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선유도아이들

2010.10.25 23:09

그루터기 조회 수:759 추천:67

나를 찾아 온  세 번의 말씀

그 첫 번째,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마르다의 집에

기름 냄새 솔솔 풍기고 향기로운 포도주 찰찰 넘치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 잔치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온 동네 사람들도 다 모였습니다.

마르다의 집안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웃음이 가득합니다.

아마도 그 날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열었던 날인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쁩니다.

나사로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깊은 생각에 잠겨 계십니다.

그날따라 예수님의 말씀에는 비장함이 묻어있습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분명 그날은 뭔가 좀 달랐습니다.

모두 함께 흥겹게 잔치를 즐기고 있는데 마리아가 조용히 일어나 예수님께로 다가갑니다.

그리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요12:3)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해지자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조용해집니다.

이게 무슨 향기야?

사람들의 눈이 모두 향기를 따라갑니다.

거기에 마리아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에 상당한 高價의 향유 한 병을 예수님의 발에 다 쏟아 붓고

긴 머리를 풀어 내려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예수님의 발을 함께 적십니다.

모두들 마리아와 예수님을 주시합니다.

분위기 파악이 덜 된 제자 중 하나가 선뜻 나서서 잘난 체를 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선생님의 마음과 같은 것이기에

그이는 자기가 칭찬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칭찬이 아닌 핀잔을 하십니다.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장례할 날(?)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말씀인가?

어쨌거나 그날, 예수님은 매우 흡족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향유를 받으시고 기꺼우셨던 것 같습니다.

마가가 전하는 복음서에 보면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14:9)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이런 황송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 날 아침, 저도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저도 주님께 향유를 드리고 싶어요.'

'제가 드릴 향유는 무엇인가요?'

 

지금

선유도는

天地間에 바람소리 가득합니다.

바다는 하얗게 뒤집어지고

육지로의 모든 교통은 끊겼습니다.

 

그 날 아침, 향유를 드리고 싶다는 제 마음을  받으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제게 오셨습니다.

'네가 가장 귀한게 여기는 것으로 나를 대접하라'

그것이 제가 드릴 향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제게서 받고 싶으신 향유 한 옥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머릿속이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지?

아무리 뒤적여봐도 딱히 이거다 싶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 드렸습니다.

'귀하게 여길 변변한 것이 없습니다.'

'네가 잃어버렸을 때 잠이 오지 않는 그것이다.'

잃어버렸을 때(?)

저는 혼자 있는 '내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집안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뭐, 그렇게 내가 정해놓은 시간과 규칙을 잘 지키며 사는 걸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정한 그 날의 할 일들이 누군가로부터 방해를 받게 되면 불편합니다.

불편하다 못해 손해 본 느낌이 듭니다.

무슨 일이든 칼로 자르듯 정확해야 하고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고 지나가면 바보가 된 것 같고

책장에 쌓인 먼지를 보면 자려고 누웠다가도 일어나 닦아내야 잠이 오고

그날 해야 할 일은 그날 끝내야 맘이 편하고....

뭐, 대충 이런 식이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내 시간'을 달라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주님께 '獻身'을 운운했습니다. 

제 평생을 드리는 일이 부족하여 '시간'을 달라하시느냐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님이 원하시는 대답이 아닌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까?'

제대로 된 질문을 드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보내 준 은비와 한나를 나를 섬기듯 양육하라'

아이들 중심으로 사는 것이 주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이 중심으로 살라고(?)

이 무슨 당황스런 말씀인가?

차라리 기도를 한 시간 더 하라시던가 나가서 전도를 더 하라시던가

그도 아니면 성도들을 더 잘 살피라 하셨으면 순종하기 쉬우련만

아이들 중심으로 살라하십니다.

아이들을 위해 '내 시간'을 쓰는 것이 아까워 나 중심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내 이기심을 지적하십니다.

아이들에게조차도 내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독한 내 이기심에 손을 대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기적인 내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눈물로 내 영혼을 만지십니다.

힘들고 억울했지만 그 날부터 아이들 중심의 생활 리듬을 세워가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보다 아이들이 원하는 일을 먼저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가급적이면 '안 돼'라는 말을 안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도 큰 아이는 8년 동안의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지만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21개월 된 둘째 아이(그 때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온 지 십 여일 정도 되었습니다)는 늘 말썽을 달고 다녀 하루도 집안이 정돈 된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가정 예배 시간에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눈을 지그시 감고 두 손 높이 들고 찬양하는 그 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투는 부모 밑에서 상처로 얼룩진 그 아이의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이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 중심으로 살면 우리 집이 돼지우리가 될 줄 알았습니다. 저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집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국으로 만들어가고 계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