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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 예본

2014.09.28 10:10

김성찬 조회 수:3807 추천:11

영혼일기 1572 : 예본

2014.09.28(주일)

 

이아침, 영화 ‘명량(明梁)’의 김한민 감독이 티비에 나왔다.

나올만한 사람이 나왔다. 무려 1,750만 명, 관객 동원 신기록을 세운 사람이니까.

 

나도 그 영화를 봤었다.

그냥 시원했었다.

 

그런데 김 감독은 그 영화의 주제가 ‘두려움’이라고 했다. 그는 영화감독의 자리가 흥행의 성패에 대한 ‘두려움과 중압감’에 짓눌려 있는 자리라고 했다. 그래서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 직업 중에 두 번째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두려움과 중압감’을 야전 사령관 이순신을 보면서 극복해 냈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제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 야전 사령관인데,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인간 이순신도 그의 난중일기(亂中日記) 곳곳에서 그 직무 수행에 대한 두려움과 중압감에 떨며 밤을 지새운 장면을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군은 끝내 죽음으로 그 두려움과 중압감에 맞섰다. 그런 역사적 장면을 대하고 그는 이렇게 자신을 다졌다고 한다. 부하들의 생명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고, 자신도 죽음과 직면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필생즉사 필사즉생(必死則生 必生則死)’으로 맞섰다는데, 자신의 일은 목숨을 내놓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며 영화 제작에서 오는 두려움과 중압감을 떨쳐내려 힘썼다고 말했다.

 

그랬다. 그래서 영화 ‘명량(明梁)’을 본 관객들의 뇌리에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대사가 오래 꽂혀 있었던가 보다.

 

그리고 두려움과 중압감에 떨던 장수 이순신은,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 두려움이 용기가 된 배경에는 그가 사랑하는 백성이 있었다. 그의 애족, 애민 사상은 그의 충(忠)인 의리(義理)에 있었다. 그래서 그 명대사가 탄생한다.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애민(愛民) 사랑하는 백성에 대한 의리가 좇는 충(忠)은 자신을 시기하고 배척하여, 매번 곤죽을 만들었던 임금 선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백성으로 향하는 충(忠)을 좇았다. 그의 임전무퇴는 세상에서 영달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고, 백성을 위해 죽는 의리인 충(忠)에 있었다. 그 어떤 두려움이나 중압감도 그 백성을 사랑하는 장군의 의리, 충을 넘어 설  수 없었다. 애민인 충은 무적이었다.

 

이순신에게서 예수를 본다.

아니, 예수의 현현 이순신을 본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말은 충성을 완성한다는 말이다. 그랬다. 예수께서는 충(忠)의 현실태인 자기 백성을 사랑하심으로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셨고,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몸 찢고 피 흘려 그 충(忠)을 완수하셨다. 하여,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온전히 이루셨다.

 

그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사명감이 주는 두려움과 중압감이 얼마나 컸으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고 의사(醫師) 누가는 기록했겠는가? 그리고 하소연 하셨을까, 이렇게. 하늘 아버지께.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a).”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장 33절)”고 말씀하시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향하셨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b)” 감람산을 내려 와, 골고다로 향하셨다.

 

가위 눌린 아침이다.


이아침도 예수께서는 내 안에서 짓눌려 계신다. 그리고 다시 말을 건네신다. 나직하고, 다정다감하게. 내 약함을 아시고, 내 약함을 아시기에 나에 대한 가없는 관대하심으로 나를 터치해 주신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0-41)”

 

주일이다.

과연 주의 날이다.

오늘만이라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날이길 소망한다.

어제 교회 떠난 장 형兄!에게 보낸 연서를 나는 한 편에 개켜 놓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두려움(Furcht, fear, 恐怖)은 하나의 기분현상이다. 두려움이란, 비본래적 정황성을 지닌, 본래적 자기로부터 회피하게 하는.

 

예수 안에서 새사람을 입은, 본래적인 나는, ‘예본’인 나는,

주일 아침, 이 말씀을 함께 묵상함으로 시작한다.


예본으로 맞선다. 그 두려움과 중압감에 맞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