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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앙의 뿌리를 찾아서(5)

2009.04.07 08:13

어진이 조회 수:3686 추천:37

광혜원, 제중원, 세브란스 병원,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이 되기까지

세브란스 병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알렌의 입국과 갑신정변, 그리고 광혜원의 설립까지의 모든 진행은 만약 소설이었으면 유치찬란 했을 법한 내용이나, 실제 역사 속에서 이렇게 이뤄지는 것을 보고 그 누구도 한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와 인도라고 고백치 않을 수 없다.

광혜원은 하나님이 세우신 한국 선교를 위해 세우신 베이스 캠프요, 선교의 핵이다. 광혜원은 1885년 2월 29일(양력으로 4월 10일)에 세우지고 13일이 지난 3월 12일(양력으로 1885년 4월 23일)에 ‘제중원’으로 바뀐다. 그리고 제중원은 국립왕실병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제중원의 개원과 함께 엄청난 환자가 몰려들었다. 이에 알렌은 헌신적으로 일했으나 혼자힘으론 부족했다. 그런 때에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한 언더우드가 제약일을 돕고,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며, 같은 해 5월 3일에 입국한 스크랜턴 선교사가 5월 29일부터 일을 돕기 시작하고, 그리고 6월 21일에는 지난 번에 돌아갔던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의사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자녀들과 존 헤론 의사까지 들어와서 제중원의 의료진영이 틀을 잡게 된다.

헤론과 양화진 선교사 묘지

알렌이 제중원과 함께 궁중어의까지 하느라 너무 바쁜 터에 스크랜턴 마저도 시각의 차이로 알렌을 떠
존 헤론 선교사
나게 된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존 헤론이다. 존 헤론은 미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공식적인 제1호 선교사이다. 헤론(1858.6.15~1890.6.20)은 원래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14세 때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그는 1883년 테네시 의과대학 수석졸업에 학교 교수직까지 제안받은 상태였지만 그는 보류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땅끝이 어딘지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부에 선교사 신청을 한다. 선교부는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보류하지만 헤론은 “의약품과 의료기를 준비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겠습니다.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친구들과 약혼녀인 해티까지도 ”코리아가 어떤 나라예요? 당신의 앞길은 열려있습니다. 그 놀라운 실력을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라면서 만류했지만 결국 헤론은 1884년 4월에 미북장로교 제1호 조선선교사로 파송받는다. 하지만 당시 정세가 불안하므로 1885년 6월까지 일본에서 선교지 언어및 지식 훈련만 주로 쌓게 되면서 언더우드, 아펜젤러보다 더 늦게 들어오게 된다.

존 헤론은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사랑한 진정한 의사로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돌보면서 왕실의 신망을 쌓는다.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정3품 당상관의 벼슬을 받고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렸다. 알렌이 1887년 미국으로 주워싱턴 한국공사 고문으로 돌아가므로 제중원 2대 원장겸 황제의 시의가 된다. 하지만 헤론의 나이 32세,1890년에 그만 자신이 전염병에 걸린 줄 알면서도 남한산성과 서울을 오가면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증세가 악화되어 그해 6월 20일(양력 7월 26일) 그만 소천을 받고 만다.

당시 4대문 안에 무덤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다가 상여를 매고 나가는 것 또한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 마땅한 장지가 없어서 왕실과 선교사들 간에 난처한 상황이 계속되다가 다행히 고종황제가 현재의 양화진 묘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병풍
자리를 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므로써 양화진 선교사 묘지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양화진에는 헤론의사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5000기가 넘는 묘가 있어 한국선교의 밀알이자 증인으로 남아있다. 그의 업적은 우리 나라에서 병원사업과 성서번역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6월 25일 창설한 조선기독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 전신)의 창설 멤버였다.

미국의 최고의 수재 의사, 장래가 보장된 27세의 청년, 존 헤론! 하나님은 그의 꿈, 그의 능력을 조선땅에 심으셨고, 100년이 지난
지금 그 밀알에서 한국교회라는 엄청난 나무가 자라나고 있다. 하루 60리 길도 마다않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조선백성과 함께 똑같은 전염병으로 생을 넘어서서 죽음까지도 같이 한 이 선교사는 길이길이 남으리라 지금도 그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병풍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에비슨과 세브란스

헤론이 순교한 후에 제중원에 관련된 일을 알렌과 하디, 그리고 빈튼이 이어서 조금씩 맡게되나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해 병원재정이 제대로 지불되지 못하는 처지가 계속된다. 하여 미 북장로회 선교부는 토론토의대의 젊은 교수인 에비슨을 1893년
에비슨 의사
7월 16일자로 한국에 파송한다. 이 에비슨이 어떻게 움직였을까? 바로 언더우드 때문이다. 언더우드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조선에 의사를 보내달라고 호소하고 이 호소를 들은 에비슨은 자기가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1893년 모든 걸 포기하고 세 명의 아이와 넷째를 임신한 부인과 함께 조선에 오게 된다.

에비슨이 왔을 때에 병원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황실로부터 예산지원은 고사하고 에비슨이 지방으로 왕진을 갔다 와보니 수술실로 만들려고 준비해뒀던 방을 조선관리가 일본인 의사에게 돈을 받고 세를 주는 일까지 벌어진 경우도 있었다. 에비슨은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고, 만약 병원의 운영권을 정부에서 미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하지 않으면 더 이상 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한다. 처음에는 운영권 이양에 대해서 정부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6개월 후에 에비슨의 뜻대로 이관하게 된다. 이때부터 에비슨은 병원을 혁신하는데, 선교부에 병원건물개조비, 운영비를 요청하고, 함께 일할 간호사 2명을 요청한다. 이에 따라 여의사 파이팅과 제이콥슨이 오게 되고, 병원은 면모를 조금씩 갖춰간다. 1895년에 콜레라가 유행해서 서울인구 22만중에 5천명이 사망할 사태에 이르렀지만 에비슨과 간호사가 주축이 되어 선교사들과 함께 계몽하고 치료하는 동안 6주만에 콜레라가 물러가고, 100퍼센트 사망률이 65퍼센트의 완치율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1899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제중원을 현대식병원으로 탈바꿈 하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고 미국으로 간다. 그는 먼저 토론토에 사는 친구 고든을 만나서 자기가 구상하는 병원의 설계를 부탁한다. 40명의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병원을 원한다고 하자 건축에 1만 달러 정도의 예산이 필요할 것이라 말하면서 자기가 설계를 무료로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얼마 후 에비슨이 조선으로 떠나기 전 치료했던 여성이 오더니 5달러를 기부한다. 병원 건립에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뉴욕 카네기 홀 대강당에서 개최된 “만국선교대회”에서 5천명의 청중을 향해 에비슨은 ‘의료선교’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조선에 대한 안내와 병원설립에 대한 계획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 자리에 있던 록펠러의 동업자인 세브란스가 에비슨의 강연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며칠 후 세브란스는 1만 달러를 미선교부에 기증했다. 얼마후 선교부 총회가 열렸고, 세브란스는 이사 자격으로 거기에 참석했다. “저희 부부는 일 년 동안 어딘가에 병원을 세우고 싶어서 기도했습니다. 마침 에비슨 씨의 연설을 듣고
세브란스 병원(1904)
서울에 병원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기부를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큽니다.”세브란스는 연거푸 고마움을 표하는 에비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 정부와 또 선교사 그룹들과 여러 가지 마찰이 있었고, 1904년 러일전쟁이 터져서 자재값이 폭등하는 어려움을 이기고 1904년 결국 병원이 완성되었다. 이 병원은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불렀다. 세브란스는 처음 만 달러 외에도 자재값 폭등으로 인한 추가비용도 부담하고, 완공을 확인한 후 다시 3만 달러를 기부한다. 1907년 자신의 주치의와 함께 서울을 방문한 그는 자신의 주치의를 세브란스 병원 외과교수로 남겨두고 홀로 귀국하기까지 한다. 당시의 세브란스 병원은 돈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진료를 받으러 오면 기꺼이 무료로 진료했다. 공짜로 진료받은 사람중에 감사의 표시로 닭을 갖고 오는 사람이 많아 병원의 방 하나를 닭과 함께 답례품인 쌀, 콩, 조를 모아놓는 곳으로 사용했다.

에비슨은 1916부터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을 동시에 맡았던 에비슨은 1930년 70번째 생일을 한국에서 맞이하고 1932년 일본의 추방정책에 의해 1935년 병원을 한국인에게 맡기고 떠난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조선인을 수련시켜 이 사업을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최종목표였습니다.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고 저는 떠납니다.”

1957년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은 하나로 합치게 되고, 그 이름을 연세대라고 하며, 연세대 의과대학 병원이라고 하게 된다.
지난 2000부터 2005동안에 지어진 연대 세브란스 병원의 건축을 마치고 회계처리를 하던 담당자는 실로 난감한 상황에 직면한다. 그것은 그동안 세브란스 후원계좌에 매년 거액의 달러가 ‘미북장로교’란 이름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시에 건축비가 1500억이 필요한 상황인데 어디서 이런 돈이 꾸준히 들어오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계좌를 추적한 결과 1955년 7천
세브란스
달러를 시작으로 액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2천년까지 보내온 금액이 45년동안 80만 달러였다. 투명한 회계처리를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미북장로교 측과 연락하여 조사한 끝에 세브란스병원이 밝혀낸 후원금의 출처는 “J.L.세브란스 펀드”였다.

1904년까지 4만 5천 달러, 현재의 가치로 1천억원의 거금을 기부한 루이스 세브란스가 아닌 존 세브란스는 누군가? 존 세브란스는 루이스 세브란스의 아들이었다. 루이스 세브란스는 임종 직전 자신의 아들에게 세브란스 병원을 계속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존 세브란스는 아버지의 뜻대로 자신이 죽기 전 1934년까지 20년 동안 12만 4천 5백 달러를 기부했다. 그리고 그도 임종시에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자신이 남긴 유산으로 J. L. 세브란스 펀드를 만들어 세브란스 병원에 기부하라고 유언을 남겼고, 미북장로선교회는 존 세브란스의 유지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물질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제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돈입니다. 받는 당신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큽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 말은 평소 세브란스가 가졌던 삶의 자세였고 정신이었던 것이다. 세브란스 정신은 아들과 손자까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과연 세브란스가 기부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요, 선행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지어진 곳이 세브란스 병원이므로 그곳에서도 마음을 치료하고 정신을 치료하고 삶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브란스에 출입하는 자 세브란스를 잊지 말라!
세브란스에서 고침받은 자 하나님과 이웃을 잊지 말라!
한국의 세브란스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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