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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앙의 뿌리를 찾아서(7)

2009.04.24 11:50

어진이 조회 수:2586 추천:63

1919년 도산이 상해에 있을 때 도산에게 가르침을 받고 흥사단에 가입하고 민족개조운동에 동참한 12년 터울의 제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춘원 이광수이다. 춘원 이광수가 상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가 바로 도산선생이며, 정신

춘원 이광수
적 지주로 모셨다. 도산선생의 장례 또한 춘원이 맡아서 했다. 춘원은 이후 변절의 길로 갔지만 그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도산 안창호 전을 지었다고들 한다.

춘원은 교회와 성경에 대해서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실로 예수 교회외다. 귀중한 신구약과 찬송가가 한글로 번역되며, 이에 비로소 한글의 권위가 생기고 또 보급된 것이요...아마 조선 글과 조선 말이 진정한 의미로 고상한 사상을 담은 그릇이 됨은 성경의 번역이 시초일 것이요”라고 평가했다.

좀더 교회와 한글에 대해서 잠깐 보자면 한글운동의 선구자인 주시경을 비롯, 이윤재, 최현배, 김윤경, 정태진, 정인승, 장지영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기독교 지식인들은 일제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에 대항, 민족문화 수호운동에 앞장을 서서 국어・국문・국사 등을 연구, 수호하고 가르쳤다. 

안동교회 장로였던 이윤재는 한글 연구, <우리말 사전>의 편찬,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한글보급 운동에 일평생 헌신, ‘한글장로’란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활동 때문에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943년 12월 함흥에
주시경
서 옥사(獄死)했다. 정동교회 장로였던 김윤경도 1920년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 한글연구와 보급
에 생애를 바쳤으며 새문안교회 집사였던 최현배도 <우리말본>(1935)과 <한글의 바른 길>(1937)등 주옥같은 한글연구 저서를 남겼다. 이들은 모두 일제가 우리말을 억제하기 위해 억지로 꾸며낸 조선어학회사건(1942)에 연루, 체포되어 해방될 때까지 함흥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때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더라면, 한글과 국어의 발전은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날 한글세대가 누리고 있는 컴퓨터 통신문화와 출판문화의 풍성한 열매의 상당한 부분은 성경번역과 일제시대 기독교 한글학자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 참고로
1895년~1939년까지 45년 동안 한글성경이 몇 권이나 뿌려졌을까? 무려 1807만9466권이다!


춘원과 주기철 목사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 애국강연을 들으므로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 된 사람이 있다. 당시 춘원의 강연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여러분, 나라는 망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비탄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발을 하면 우리도 세계의 일등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용기를 가지고 국운을 개척하는 선봉이 됩시다. 민족 운동가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설립한 오산학교에서는 구국의 도량이 될 전국의 인재를 모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민족 교육의 전당, 오산학교에 와서 공부하십시오.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감동을 받아 춘원이 교
외솔 최현배
장 대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민족 지도자인 이승훈을 비롯, 조만식, 서춘선생등을 만나 철저한 민족교육과 함께
신앙교육을 받았다. 그가 바로 주기철 목사이시다.

안창호와 이승훈, 오산학교 출신들

도산의 영향을 받은 이가 어찌 한 둘이겠는가마는 도산보다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데도 도산에게 영향을 받아 의식이 깨인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남강 이승훈이다. 남강 이승훈(1864.4.25~1930.5.9)은 평북 정주생으로 조실부모하고 6세 때 고향을 떠나 납청정으로 이하여서 3~4년간 서당에서 한문 수학, 16세 때 유기상으로 10년간 장사하여 굴지의 부호가 되었으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파산하고 만다. 1907년 안창호의 교욱진흥론 연설에 감동하여 단발을 하고, 금주는 물론 금연을 실천에 옮겼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와 서당을 개편하여 강명의숙을 열고 신민회 발기인에 참여 오산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된다. 이종성, 이광수, 류영모, 신채호, 조만식, 염상섭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 오산학교는 역경에 처할수록 힘을 내는 학교다. 오산학교는 학교의 기둥인 설립자 이승훈이 신흥 무관 학교 사건, 105인 사건, 3·1운동으로 인해 한 번의 유배와 세 번의 옥살이로 전후 9년의 옥고를 겪는 아픔에도 굴하지 않고, 1919년 3월의 강제 폐교와 두 번의 화재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 은근과 끈기의 상징적 학교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현위치 서울시 용산구
남강 이승훈
보광동으로 옮겨왔다.

오산의 졸업생으로는 3·1운동 때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한 독립 운동가 김도태(金道泰·1회)와 김지환(金智煥·.2회), 도쿄 2·8 독립 선언의 주역인 언론인 서춘(徐椿·3회),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고 독립 선언서를 영역(英譯)하여 세계에 알린 신우철(申禹澈·4회), 천재 시인 소월 을 기른 단역문학의 비조 안서 김 억(岸曙金億·4회), 초창기 서양 의학계의 태두로서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白鱗濟·6회), 신사 참배에 대한 항거에 앞장서 순교한 한국 기독교의 양심 주기철(朱基徹·7회), 남강 사후 오산의 기둥이자 재건 오산의 주역 동광 주기용(東光朱基瑢·7회),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의용군 사령관, 군인으로서 육사 교장, 정치인으로서 신민당 당수를 역임한 김홍일(金弘壹·9회), 한국 기독교의 기둥으로서 영락교회를 창설한 한경직(韓景職·10회), 조선일보 주필과 회장을 역임하고 등산을 스포츠화한 언론인 홍종인(洪鐘仁·11회), 우리 나라의 대표적 서정시 진달래꽃'을 지은 민족 시인 소월 김정식(素月金廷湜·12회), 현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민주, 민권 운동의 대표적 양심 함석헌(13회), 토속 서정 시인 백석(白石,18회) 등이 있다.

언더우드에서 시작된 복음의 능력은 새문안교회 초대 장로인 송순명을 통해서 도산 안창호로 전해지고, 도산에서 남강으로 이어지고, 남강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함석헌, 한경직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출신으론 이외에도 3.1운동시 민족대표이며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서를 제출하신 이갑성(각주1),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신 정재용(각주2), 승동교회에서 3,5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원벽(각주3), 3,1만세운동
오산고등학교 전경
에서 학생들을 주도한 이병주, 독립군 모집을 한 김인서 등이 있다.

언더우드와 새문안교회

1886년 연말에 갑자기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찾아왔다. 그는 벼른 것처럼 선교사들의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선교태도에 대해서 비난을 가했다. 언더우드는 심히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펜젤러와 알렌은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였으나 서상륜은 지금 황해도에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들은 조정과 밀착되어 아부나 하고 편한 삶을 산다고 비난하면서 훌쩍 떠나버렸다. 소래로 돌아간 서상륜은 자기의 성격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 비난을 받고 회개한 다음 1887년 봄에 우리가 직접 서울로 가서 세례를 받자고 한다. 이윽고 1887년 봄에 서경조를 비롯한 3명은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는다. 언더우드는 헐버트로 파수꾼을 세우고 세례를 베푼다. 그해 가을 솔내에 직접 가서 교회를 확인한다. 그는 신앙이 확실한 일곱 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후일 새문안교회 장로가 됨)에게는 한국 최초의 유아세례를 베푼다. 언더우드는 이일로 크게 감격하고 용기가 백배하여 회개한 다음 아펜젤러에게 서울 한 복판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일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큰 논쟁이 있었는데 중간에서 알렌이 북장로교인 언더우드는 교회를 세우고, 남감리교인 아펜젤러는 교육 사업을 해보라고 중재했는데, 언더우드는 두 개를 다 하겠다고 소리쳤다.
함석헌과 한경직


결국 1887년 고종 24년 9월 27일 14명의 신도가 언더우드의 집에 모여 에배를 드리고 교회를 세우니 바로 새문안교회이다. 새문안교회가 세워진 지 10일 후 로스목사가 밀입국했다. 이 기회에 언더우드는 로쓰 헐버트 등과 신도들을 자리에 모으고 장로 선거를 위한 토론회를 가졌다. 이들과 14명의 교인들은 여기서 서상륜과 백홍준을 장로로 추대한다.


각주1) 이갑성(1881.10.23~1981.3.25) 경북 대구에서 출생,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 사무원으로 근무, 서울소재 학교에 독립만세운동 확산,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해 참석, 1924년 세브란스 의약 지배인이 되고 1·926년부터 YMCA 이사로 활약 한국전쟁 중 전시내각 국무총리 역임.

각주2) 정재용(1886. 11. 6~1976. 12. 31) 1919년 3월 1일 파고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원래 거족적인 독립선언식은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손병희(孫秉熙)등의 민족대표와 학생・시민들이 모인 가운데서 파고다공원에서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太華館)으로 변경하여 예정된 시간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은 혼란에 빠졌다. 이때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 졸업생인 그가 용감하게 팔각정 단
도산 안창호를 전도한 송순명 장로
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에 큰 무리없이 수천의 학생・시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할 수 있는 도화선에 점화한 것이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각주3) 김원벽( 1894.6. 24~1928.4.9)은 3・1운동 때 중앙 지도자 9인 중의 1인으로 1919년 2월 22일 기독교측의 박희도와 이갑성 등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과 함께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받자, 쾌히 응낙하였다. 다시 손병희로부터 3월 1일 강기덕 등과 함께 군중을 지휘하였다. 3월 5일에도 서울역 광장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하다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신생활사・시대일보사 등에서 일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기도 하였다. 옥고 후유증으로 35세의 나이로 요절.

                      
언더우드 사랑채에서 시작한 새문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