를 양육하셨습니다.

아주 세밀하게

만약 그 때, 그 10년 전에 오늘처럼 말씀하셨다면 제가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모르긴 해도 아마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기준잉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되어 여전히 용렬하게 굴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 중심으로 살면서 주님 중심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참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선유도는

해당화 촌스러운 향기 바람에 날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