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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앙의 뿌리를 찾아서(3)

2009.03.26 00:43

어진이 조회 수:948 추천:62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는 이수정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민영익(閔泳翊)의 서생(書生)으로 1881년에창설된 신식 군대의 고급장교였다. 임오군란 후 1882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일행 사절에 동행한 민영익의 개인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망명한 사람이다. 쯔다센[津田仙]를 만나면서 그의 거실에 걸려있던 산상보훈에 감동받고 예수에 대해 듣게 되고, 쯔다를 통해 일본인 야스가와 목사의 지도를 받게 되고, 일본에 주재 중이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G.W. Knox)와 감리회 선교사 맥클레이(R.S.Maclay)를 만나게 된다. 그는 민영익 일행이 귀국한 뒤 도쿄[東京]에 남아 도쿄 외국어학교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 츠다센 박사를 만난 이수정은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고, 신약성경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수정은 그 성경을 읽던 중 하루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에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다른 사람은 작았다. 이수정을 찾아온 그들은 자신들이 걸머지고 온 보따리를 벗어 주었다. 그가 “이것이 무엇이냐”하고 묻자, 그들은 ‘책’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그가 “이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 책들은 당신 나라의 모든 책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책들이다”라고 그들이 답하였다. 이에 그가 “그것이 무슨 책인데 그러느냐?”고 묻자, 그들은 “성경책이다”라고 했다.

꿈에서 깨어난 이수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책, 성경책.” 꿈에서 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과 또 그 보따리 속에 가득 들어 있던 책들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꿈이 마치 하나의 신비적인 계시처럼 여겨졌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자원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어 1883년 4월 29일 부활절에는 야스가와(安川亭) 목사와 조지 낙스(George W. Knox) 선교사의 입회 하에 로겟츠죠교회(露月町敎會)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는 일본에서 거행된 조선인 최초의 세례였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지 7개월 만이며, 그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1883년에 녹스 목사의 친구며, 일본 성서 공회 총무이던 헨리 루미스 목사의 간청으로 〈현토한한신약성서 懸吐韓漢新約聖書〉를 번역해 1884년 간행했고, 이어 〈한역성경 漢譯聖經〉을 가지고 〈마르코의 복음서〉를 번역해 1885년초에 간행했다. 이수정은 1885년 장로교에서 언더우드 목사, 감리교에서 아펜젤러 목사를 조선에 파견하자, 언더우드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으며 언더우드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르코의 복음서〉를 얻어 가지고 한국에 부임했다. 언더우드는 이것을 1894년에 수정, 출판하였다.

이수정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 장로교 녹스 목사와 감리교 매클레이 목사에게 미국 선교사 파견을 부탁했으며 (각주1) , 1884년 3월 미국선교사에게 대필시켜 미국 선교잡지에 〈한국의 사정〉이라는 호소문을 게재하고 그해 12월에는 자기 이름으로 세계선교평론지에 한국전도의 중대성과 긴박성을 강조했다. 중국에 있는 미 장로회 선교사 리드(Gilbert Reid)를 비롯하여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도 이런 청원서를 보낸다. 녹스 목사등도 냉담한 반응에 실망지 않고 계속해서 자세한 보고서를 보낸다. 결국 일본과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 그리고 이수정까지 이처럼 끈질긴 청원을 하고, 미 장로회 외국선교부 이사인 맥 윌리암스가 한국 선교를 위한 헌금을 할 정도까지 되자, 미국 선교부는 결국 한국 선교를 시작하기로 결정한다. 1884년 봄 젊은 의사 헤론을 한국 선교사로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우선 조선 말부터 배우고 때를 기다리라는 명령과 함께. 우리가 알기로 맨 처음 온 이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제1호 선교사는 헤론이다. 하지만 헤론은 일본에서 체류하다가 예정보다 늦은 1885년 6월에야 한국에 도착한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온 것이 1885년 4월5일이다. 그 이전에 이미 조선에는 1882년 존 로스 역의 성경이 수천권 이상 보급이 되었고, 이수정의 마가복음이 일본에서 번역이 되었다.(각주2)  세계 교회사상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하기 전에 그 나라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고, 이미 교회가 세워져서 세례받은 자도 있고, 세례받을 사람도 준비된 경우는 우리나라가 유일할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나라를 사랑하셨는가? 고백지 않을 수 없다. 이 때가 어느 때인가? 서슬퍼런 대원군의 쇄국정책, 그로인한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외국의 강제적인 문호개방요구에 따른 감정적인 대립, 그리고 유교5백년, 불교2천년, 샤마니즘 5천년의 굴레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은 이 땅의 복음화의 서막을 여셨다. 마치 전무후무한 영토와 권세를 누렸던 로마시대의 최고의 절정, 옥타비아누스 시대에 아기예수가 태어나신 것처럼 말이다.

각주1) 존 녹스 목사가 쓴 편지는 다음과 같다.“한미수호조약에 따라 지금 서울에는 영어학교가 세워졌는데 학생이 칠십 명이여, 이들 칠십 명 학생들은 중국인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선에 미션 스쿨을 세우면 큰 성과를 거둘 게 분명합니다. 이 조선을 위해 일하실 분은 없습니까?.... 두 목사와 한 사람의 의사만 있으면 넉넉합니다. ...늦어도 내년 4월 아에는 선교사들을 보내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인원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조선의 문은 넓게 열려지고 있습니다.이 새로운 선교지에 우리 교회가 단 세 사람의 선교사를 보낼 수 없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교회가 못하면 다른 교회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한국 기독교100년 pp.142~143.


각주2)  최현배의 주장에 의하면 1886년까지 15,000권을 전했다고 한다. 이후 1936년까지 전파된 성서는 18,079,466권이었다. 1883년부터 1960년까지 3천만권에 달하게 된다. (최현배, 기독교와 한글, 신학논단 제7집, 연세대신과대학 신학회, 1962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