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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 이기심을 주소서!

2014.08.15 23:19

김성찬 조회 수:4788 추천:21

영혼일기 1535 : 이기심을 주소서!

2014.08.15(금)

 

또 기도원엘 갔다.

 

단풍나무에 거름 준들 무슨 효험이 있을꼬?

하여,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젠, 하늘 당신과 씨름할 의욕도 없고, 게다가 고질병 된, 좌골점액낭염으로 맨바닥에 앉는다는 것이 내겐 곧 쥐약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갔다.

사람 무서워서. 날 기다리는 이들과 또 나와 동행하기를 원하는 이들 때문에, 갔다. 의무감 때문이다. 내 헐거운 온정주의나 이타심 때문이 아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의무감 때문이다. 의무감은 무섭다. 의무감은 전혀 이타적이지 않다. 의무감은 철저히 이기심에서 우러른다. 의무를 준행하지 않아 받는 불안과 고통이 의무를 행함으로 겪는 고역보다 더 무겁기 때문이다. 의무를 철저히 준행하는 이들은 그래서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기도원으로 가던 길에 우리 중 매사 모범생인 이광옥 사모님이 그랬다. 우리 큰애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혼잣말처럼 엄마에게 이렇게 내뱉더란다.

 

“엄마, 왜 애들이 숙제를 안 해 와 혼나지? 먼저 숙제를 해 놓고 놀면 되는데….”

 

그렇게 숙제를 먼저 해 놓고 논, 그 아이는 분명 이기적인 아이다. 숙제라는 의무를 행하지 않아 겪게 될 곤욕스러울 사태보다 먼저 숙제를 하는 노역이 훨 수월하다는 사실을 그 아인 알아차린 거다. 의무감이란 이렇듯 이기심의 발로다. 그래서 철저히 이기적일수록 의무를 보다 더 완벽하게 수행한다.

 

사명감도 마찬가지다.

 

사명에 대한 헌신, 그 헌신의 정도가 깊은 사명자일수록 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이다.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늘 불안과 자탄에 빠져있는 이들을 생각해 보라.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탓에 진액이 마른 이들은, 자기를 스스로 학대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타적일 수도 없다. 몸 고달파도 맘 편한 쪽을 택한 이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골고다 십자가로 향하신 예수의 자원한 고난을 우리는 숭상한다.

그 고난은 무엇일까?

회피할수록 더 힘든, 사명의 십자가를 짐으로, 행복했던 사내

예수

그분은 철저히 이기적인 분이다.

 

고난보다 더한 불안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그런 말이다.

 

“용서하지 못한 불편함에 시달리느니, 그냥 나를 위해 용서해 버려, 죄다. 나는,”


처제 윤은경 권사의 만사 털고 사는 비결이란다. 그녀는 그렇게 산뜻하게 산단다. 그녀는 영리하다. 자기편에서 먼저 탈탈 털어 버림으로, 그녀는 그 누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 못한 불편한 맘에서 스스로 벗어난다는 거다. 불편한 맘은 신앙적인 용어로 죄의식에 눌린 맘이랄 수 있다. 죄의식에 눌려 살지 않으려고,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버린 사람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우리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을 성자라고 부른다. 성자는 자신을 죄의식에 매이지 않도록, 먼저 자신을 비워버리는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기적인 자신 비움,

 

선선히.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을 위해, 털어버리는 용기.

그런데 나는 여전히 이기적이지 못하다.

 

오늘 산상성회 강사인 주성민 목사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청소년 시절, 그는 목사 아내인 어머니를 백혈병으로, 아버지 목사는 암으로 잃었단다. 하여, 그는 서울 왕십리로 올라 와, 신문팔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단다. 그런 곤경 속에서도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힘썼고, 재수, 삼수를 넘어, 무려 십 수 끝에 신학대학에 들어갔더란다. 그의 처참했던 청(소)년기의 모진 시련을 간증으로 듣게 된 목회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모진 역경을 겪으면서, 어떻게 그가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목사가 되겠다는 꿈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목사 아버지와 사모 어머니를 그 무서운 병으로 그 젊은 날에 데려가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그랬다. 그는 기적같이 원망과 시비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가 만일 그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았다면, 그는 오늘의 영광과 보람을 누릴 수 없었을 거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도 남은 환경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으로 그는 그 은혜를 온전히 제 것 삼았다. 그랬다. 그는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는 말씀을 그 어린 청소년 시기에 깨달아 알았을까? 놀랍다. 이기심의 극치를 어린 주성민에게서 본다. 하여,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힘들어도 그는 기도를 했다. 그리고 현실(사실)의 말이 아닌, 믿음의 말만 하나님께 쏟아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 에게 행하리라(신 14:28).”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은 손에 긴 막대기를 들고 다닌다. 막대기의 한쪽 끝에는 날카로운 금속 송곳이나 바늘이 달려 있고, 다른 편에는 보습을 청소할 때 사용하는 납작한 쇳조각이 달려 있다. 젊은 수소는 일을 하기 싫으면 걷어차는 버릇이 있다. 특별히 아직 길이 들지 않은 수소는 더욱 그렇다. 농부는 수소가 발길질을 하면 막대가 끝으로 찔러서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만든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발길질을 하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바바라 보우웬,《성경에 나타난 기이한 표현들》, 생명의 말씀사-

 

“성찬아 성찬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원망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런 말씀이 귀에 들려 왔다.

여전히 들을 귀가 없는, 내게.

 

주여,

실속 없는 이타주의적인 낭비 대신,

하늘 당신이 내게 소원하는 이기심을 내게도 불어 넣어 주소서!

의무감에 충일하여, 내려놓는, 순종하는 알찬 이기심을,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