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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앙의 뿌리를 찾아서(6)

2009.04.21 11:32

어진이 조회 수:920 추천:47

3부 민족을 위해 민족과 함께 꽃피운 복음의 능력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양력)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1884년 9아펜젤러와 언더우드월 20일 알렌을 조선으로 먼저 보내셔서 선교의 길을 닦게 하셨다. 민족의 아픔이고 정치적인 사건이지만 갑신정변과 알렌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연출과 캐스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조합이었다. 하나님은 이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 입국하기 전에 먼저 한국 땅에 한국어 성경을 주셨고, 수많은 교인들(솔내교회 교인과 그 외에 세례를 기다리고 교회의 목자를 기다리는 교인들)을 준비해놓으셨고, 서상륜, 서경조, 백홍준, 이성하와 같은 전도인을 이미 훈련시키셨고, 바울이 천막을 친 것이 생계가 아니라 복음을 위한 것인 것처럼, 이들도 복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병원사역까지 마련해 놓으셨다. 역사의 감독은 하나님이시다. 다만 우리는 캐스팅된 배우일 뿐이다.

광혜원(제중원)이 발전하면서 한국에 대한 선교는 급격하게 확대된다.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인천 제물포 항에 공식 선교사로 첫발을 내딛는다. 아펜젤러는 조선 사정과 부인의 신병으로 인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7월 달에 재입국하게 된다. 언더우드는 오자마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게 된다. 사실 선교는 이때까지만 해도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어머니의 죽음과 잇따른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13살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한다. 1877년 18세에 뉴욕대학에 입학하고 1881년 뉴브린스윅 신학교에 입학하여 유명한 부흥목사 이스톤 교수의 지도를 받는다. 1884년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학위와 목사안수를 받는다. 원래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지망생이었고, 그렇게 준비를 해왔다. 그러던 차에 1883년 겨울, 일본 선교사인 알버트 올트맨스 박사의 강연을 듣고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언더우드 가. 그후로 몇 번이나 선교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두 번이나 나는 나의 교회에 요청을 했지만 자금의 부족으로 거절당했다. 두 번이나 장로교 사무국에 요청했지만 역시 소용없이 되고 말았다. 한국으로 향한 문은 닫혀졌고 집에 머물러있던지 내 첫 결정인 인도를 향하는 길은 넓게 열린 듯했다. 그래서 나는 (인도를 향해) 시도해보고자 하고 뉴욕교회의 부름에 응답하겠다는 적극적인 뜻을 적었다. 그리고 봉인해서 우편함에 넣으려고 하는 순간 편지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한 음성을 들었다. 한국엔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구나! 네가 가면 어떻겠니? 그래서 던지려던 편지를 다시 집어들고 한국 지역을 향해 장로교 사무국에 한 번 더 시도해보자 하고 23번 중앙로를 향해 다시 향했다. 거기서 이전에 봤던 직원은 없었고, 새로운 직원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F,F, Ellinwood 였고,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격려해주었다. 며칠 후 나는 다음 약속을 통지받았고 나는 임명되었다.”

I had about decided upon this course and had written with much reluctance my acceptance of a call to a New York church ; had sealed this letter and was about to drop it in the letter box when it seemed almost as though I heard a voice saying 'NO one for Korea' 'How about Korea?"
경신고등학교
엘린우드가 기쁘게 맞이해주었던 것은 바로 몇 장 앞에서 언급한 맥윌리암스라는 이사가 그동안 일본에서의 간곡한 요청에 감동되어 꾸준하게 선교비를 보내온 것이 6천 달러에 달해서, 선교회는 이사회를 소집해서 언더우드를 조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1884년 7월 26일 목사로서 한국 선교사 1호로 임명받고,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 1885년 1월 일본에 도착하고, 거기서 이수정으로부터 한글을 비롯하여 조선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한 것이다. 그 때 그의 나이 27세이다.

언더우드와 경신고, 연세대

언더우드는 한국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맨 처음 도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고아원과 학교를 설립하였다. 언더우드는 1886년 정부의 허락을 받아 학교를 설립한다. 장차 교역자 양성과 기독교대학으로 발전시킬 꿈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해 1월부터 고아원 설립에 대한 구상을 했는데, 고아나 극빈자 아동들을 수용해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술학교 형태를 구상했다. 이것이 소위 ‘언더우드학당’이라고도 불리는 고아원 학교의 시작이었다. 이 학교는 1890년 사무엘 마펫(마포삼열)목사가 교장이 된 이래 1891년 ‘예수교 학당,’ 1893년 프레드릭 밀러목사(각주1) 가 교장이 되어 ‘민로아 학당’으로 불리고, 1901년 제임스 게일이 교장이 되우사 김규식어 ‘구세학당’ 으로 불리다가, 1905년에는 경신학당으로 정착한다. 1914년엔 그 안에서 조선기독교대학이 설립이 되는데 오늘날 연세대의 모체이다. 경신학교의 대학부는 연희전문학교로서 이 학교가 후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되었고, 고등부는 현재 경신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언더우드와 김규식(각주2), 안창호

언더우드의 고아원에는 갑자기 고아가 된 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고아가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아들 중에는 양반집 자제들이거나 아니면 개화당 집안의 자손들이 많았다. 언더우드가 들어온 1885년은 1884년 갑신정변이 끝난 직후라 개화당에 속해서 처벌받은 이의 자손들을 감히 친척이라 할지라도 돌봐주는 이가 없어 버림당한 아이들이 많았다. 그중에 언더우드가 특별히 주어온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의 집은 김옥균의 개화당에 가담했다 역적으로 몰려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고아원에 들어오고 난 후 어느날, 이 아이는 서대문 밖 숙부집을 찾아갔다가 그만 숙부에게 감금되어 버리고 만다. 언더우드와 알렌은 직원을 시켜서 수소문해서 겨우 그 집을 찾아내고 당장이라고 찾아가서 빼내고 싶었지만 외교적인 마찰이 일까봐 직원을 시켜서 데려오게 했다. 이 아이를 찾으러 간 직원은 한참 뒤에 숨을 몰아쉬면서 큰 일 났다고 보고한다. 아이가 너무 배가고파서 창고에서 그만 벽지를 뜯어먹고 그것이 잘못되어 지금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이들은 배고프면 흙을 먹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 아이도 배고픔을 참지 못해 벽지를 뜯어서 입에 계속 넣은 것이다. 정말 비참한 것은 숙부는 밖에서 이것을 다 지켜보고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이가 거의 초죽음이 되자 밖에다 갔다 버렸다는 것이다. 언더우드와 알렌의 응급처치로 아이는 다행히 생명을 건졌고, 훗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가 되는데 바로 우사 김규식 선생이다. 1910년 김규식은 새문안교회 장로가 된다. 김규식은 평생에 언더우드를 잊지 못했는데 그가 쓴 호(우사)만 보더라도 언더우드(元杜尤)목사의 이름을왼쪽부터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 사용할 정도였다.

한 학생이 구세학당에 입학할 때 선교사 앞에서 구술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선교사가 물었다.

선교사 : “어디서 왔나요?”
학 생 : “평양에서 왔습니다.”
선교사 : “오호, 평양이 여기서 얼마나 되는지?”
학 생 : “800리쯤 됩니다.”
선교사 : “그런데 평양에서 공부하지 않고 왜 먼 서울까지 왔나요.”
그러자 그 학생이 선교사의 눈을 응시하며 반문했다.
학 생 : “미국은 서울에서 몇 리나 됩니까?”
선교사 : “8만리쯤 될까?”
학 생 : “8만리 밖에서도 가르치러 왔는데 겨우 800리를 찾아오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송순명(각주3)이란 사람에 의해서 이 학생은 예수를 영접하고 1898년에 입학하게 되고 신학문을 배우면서 학생과 접장(학생회장과 같은 역할)으로 최고의 성적을 거두면서 3년 동안 다니게 된다. 이 학생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을 위해서 큰 활약을 감당하는데 그가 바로 도산 안창호(각주4) 선생이다. 도산 안창호




각주1) 그는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민로아(閔老雅)라는 한국 이름으로 서울에서 예수교 학당 장과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고 충북 청주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그의 부인 안나 밀러는 1892년 11월 15일 남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으며 1903년 6월 17일 38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그리고 밀러 부부의 첫 아들 프레드 밀러가 1898년 11월 7일 출생한지 8개월만에 죽고 또한 그들의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도 1902년 3월 7일 출생한지 하루만에 죽게 되어 양화진에 묻혔다.


각주2) 김규식 (1881.1.29~ 납북)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6세에 고아가 되어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밑에서 자람.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음, 1913년 중국으로 망명, 모스크바에서 열린 약소민족대회에 한국대표 자격으로 참가, 파리강화회의에도 참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총장에 임명, 구미위언부 위원장도 맡음모스크바 삼상회의 신탁통치 반대, 반탁운동,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에도 반대하여 김구와 연합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치 은퇴, 한국전쟁 때 납북

각주3) 영신학교 졸업 후 이 학교의 접장으로 활동한 그는 1904년 10월 2일 장로로 장립된 이래 당회 서기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송장로는 일명 "송신약"이라 불릴만큼 신약성경 전 내용을 암송하였다고 한다. 언더우드목사의 권서인으로 성서를 판매하며 전도활동에 힘쓴 송장로는 특히, 영신학교 교사 당시 2살아래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를 전도하여 영신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각주4) 도산(1878.11.19~1938.3.10)은 평양사람인데 19세기 말 나라가 혼란하여 지자 “외국 마음데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믿고 힘을 기르기 위하여 무작정 상경하여 방황을 하다가 정동거리에서 광고문을 보게 되었다. 즉“누구든지 배우고 싶으면 민노아 학당으로 오시오!”라는 광고를 보고 학당에 들어와서 40여명의 학생들과 더불어 공부를 하다가 10일만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도산은 1897년 10월에 민로아 학당이 문을 닫자 서재필등이 창설한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자신은 관서지부에 조직을 담당하였고,1898년 7월25일에 평양에서 만민공동회를 주최하여 그의 탁월한 연설을 시작으로 경기, 황해도,평안도등 전국을 다니며 국민의 사기진작 그리고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불러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