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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우 박사의 이메일

2012.01.0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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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워싱턴 교민사회 울린 강영우 박사의 이메일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054784

시한부 인생을 통보받고도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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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연말이 오면 지나온 해를 돌이켜 보고 새로운 해를 기약하게 됩니다. "내년에는 더 잘 살아야지…"하는 각오도 다지면서 10가지, 아니면 한 두 가지라도 새해 목표를 정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미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새해에도 나는 살아있을 것이라는 거죠. 새해를 맞이하지 못할 사람에게는 새해 다짐이라는 게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가슴 아픈 상황인데, 정말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적어도 보이기에는 말이죠)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분을 취재하게 됐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취재가 끝나고 나서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그 분은 차분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일원에는 유명한 한국 분들이 꽤 있습니다. 며칠 전 취재한 강영우 박사도 그런 분 중에 한 명입니다.

13살 중학생 때 축구공에 맞아 시력을 잃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동생 둘은 고아원과 친척집에 맡기고 본인은 맹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고난은 그러나 불행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맹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예쁜 여대생을 만나게 됐고,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해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는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노력은 끝나지 않았고, 한국 시각장애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미국 박사가 됐습니다.

거기가 끝이 아니었죠.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의 국가장애위원이 됐습니다. 차관보급 고위공직자가 된 것입니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던, 게다가 앞도 못 보던 고아가 최강대국 미국의 고위공직자가 됐다는 그의 인생 역정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로는 한국과 미국을 가리지 않고 다니며 강연을 하고, 책을 쓰면서 후배들에게 자신의 인생경험을 나눠주는 데 노력해왔습니다.

물론 강 박사가 가는 곳에는 항상 부인 석은옥 여사가 동행했습니다. 강 박사의 성공담은 그래서 강 박사 혼자의 것이 아니고 부인과 공동으로 만들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아버지 못지 않은 성공을 이뤄냈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이 인정하는 최고의 안과의사가 됐고, 둘째 아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법률고문이 돼서 백악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더 할 수 없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때 강 박사에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찾아 왔습니다. 지난달 29일 존스홉킨스대 병원에서 "췌장암 말기여서 길어야 두 달 정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강 박사의 나이는 올해 68살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은 나이도 아닙니다. 평균 수명 80세가 가까워 온 요즘 기준으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강 박사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고 남들과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성탄절 직전 그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보낸 이메일이 대표적입니다. 이 이메일 한 통은 평소 강 박사에 대해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이메일의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늘 여러분의 곁에서 함께하며,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보다 간절하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여러 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 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램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 받았습니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 드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흔히들 질병으로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게 되면 사람들의 반응은 최소한 ‘부인-저항-체념’의 3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체념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어쩔 수 없지…"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 박사는 이 편지를 통해서 자신에게 다가온 인생의 마지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습니다. 무엇보다 인생에서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를 글속에 감사하다는 말이 가득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거죠.

이 편지의 내용이 워싱턴 지역 신문을 통해 알려졌고, 저도 취재에 나서게 됐습니다. 그리고 취재과정에서 저의 상식은 또 한 번 깨졌습니다. 저는 취재 자체가 어려울 줄 알았습니다. 건강상태도 좋지 않을 테니 잘 돼야 전화 인터뷰 정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강 박사는 기꺼이 카메라 앞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밤 늦은 시각 워싱턴에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강 박사 자택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겉은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운 하우스 모양인 콘도였습니다. 강 박사와 부인, 두 사람이 살기에는 편해 보였습니다. 강 박사는 인터뷰 직전 큰 아들 집에서 성탄절 파티를 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저는 눈이 멀고,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우리 세 남매의 가족이 오랜만에 한 데 모였습니다. 세 명이 지금은 17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중에 9명이 박사입니다. 다들 미국 땅에서 열심히들 살아온 거죠. 큰 아들 집으로 취재오시겠다고 해서 그래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손주들까지 합세해서 안 돼요라고 크게 소리치더군요. 파티 분위기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거였죠."

솔직히, 강 박사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느냐고 말이죠. 수술을 해서라도 삶의 기간을 조금 더 연장하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저는 보시는 것처럼 앞을 보지 못합니다. 의사가 그러더군요. 수술을 하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20% 정도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안 하겠다고 했어요. 성공하더라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약 먹고 그러면서 말이죠.. 시각 장애인인 저에게는 그렇게 더 삶을 연장하는 게 큰 의미가 없어요. 건강한 몸도 아니고 그런 상태로 2년 정도 더 산다고 하는 게... 사실 이 통보를 받고 한국에 계신 몇몇 분과도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수술하라고, 그냥 있으면 안 된다고들 그러시는 거예요. 아, 이게 전화로 알려드리면 다들 내 선택을 반대하시겠구나 싶어서 이메일을 보내기로 한 겁니다.

솔직히 올해는 이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제 인생 최고의 해였습니다. 결혼 후 자식이 없어서 걱정하던 둘째 아들도 두 달 전에 아이를 낳았거든요. 제가 펴낸 책도 한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고... 공직에서 은퇴한 날이 꼭 65세가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제 3년이 좀 지났는데....  어쨌든 제가 신앙인입니다. 다음 세상을 믿는 사람이죠.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레이건 전 대통령의 어머니가 레이건에게 해줬다는 말입니다. 오늘 너에게 생긴 나쁜 일이 내일의 좋은 일이 될 거다라는... 죽음이라는 게 사람에게는 가장 나쁜 일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다음에 더 좋은, 가장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될 거예요. 전 그렇게 믿습니다.

오래 전부터 아내와도 이런 얘기를 했기 때문에 아내도 잘 이해하고 있고,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004년에 제가 심장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그 때 제가 결심을 했습니다. 몸에 무슨 일이 생기면 무의미한 연명 시술같은 것은 받지 않겠다고 말이죠.

그리고 제가 심장마비 이런 걸로 갑자기 죽을 수도 있는데, 얼마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만 해도 정말 뜨겁게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살면서 습관대로 이 통보를 받은 뒤에 제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해놓고 차분하게 하고 있는데요, 2주라는 시간 동안에도 할 수 있는 게 많더군요.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 것을 어떻게 직면하느냐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싶어요…"

           

신앙이 강 박사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에게 일어난 일을 아내가 정말 온 맘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석은옥 여사에게도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죽음을 통보받고도 흔들리지 않고 마무리를 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남은 이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잘 살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준비 잘하고 있습니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주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두 분의 그런 모습이 조금 무서웠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모습과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존경스러워졌습니다. 적어도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인터뷰가 30분 정도 진행됐을 때 강 박사가 땀을 많이 흘려서 생각보다 조금 일찍 인터뷰를 끝냈습니다. 혹시라도 이 인터뷰가 강 박사의 남은 삶을 더 단축시키는 게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석은옥 여사는 "오늘 저 이가 컨디션이 아주 좋아요. 이 인터뷰 있다고 미리 미리 조절도 하고 그랬어요."라고 했습니다.

한 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번 취재를 하기 전까지는 저도 강 박사 부부에 대해서 호의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곳에서 서너 차례 만났는데,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적극적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본인들의 동정이나 책 발간 소식들을 기사화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교민 중에도 그런 분들이 일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지금은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통보받고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 강 박사의 모습은 제가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였습니다. 특히 "시력을 잃은 것도 축복이었죠. 그 덕분에 더 열심히 살 수 있었습니다. 장애라는 것을 지옥으로 생각하면 그대로 된답니다. 그걸 축복으로 여기면 놀라운 일이 생기죠. 무엇보다 만남의 축복이 옵니다. 저와 같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더 나은 삶을 바라보는, 정상인이어도 저를 정말 아끼는 사람들을 만나서 참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의 오늘은 다 그런 분들 덕분입니다."하며 만남의 축복을 인생의 성공 조건으로 꼽았던 말도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헤어지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췌장암 진단을 한 의사가 그 분야에서는 대단한 권위가 있는 의사라고 하셨는데, 잘 관리하셔서 그 의사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셨으면 합니다."가 고작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하던 이형기 시인의 '낙화'가 생각났습니다. 저렇게 아름답게 져야 할텐데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던 모양입니다.

최종편집 : 2011-12-29 0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