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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앙의 뿌리를 찾아서(2)

2009.03.21 11:12

어진이 조회 수:988 추천:63





1부 - 위대한 시작, 위대한 도전 (한국선교의 혼불)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가 제물포항에 내리면서라고 한다. 그러나 아펜젤러 목사 부부는 미국의 폴크 공사에 의해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고, 언더우드만이 당시의 광혜원에 의료보조로서 사역을 하게 된다.

1784년에 이승훈이 처음 천주교 영세를 받은 후 100년이 되가는 무렵 1863년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가톨릭은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된다. 이 박해를 피해 1866년 스코틀랜드의 선교사로 중국에 건너 온 알렉산더 윌리암슨의 집에, 3명의 조선청년이 찾아든다. 이때 윌리암슨과 같이 중국 선교에 나섰던 토마스는 이들이 윌리암슨의 집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차에 이들이 성경에 대해서 완전 무지함을 알게 된다.

토마스 목사는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났고, 에딘버러 뉴칼레지를 거쳐 1863년 6월 4일 스코틀랜드의 에버가네비에 있는 하노버교회에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런던 선교부 소속으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그의 부인과 그가 중국에 온 것이 1863년, 23세였다. 중국에 온지 불과 한 달도 못되어 그의 아내는 수척해져가므로 토마스는 한구란 곳에서 휴양처를 찾으러 갔는데 그만 아내는 남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고 만다. 토마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기도 중에 큰 은혜를 받고 순교를 하리라 순교를 하리라 각오하고 조선에 대한 선교를 준비하던 차에 이들을 만난 것이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묵주와 십자가, 성상같은 상징적이고 의식적인 방법으로만 전교를 하므로써 이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루 빨리 성서와 종교서적을 보급하고자 하는 소명감이 불타오르게 된다. 토마스를 만난 세 청년 중의 한 사람인 김자평은 그 시로 변화되어 탈출했던 조국으로 들어가려 하던 토마스의 길잡이로 스스로 자처해서 나서게 된다. 1865년 이들은 마침내 황해도 솔내 맞은 편 섬 백령도에 다다르게 된다. 2개월동안 한문성경을 나눠주며 전도를 마치고 또다시 뭍으로 가야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배를 타는데 그만 조난당하게 된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황해도 해안에 밀려들고 황해도 해안을 비밀리에 누비면서 전도한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성경책을 다 잃어버린 까닭에 그는 12월에 중국으로 돌아가야 되겠단 생각으로 배를 띄우는데 또 조난을 당하고 만다. 그런데 역시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토마슨 이번에는 중국 해안에 밀려들어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지푸로 돌아와 윌리암슨을 만나고 조선 선교에 대해서 자기의 계획을 말한다. 조선 선교에 대한 그의 열망에 기회는 빨리 찾아오는데, 프랑스 신부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토마스가 만난 프량스 신부는 리델이란 사람으로 역사상 유명한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에서 9명이 순교하고 3명이 가까스로 살아났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다. 1866년 7월 7일 중국으로 돌아와 프랑스 대리공사에게 상황을 말하고, 대리공사는 천진주둔 프랑스 함대사령관인 로즈 제독에게 말한다. 로즈제독은 당장이라도 함대를 움직여 복수하려 했으나 본국에서 만류하므로, 독단으로 당시 천진항에 있던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가기로 한다. 그리고 조선의 통역을 토마스 목사에게 부탁한다. 토마스와 로즈 제독은 같이 가기로 했는데,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인해 빠지게 되고, 토마스만 그 배에 타게 된다. 역사는 토마스를 중심으로 흐른다고 고백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 목사는 1866년 9월 3일 대동강변에 도착하는데, 조선관군과의 협상과정에서 선장 프레스톤은 두 번이나 조선의 협상자를 감금해버리고 허가받지 않고 정박해서 민가를 침탈하고 민간인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므로 인해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서 결국 24명 전원 대동강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물론 토마스 목사도 마찬가지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토마스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다. 그를 참수했던 박춘권을 비롯하여 당시의 많은 이들이 성경을 접하고 예수를 믿게 된다.

토마스 목사를 파송한 영국의 하노버 교회의 담임목사는 바로 아버지 토마스 였다. 그는 1884년까지 살았다고 기록되었는데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아들의 순교가 헛되지 않도록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 이후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이 조선 선교에 보다 심각하고 다양하게 고민하고 도전하게 된다. 코어베트는 1867년 순교를 결심하고 한국을 찾지만 역시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고 1주일만에 돌아가게 된다. 토마스의 동료 윌리암슨은 이 일이 있은 후 선교사들을 모아놓고 조선에 들어가 직접 전도하는 것은 현실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나는 만주로 가서 거기서부터 조선인들을 직접 접촉하여 전도하되, 지금까지 공짜로 나눠준 성경을 돈을 받고 파는 방법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 방법은 그의 생각대로 적중한다.

윌리엄슨이 만주로 갈 즈음, 토마스의 순교 소식으로 더욱 더 조선에 대한 선교 사명으로 불타오르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존 로스와 그의 매부 맥킨타이어 선교사다. 당시에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접한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많은 충격과 함께 선교의 열정을 일으켰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는 이 소식을 듣고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존.로스(John Ross중국명 :나약수(羅約翰)는 휴.로스(Hugh Ross)와 캐더린 서더런드(Catherine Sutherland)의 맏아들로서 1842년 8월 9일에 태어났다. 그의형제는 7명이 있었는데 이 중 캐더린은 1873 말에 만주에 있는 오빠 존에게 가서 그 후에 그의 동료인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결혼했다. 1872년 중국 선교를 시작한 그는 고려문에서 1875년 한약장수인 이응찬을 만나 통역및 조선어교사가 돼줄 것을 부탁하고 수락한다. 이응찬은 우장에 로스와 윌리엄슨이 세운 서양인 학교에서 조선어와 역사를 가르치고 또한 서양학문을 부지런히 배운다.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 가서 그동안 자기가 배운 수학, 물리학등 신학문을 소개하고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包攝)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성경 번역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이들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은 선교사, 세관관리, 병원장 등 그곳 외국인들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이응찬과 함께 로스의 성경 번역 사업을 지원했다. 4년 후 1879년에 네 사람 모두가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번역하여 1880년에 공관복음서, 1881년에 사도행전의 번역을 마친다. 하지만 인쇄할 수 있는 한글 활자가 없었다. 이 문제를 하나님은 푸시고자 한 사람을 준비시키셨는데 바로 한국 기독교 초기사에 엄청난 업적을 남긴 서상륜이다.

서상륜은 아버지부터 이곳 고려문에서 약재상을 한 부호인데 그만 아버지가 죽고 난 후 가세가 몰락해서 서상륜이 가계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오랜만에 친구 이응찬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응찬은 서상륜이 해박하고 경험이 풍부해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로스와 연결시키려 했지만 서상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였을까? 서상륜은 돌아가지 못한다. 그날로 병석에 눕게 되고, 병은 점점 깊어져서 장티푸스까지 겹쳐서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이 때 맥킨타이어가 도와서 서양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는데 한 달 동안 서상륜은 부모님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느낀다. 로스와 맥킨타이어의 간호로 병세는 호전되어 완치가 되고 이윽고 서상륜은 스스로 내가 예수를 믿고 자네들을 돕겠다고 나선다. 서상륜은 만주일대를 뒤져서 활자기술자를 구해서 친구들과 함께 기술을 전수받는다. 이윽고 로스는 1882년 인쇄소를 설치하고 그 해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출간되고, 1883년에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나오고, 1887년 드디어 신약성서가 완역된다. 이 성경을 들고 백홍준은 서간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결과 1884년 로쓰와 맥킨타이어는 75명의 조선인에게 세례를 베푼다.

또한 서상륜은 1884년 겨울, 서로 앞다투어 조선에 가겠다는 거룩한 싸움에서 이겨서 우장을 떠나 일주일만에 고려문에 도달한다. 하지만 고려문에서 실시하는 검문에서 적발되어 문초를 겪고 감금당한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에도 미리 도움의 손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옛날 집에서 부리던 하인 김효순과 김천련이 고려문 별정소 관노로 와있었고, 이들이 서상륜의 감금소식을 듣고 구출하러 온 것이다. 서상륜은 말을 타고 국경을 넘어 이 다음날 의주에 도달했다. 10년만에 돌아온 서상륜은 오자마자 우선 동생 서경조에게 전도를 하고 결국 결신을 한다. 서경조는 1866년 9월 3일 토마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어린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의주에서 서상륜은 순식간에 수십 명의 신자를 낳고, 자기의 집에서 성경을 읽고 강해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발각이 되어 당숙이 사시는 황해도 솔내로 피신하게 된다. 하지만 당숙의 만류와 협박과 거절로 집을 나와 산 속에 초가집을 세우고 거기서 서경조와 함께 전도를 하게 된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솔내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후 청국의 소개로 고문자격으로 와있던 묄렌도르프와 로쓰의 협력으로 성서 6천권을 제물포를 통해 들여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돌며 전도하기에 이른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서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이 완간(完刊)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앞선 일이었다. 존 로스는 첫째 아내과 첫째 아들을 잃으면서도 중국 선교와 한국선교에 힘을 다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성서의 지명 및 인명은 거의 그가 번역한 것을 따라서 쓰고 있다. 이미 개신교가 전래되기 전에 이미 성경은 황해도까지 파고들었고, 예배는 드려지고 인도자는 세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