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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2009.03.19 13:29

어진이 조회 수:1135 추천:45





I. 들어가는 말 - 나의 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스왈론 선교사와 김익두

조선말기에 유명한 깡패 청년이 있었다. 그가 한 번 장터에 나타나면 상인의 물건을 빼앗고 때리고 하기에 장사하는 사람들은 '오늘 제발 그 깡패가 이곳에 나타나지 말게 해주세요'라고 그들이 믿는 신에게 빌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박태환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이끌리어 스왈론 선교사의 집회에 참석하고, 거기서 ‘영생’이라는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다. 1901년 7월에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론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옛사람과 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변화되어 그후로 위대한 한국교회의 종이 되는데 그가 바로 한국의 베드로 김익두 목사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옴으로 새사람이 된 김익두는 신천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교회를 목회를 하는데, 교인 한 명 없는 곳에서 6개월만에 첫신자를 얻고, 이후 3년동안 300명으로 부흥케 된다. 28000번의 설교와 770여회의 부흥집회를 통해 그가 고친 병자만 12000명이고, 새신자 28만명에 이르는며, 그를 통해 세워진 교회가 150개, 배출된 목회자가 220명에 이른다. 1922년 5월 9일자 동아일보에서 <김익두의 이적>이란 기사를 쓸 정도였다. 당시 이런 사역에 대한 거센 비판이 일어나자 림택권 목사는 김익두 목사의 부흥현장에서 일어난 치유사건을 공증하기 위해 <이적증명회>란 것을 만들어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고 검토하여 ‘조선예수교회이적명증’(1921.7)이란 책을 남겼다.

 

김익두와 이성봉, 그리고 문준경

김익두는 1900년 소안론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이후 신천 교회에서 죽도록 목회를 하는데 주일학교 교사가 봉사할 것을 한 여인에게 부탁을 한다. 그 여인은 그 교회에서 충성하는데, 그 여인의 아이는 여섯 살 때부터 그 교회에 출석하여 자연스러벡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받게 되고, 장차 그 아이는 김익두 목사와 같은 부흥사가 되기를 소원한다. 이 아이는 성장하여 그 꿈을 이루게 되는데, 바로 ‘한국의 무디’이성봉 목사님이시다.

이성봉 목사가 1930년 어간에 목포에 내려와서 목포 북교동교회에서 시무할 때 한 여인이 섬에서 도망쳐 나와서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는다. 이후 이 여인은 생각을 달리 하여 도망쳤던 섬으로 다시 들어가는데 이 때부터 이 여인의 삶은 완전히 변한다. 섬 사람들의 종으로 자처하면 모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면서 복음을 증거한다. 이 여인은 결국 공산당의 손에 의해 신안 앞바다 한 섬 증동리 백사장에서 총살당하게 되는데 이 여인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사람이 이만신 목사, 김준곤 목사를 비롯하여 박성철 장로, 이봉성, 이만성 형제 목사, 정태기 목사등 내로라 하는 한국 교회의 거성들이다. 그 여인이 바로 성결교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님이다. 김준곤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는 문준경 전도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 삶과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바로 순교자 문준경전도사님이다.전도사님은 내가 국민학교시절 외롭게 사시던 어머니를 위해 나룻배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찾아오시곤 했다.한아름의 과자선물과 함께 나를 껴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문전도사님이 특유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희망가나 천당가를 부르면 동네 아낙들이 모두 모였고 이 때부터 일장 전도가 시작됐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몸이 약해 전도사님이 사역하던 섬에서 3개월간 지낸 적이 있다.교회와 사택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휴식처였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아기를 받고 병을 치료해 주고 사랑이 가득 담긴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일제시대에 장티푸스가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가족도 환자곁에 가지 않는 가운데 “나는 죽어도 홀몸이니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본 이야기는 유명하다.순교 1주년이 된 전도사님의 환갑날,장례추모식장에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김구선생 장례식 보다 추모인파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추모와 사랑과 존경을 전도사님의 영전에 드린다.“

이성봉 목사가 한강변에서 천막을 치고 부흥집회 할 때 이것을 방해하려고 찾아왔던 불량배 중의 두목격인 험악한 사람이 있었으나 이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와 기도로 그 집회 중에 회개의 눈물과 자백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신자가 된 이가 있었다. 그는 그 후로 부흥강사로 활약했는데 바로 한얼산 기도원의 원장 이천석 목사이다.

 

이성봉과 최자실, 여의도순복음교회

1915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12살 때 우연히 친구와 함께 천막 부흥성회를 하는 이 성봉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하여 옆집의 곰배팔이 아저씨가 안수기도 받고 낫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집회에 인도한다. 그 집회에서 두통으로 시달린 어머니가 고침받게 된 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된다. 그녀는 해방 후에 월남해서 서울에서 성냥공장, 비누공장, 샷틀 제조업 등 활발한 사업을 했으나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자 어머니와 장녀를 잃었고 남편에까지 소박을 맞고 사업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극약을 산 다음 삼각산으로 올라갔다. 개울가에서 약봉지를 꺼내 먹으려는 순간 돌개바람이 불어 약은 물 속으로 빠졌다. 이제 그녀는 동굴 속에서 굶어 죽으려고 6일을 버티다가 정말 죽겠다 싶어 산밑으로 내려가는데 30년 전 헤어졌던 친구를 마나 자초지종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성령 받으라고 충고를 해주면서 바로 산 너머에 열리는 부흥회로 인도했다.

그 날 밤 기적적으로 바로 30년 만에 다시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를 거기서 듣고 소, 돼지같이 살아온 지난날을 밤새도록 회개하자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하게 되었다. 이목사님과 상담하니 신학교에 가라는 조언을 듣고 1956년 9월 신학교에 들어가 거기서 한 학생을 만나 서로 열심히 전도한다. 하지만 1958년 신학교졸업과 함께 고아사업을 시작하려다가 또 한차례 매를 맞고 그제서야 비로소 복음전도의 외길로 들어선다. 학교에서 열심히 전도했던 한 학생과 자신의 자택 거실에서 5명이 가정예배형태로 출발하여 공동묘지 곁에다 천막을 치고 교회를 세운다. 이 교회는 그 후로 엄청난 부흥을 하게 되고, 그때 만난 학생이 자신의 사위가 되는데, 바로 이 여인은 최자실 목사요, 이 학생이 조용기 목사인 것이다.

감리교 감독 중에도 서울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를 통해서 은혜 받고 부흥목사의 소명을 받은 분들이 수없이 많다. 장로교회에서도 유명한 산정현 교회당에서 이성봉 목사가 부흥성회를 인도할 때이다. 모여드는 신자들은 너무 많고 집회의 열기는 절정에 도달했다. 교회당에는 앉거나 서있을 자리도 없이 창문을 열어 창 밖까지 신자들이 모였으나 더욱 많은 신자들이 모여왔다. 모든 신자들을 다 받아들이기 위해 산정현 교회당 강단 위편 벽을 모두 헐고 큰 천막을 쳐 놓고 청중들을 받아들인 적도 있다.

 

김익두와 장공 김재준 - 한신대

1919년 김익두의 부흥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체험한 이가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자유주의신학을 공부하고 거기서 미국으로 건너가 가장 보수적인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메이쳔에게 공부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한국적인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신학을 모색한다. 그가 길러낸 사람이 장준하, 강원룡, 문익환, 안병무 박사이다. 그는 장공 김재준이다.

20대 초반까지도 장공은 고향 함북의 경흥 인근 회령군청 말단 직원과 웅기금융조합 직원으로 일하던 시골 청년이었다. 유가적 가풍에서 아홉 살 때 〈논어〉와 〈맹자〉를 모두 암송할 만큼 한학 공부를 하긴 했지만, 조국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한 채 이미 혼인까지 해 평범한 삶을 살던 백면서생이었다. 그런 그를 깨워 새 삶을 살게 한 것은 동향 선배 송창근(목사)이었다. 훗날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는 그의 교육관은 바로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 상경해 중동중학교와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신지식을 습득하던 장공은 당대의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거듭남을 체험했다. 장공은 1924년 고향으로 내려가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일본행 배에 올랐다. 단돈 5원50전으로 떠난 무모한 유학이었다. 선배 송창근의 기숙사 방에 숨어 살며, 막노동으로 학비를 벌어야 했던 식민지국의 고학생은 추운 겨울에도 스팀 하나 없는 다다미방에서 헌 외투 하나로 버티며 공부했다.

그는 일본에서 3년, 이어 미국에서 4년간 주경야독의 고학생으로 지냈지만 본토 학생들도 놀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더 주목할 만한 일은 일본에서 대표적으로 진보적 학풍을 지닌 아오야마(청산학원)에서 배운 그가 미국에선 당시 보수 신학의 총본산인 프린스턴신학교에 진학해 근본주의 신학의 총사 그레셤 메이천 박사의 강의를 주로 택해 들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애초부터 한쪽은 배제하고 한쪽만을 학습한 것과 달리 진보와 보수를 망라해 신학을 골고루 접한 뒤 자신의 신학관을 정립한 셈이다.

귀국 뒤 그는 조만식 선생이 설립한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거쳐 김약연이 세운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후학을 길러냈다. 당시 학생이던 강원용은 “장공은 학교에서 한달에 70원의 봉급을 받았는데, 그 중 22원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고학하는 학생들의 뒤를 보살피는 데 썼고 자신은 다 떨어진 옷을 꿰매 입고 다녔다”고 회고하곤 했다.

 

김익두와 주기철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뜨거운 성령체험을 한 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가 있었다. 그는 22년 3월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남강 이승훈이 평양신학교를 방문해 이 청년을 만나서 동경 사범학교로 가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오산학교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이 청년은 끝내 이 청을 거절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목사가 되기로 결단한 것을 번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포삼열 교장, 배위량, 왕길지, 곽안련, 나부열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게 된다. 신학교 재학시절 양산읍 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그는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을 했다. 첫 부임지인 초량교회에서 그는 헌신적이고도 정열적으로 목회활동을 한다. 그가 바로 주기철 목사이다. 원래 주기철은 부산에서 춘원 이광수의 부산강연을 듣고 오산학교로 입학하여 이승훈과 조만식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1916년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병에 걸려서 낙향하여 일반 집사로 시무하다가 김익두의 부흥집회를 듣고 인생이 변화된 것이다. 초량교회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을 때 마산문창교회가 어려움에 처함을 듣고 그 교인들이 찾아와 사정할 때에 초량교회를 놔두고 문창교회로 달려가 교회를 안정시키고 부흥시킨다. 거기에서 있던중 산정현 교회 조만식 장로와 김동완 장로가 찾아와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순교지를 찾아 주목사는 미련없이 떠난다. 1938년에서 44까지 5번의 옥로를 치루고 마지막 자택에서 그는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면 순교자의 영광에 오르게 된다.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에 있을 때 시도한 유치원은 현재까지 삼일유치원으로 계속되고 있다.

지금 있는 교회와 믿는 성도의 신앙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소안론 선교사의 김익두를 포기치 않은 선교와 헌신으로 김익두 목사 한 분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 역사를 변화시켰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고, 그런 전통과 역사를 딛고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런 분들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을 사랑했던 이런 분들이 이뤄놓은 삶의 족적, 곧 역사 때문이다.

이 믿음의 역사는 한 작은 젊은이들의 헌신을 통해서 이뤄진다. 한국 교회의 역사의 근원을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열어보자! 첫 페이지는 토마스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