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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기념일에(2009년 7월 4일)

2009.07.05 09:51

윤사무엘 조회 수:1024 추천:69

 

미국 독립기념일에(2009년 7월 4일)       윤사무엘 목사(감람원교회)


오늘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지 233주년이 되는 날이다. 어제 밤 LA로부터 돌아와 몸이 피곤한데도 토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필라에 있는 서재필 재단센터에 도착하니 7시 45분이었다. 재단 회장님의 영접을 받고 센터에서 30분 정도 기다리니, School Bus 두개가 와서 속속 도착하시는 한인회 관계자들, 노인회 회원들, 참전 용사회원들, 일반 시민들이 분승하여 필라델피아 퍼레이드 출발하는 곳으로 향했다. 날씨가 너무 좋다. 기온도 72도(섭씨 16도)이며 구름이 약간 낀 맑은 날씨이다.

미국독립일은 필라델피아에서 시작되었기에 이곳에서 지키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고,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이 도착한 플리머스(Plymouth, 보스톤에서 남쪽으로 35마일)에서 지내는 것이 인상적이며, 성탄절은 Bethlehem, PA에서 지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오늘 퍼레이드는 99개 팀이 참가한다. 명단을 훑어보고 준비하고 있는 퍼레이드 팀을 살펴보니, 필라시장, 주지사, 상원의원, 하원의원, 각 시장들, 정치 지도자들 비롯하여, 소방서, 경찰, 적십자, 자원봉사팀, 보이스카우트, 컬스타우트, 몇 개 고등학교 밴드팀, 미국 청소년 연합회, 월남전 참전용사회, 아일랜드(Irish) 등 이민자들 (태국, 볼리비아, 멕시코, 한국 등), 등 99개 팀이다. 이중 한인들(Korean American)은 한국전 참전 용사들과 함께 51번째 퍼레이드를 출발했다. 연도에 수만명들의 시민들이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기수단, 3대의 무개차, 농악대, 참전 용사회원들을 앞세우고 내가 서고 노인회, 청년회, 학생회, 아동들 등 우리 팀이 약 100여명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또 다른 100여명의 한인들과 취재진들이 우리 팀 주변으로 동행했다. 11시에 선두가 출발했는데 우리 팀은 11시 45분에 출발했으니 행렬이 무척 길었다. 필라 중심가를 끼고 행진하는데 연도에 세계에서 모여든 인파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미국 독립일에 세계 언론의 취재가 이곳 필라에 와서 하기에 수많은 취재진들이 몰려왔던 것이다. 이 퍼레이드 이어서 “자유의 종” 시상식이 독립기념관 앞에서 거행된다. 1990년대 말에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 상을 수상(10만 불)하였다.

농악대가 가장 수고 많이 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15명의 농악대원들과 특히 한 자매가 북을 치면서 머리 위로 긴 줄을 돌리는 솜씨는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우리 앞과 뒤에 밴드부가 요란하게 연주하는데도 많은 분들은 우리 농악대의 연주에 흥겨워 했다.

12시 40분 퍼레이드가 마치고 우리는 바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 추모비에 가서 200여 한인들이 명예 총영사 되시는 미국 변호사의 추모사, 헌화, 묵념 후 내가 영어와 한어로 기도를 인도했고, 한 스님이 창을 부르고, 한인회장 박영근변호사가 인사말로 모든 식이 마쳤다. 비록 2마일 정도 걸었지만 오늘 행사는 너무 감격스럽고 기뻤다.

독립일을 맞이해서 다음과 같은 자료를 정리해 보았다. LA에서 구입한 크리스천 뉴스위크 신문(2009년 7월 1일 수)에 게재된 조정래 목사의 “미국의 건국 역사를 돌아보며...”와 위키백과사전을 참고했다.


영국은 당시 오랜 전쟁 끝에 국가재정이 빈약하여 영국에 속한 식민지였던 미국의 이민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어 국가재정을 충당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에 온 이민자들은 국왕(King George III)과 국왕의 부하인 식민 통치자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영국 국왕에게 이민자들의 권익을 좀 보장해달라는 항의성 데모를 했으나,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 <Common Sense>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란 저서를 통해 ”미국은 영국의 속국으로 있을 것이 아니라 이에 독립하여 자체적인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을 내세우자 미국에 이민 온 자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775년 4월에 독립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13개주의 식민통치주(American colonies)의 대표자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1776년 7월 4일 정오에 자유의 종(Liberty Bell, 이 종에는 레위기 25:10 말씀이 기록됨:  “And ye shall hallow the fiftieth year, and proclaim liberty throughout all the land unto all the inhabitants thereof: it shall be a jubile unto you; and ye shall return every man unto his possession, and ye shall return every man unto his family.”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을 타종하며 의회에서 채택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고 대영제국(Great Britain)으로부터 독립되었음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토마스 제퍼슨(훗날 3대 대통령)이 초안한 내용을 7월 2일 의회에서 최종 수정되어 발표한 것이다. 이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는 만민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에 의해 어떤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천명한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여기에 서명한 56중에는 2대 대통령을 지낸 John Adams, 초안자 및 3대 대통령을 지낸 Thomas Jefferson, 및 필라델피아의 대부인 Benjamin Franklin (U Penn 설립자, 피뢰침 발견, 초대 프랑스 대사, 초대 우체국장), John Witherspoon (서명자 중 유일한 목사, 프린스톤대학교 설립자, 초대 미국 장로교 총회장) 등의 건국의 아버지들이었다.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모국인 영국의 국왕에 대한 반역죄를 짓는 것으로 이에 대한 댓가는 사형이었음을 이들은 잘 알았다. 영국군들과 싸우게 된 이들 독립 운동가들 중 아홉명은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었고, 이들의 아들 중 두명이 전투 중에 죽었으며, 미국의 독립을 선언했던 연방의회의 의장 John Hancock 은 가족을 피신시키던 중에 그의 갓난 딸이 죽었고, 고등법원 판사였던 Richard Stockton은 영국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후 후유증으로 죽었고, 서명자들 중 17명의 집에 불에 타 파괴되었다.

영국군의 Comwallis 장군이 Thomas Nelson, Jr.의 집을 차지하여 지휘본부로 사용하자, 토마스 넬슨은 George Washington 장군에게 영국군을 격파하기 위해 자기 집을 폭격하라고 했고, 워싱턴의 군대는 그의 집에 폭격을 가했으며, 넬슨은 집 없이 살다가 죽었단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Francis Lewis 는 아내가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죽는 슬픔을 당했다. John Hart 는 영국군에 쫓기어 도망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죽어 있었고 그의 자녀 열세명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는 자녀들을 만나지 못한 채 죽었다.

George Washington 이 이끌던 독립군들은 Valley Forge(계곡)에서 영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느라 추운 겨울에 동상이 걸리고, 병에 걸려 죽고, 먹을 것이 없어 군화의 가죽을 씹으며 마침내 영국군을 격퇴하고 9년에 걸친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이들 가운데 25명이 변호사, 법률가였으며, 11명은 사업가, 9명은 농장주, 나머지는 목사, 교사, 음악가, 인쇄업자 등으로 교육을 많이 받고 안정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으나, 미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국민들은 전쟁 영웅인 워싱턴 장군을 신생국가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그는 왕이 되기를 거부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도입하고 초대 대통령으로(재선됨) 봉사후, 자기의 농장에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