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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 A good reputation and respect

2010.04.06 23:40

김성찬 조회 수:3425 추천:31

영혼일기 548: A good reputation and respect
2010.04.06(화)

오늘 성지연수 설명회로 모였다. 성진교회에서 모였다. 그 좌석 세팅이 깔끔했다. T/C 강정희 선생을 포함 60명의 우리 지방회 회원들이 출격하게 됐다. 감사한 일이다. 두 대의 차량에 각각 30명씩 나눠 탈 수 있다. 정말 쾌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낯선 곳이란, 당연히 낯 설은 곳이지만 또한 물 설은 곳이다. 물. 그래 물이 문제다. 오늘도 물 조심에 대한 이야기가 주의 사항의 핵심이었다. 물 갈아 먹는 여정이 탈 없길 우린 바랬다. 베링 해와 연천을 오가는 연어처럼, 우리도 짠물도, 단물도 소화해 할 수 있는 아가미가 돋아 오르길 소망했다.

근데 아프지 않았다. 신앙공동체에서, 갈 사람만 가는 수익자 부담, 그 상리적(商利的) 행사를 주관을 하면서도 나는 맘이 돌처럼 굳어 있다. 니들이 그러면 나도 그럴 거다. 나까지 황폐해 진거다. 그래서 몸도 편하고, 맘도 편했다. 밥 열 술이 밥 한 그릇이 된다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의 부조의 미덕이 우리 공동체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스스로 서푼도 안 되는 물질 때문에 우린 상호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
안도현은 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질을 선용하는 것은, 어른다운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는 표지다. 입으로만, 말로만 어른 되는 어른은 없다. 그런데 나까지 이번 성지연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런 우호적인 자존감을 거의 표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분(情分)날 일 없이 차분해 뵈나, 속은 냉골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 크나 존재감 없는 이들의 투기를 뒤집으신 하나님의 조삼모사(朝三暮四)로, 내년 회기부터 5교회 목회자들을 매년 성지연수를 보내기로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난 아프다. 내가 그런 물질적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라서 더 아프다. 어렵다 어른 노릇한다는 것이. 그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주어야 하는데, 난 그 여력이 없다.

성지연수 설명회를 마치고 소위원회로 모였다. 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던 중, 어제 있었던 목사안수식의 테러(?)에 대한 임원들의 탄식과 성토가 터져 나왔다.

나이는 먹는 다는 것은 생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늙어 그 생을 잃을지라도, 적어도 우린 명예만은 잃지 않아야한다. 허나 우린 나이 들어가며 그 명예조차 잃는다. 어른 노릇 못해서 그렇고, 어른 대접 안 해서 그렇다. 그 악명 높은 이를 어른 대접한다고 그 성스러운 목사 안수식 순서를 넣어드렸단다. 그런데 그만 그분은 어른 노릇을 못한 모양이다. 그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언사만으로도 부족할, 영적 전사들의 숭엄한 임직식에서 하찮은, 터무니없는 악의적 속풀이로 그 행사를 망쳐버린 그 어른은, 과연 어른인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언22:1).

그는 물질로 사람을 살줄도 몰랐고, 어른 대접 받는 명예도 물거품 만들어 버린 행패를 부렸다. 그렇잖아도 지금 우리네는 원로 대접 때문에 갈등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데, 그는 스스로 그 불화더미에 기름을 부어버렸단다. 예년과 달리 금년에는 최선 다해 원로들을 대접하겠노라고 공언하던 신임회장은 그 일격에 녹다운 되어버린 모양이다. 지난 회기에도 어른 노릇 톡톡히 하고 싶었을 터인데, 내가 워낙 센 사람이라 함부로 못하다가, 맘씨 좋은 신임 회장님에게 그 분풀이를 다해 버린 것 같아, 내가 다소 미안하다. 그래 나도 그 사태의 공범이다.

내 주변에도 어른 대접할 줄 모르는 망나니들이 좀 있다. 선배들의 존재감이 빈약한 탓도 있지만, 너도 목사고, 나도 목산데 이런 등가적 시선으로 우린 선후배를 대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시대의 영향일 수 있다. 갈수록 세상을 거칠어지고, 피차 존경심과 배려를 잃어가는 세태다. “가난한 의인을 골탕 먹인들 어떻겠느냐? 과부라고 특별히 동정할 것 없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 해서 존경할 것도 없다(공동번역 지혜 2:10).” 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다. 내 문제다.

잠언 22장 1절에서 재물보다 명예를, 은∙금보다 은총을 택하라신다. 아니 물질보다 명예를, 명예보다 은총을 구하라신다. “A good reputation and respect are worth much more than silver and gold.(Proverbs 22:1)."

무슨 말일까? 명예와 은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위 영어성경 CEV에는 은총을 존경(respect)으로 번역해 놓고 있다. 명예(名譽)는 사전적 의미로,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다. 그리고 존경(尊敬)은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이다. 명예는 정적이고, 존경은 동적이다. 명예는 돈과 권력으로 살 수 있어도, 존경은 그 무엇으로도 억지로 이끌어 낼 수 없다. 겉포장으로서의 명예를 지닌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 명예가 존경으로 화(化)해야 참된 명예가 되는 것이다.

총회장을 지냈건, 부총회장을 지냈건, 그 무슨 장(長) 자리에 앉아 있었건 간에, 그 형식적 명예직이 만인의 존경심을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이름도 빛도 없는 이들이 외려 우리의 존경의 대상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증경, 전직, 이런 직함이 없는 원로 가운데 그 강단에 서야 마땅하신 분들이 우리 공동체에도 몇 분은 계시지 않는가? 그분들이 가진 은∙금이 아니라. 그런 물질에 정비례하지 않는 존경심을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유발시키는 분이 우리 가운데도 계신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후배들이 나를 어른 대접해 줬으면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고민은, 내가 알량한 명예라도 득하고, 더 나아가 그 누군가의 존경을 이끌어 낼 여명을 살아낼 수 있었으면 한다. 밥 한 끼라도, 흔쾌히 살 수 있는 호주머니였으면 좋겠고, 말 한마디에도 인격이 드러나는 어른이도 싶다. 언행이 일치되는 선비이고 싶다. 가슴을 열어 장삼이사 그 뿌리 없는 이들의 한 힘이 되고 싶다. 비빌 언덕이 되고 싶다. 후배들의 성지연수에도 근력 되는 노익장이고 싶다. 말씀 없는 말씀이고 싶다.

가난한 의인을 골탕 먹인들 어떻겠느냐? 과부라고 특별히 동정할 것 없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 해서 존경할 것도 없다(공동번역 지혜 2:10).

그러나 이런 세상, 이런 세태에서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