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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니오(no)’를 ‘예(yes)’하는 것에 대하여

2008.07.02 06:03

김성찬 조회 수:37245 추천:103

영혼일기 8 : ‘아니오(no)’를 ‘예(yes)’하는 것에 대하여

2008.7.2


청년시절 난, 내 책상 머리맡에 붉은 색연필로 ‘Temperance is the best policy.’ 라는 구호를 대문짝만한 하게 써 붙여놓고 지냈었다. 온갖 유혹이 난무하던 그 청년 시절, 내 생활에 있어 절제 이상 가는, 나를 나 되게 하는 효과적인 정책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타는 그 청춘에 있어, 유혹은 신의 간섭보다 그 빈도수가 월등히 더 많았었다. ‘아니오(No)'라고 떨쳐 버려야 할 유혹이 ’예(Yes)'라고 답해야 할 기껍지 않은 사인(sign)보다 그 빈도수가 훨씬 더 많았었다는 말이다.


하여, 내 절제(temperance)는 ‘아니오(No)’라는 언어의 구사 여부에 그 일차적 성패가 놓여 있곤 했다. 난, 그 ‘아니오’에 매우 충실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왜냐하면, 그 ‘아니오’ 라고 유혹을 뿌리쳐대던 자발적인 훈련이 내 젊은 날에 없었더라면, 난 감히 그 부르심에 ‘예’라 응답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분 안에서 준비된 ‘예’를 위해 숱한 ‘아니오’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아니오’가 없는 ‘예’란 있을 수가 없다. 그 분 앞에서 예스맨(yes-man)은 세상의 유혹 앞에서 먼저, 노맨(no-man)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아니오’를 못해서 그분 앞에 ‘아니오’가 된 노맨(no-man)들이 우리 안에는 너무도 많다.


나는 경건 훈련에 있어 그 첫 단계가 책임 있는 자기 돌봄이라고 생각한다. 책임 있는 자기 돌봄이란, 밀려오는 세파의 갖은 유혹에 대해 ‘아니오(no)'라고 말하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아니오‘로 시작하는 자기 돌봄이 완성된 후에야 자기 양육의 과정이 순조로울 수 있고, 그 후에 건강한 영적 자아를 개발하고 신장하는 자기 사랑이 훈련의 완성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 자기 절제의 언어는 ‘예’가 아니라 ‘아니오’에 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저고리를 벗어 던지며 소리치며 달아났던 요셉의 언어가 ‘아니오’이었을 것이다. 바벨론 유수 기간에 느부갓네살이 하사한 그 왕의 진미와 포도주의 강요된 유혹 앞에 선 네 소년들, 다니엘과 그 세 친구의 언어 또한 ‘아니오’이었을 것이다.  


간교한 뱀의 유혹 앞에서 ‘아니오’ 대신 ‘예’ 했던 이브는, 결국 그 유혹 앞에 무너져 내렸다. 아담 또한 그 ‘아니오’를 ‘아니오’라 말하지 못한 미적거림으로 죄의 유혹에 함께 걸려 넘어지고만 것이다.

 

종교개혁시대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인문주의자들의 슬로건이 ‘Ad Fontes' 이었다. 이는, 원래의 글자로 되돌아가자 라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언어는 인류가 그 최초로 발설했어야만 했던 언어, 단호한 '아니오(No)'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언어적 원형이 바로 '아니오(no)를 예(yes)'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난 새삼스레 깨닫는다. 세상의 유혹 앞에서만 먼저 ‘아니오’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부르심 앞에서도 ‘아니오’가 선행됐어야만 했다는 것을. 그 청년 시절 난 준비된 줄 알았었다. 난, 준비된 목사 후보생이라 스스로 자부했었다. 술, 담배, 여자, 돈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했었기에, 난 그분의 부르심에 당연히 ‘예’라 말할 자격이 있는 자로 스스로를 여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부르심 앞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며 ‘아니오’ 하지 않았던가?  입술이 부정한, 그러니까 이사야 그가 온갖 유혹과 잡생각 앞에서 ‘예, 예’하던 ‘예스 맨’이었다는 고백이 아니던가? 그런 유혹 앞에 ‘예스 맨’ 노릇하던 자신이 어떻게 감히 그 여호와의 영광 앞에서, 그 엄중한 부르심에 감히 ‘예’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망하게 되었노라 탄식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는 그 부르심의 부름에 보무도 당당히 거드름을 피우며 잰 척하지 않았었던가? 예레미야 선지자 또한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1:6)"라고 그 슬픈 부르심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거슬러 올라가 위대한 해방자 모세 역시, 그 부르심에 두려워 떨며 “내가 누구관대,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출3:11;4:13)”라고 ‘아니오’라며 부르신 자 여호와를 시비하지 않았던가? 오, 놀라운 그 예민한 영성의 대가들의 두렵고 떨린 영감이여.


근데, 난 지금 뒷감당 안 되는 ‘예’를 해놓고 이제야 ‘아닌’ 그 무엇, 비본질적인 것의 노예가 되어 있다. 포도원에 일 나가겠다고 ‘예, 예’하고 두꺼비 파리 채 먹듯 넙죽거리며 문 나섰다가 ‘예, 아니오’가 되어 버린 맏아들(마21:29)이 된 형국이다.  전혀 감당 못할, 체질에도 맞지 않은 온갖 요구들을 상호 검증 없이 받아들여 ‘예 아니오’가 되어 버린, 난 시방 근 무력증에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새날이 시작되면 난 또 그 절제를 까맣게 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감당 못할 ‘예’를 외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내가 자발적으로 얽혀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 감당 못할 ‘예’에 인박힌 난 알코올릭 환자이기 때문이다. 통제 불능 수전증에 시달리면서도 난 그 술잔을 높이 치켜들 것이다.

 

그 때까지, 그 날까지.

내 수족이 잘리는 구속의 은혜를 힘입을 그 깊은 때까지.

그 무덤에 내안의 유혹을 매장할 그 날까지.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