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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오, 당신, 예수를 주소서!

2014.09.30 21:48

김성찬 조회 수:3545 추천:12



영혼일기 1575 : 오, 당신, 예수를 주소서!

2014.09.30(화) 

 

토마스 아 켐피스의 「평화와 영적인 성숙을 열망함에 대하여」(『그리스도를 본받아』) 를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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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예수님의 천국을 탐하는 자는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자는 거의 없다.

 

예수님의 위로를 소망하는 자는 많으나,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하려는 자는 거의 없다.

 

그분과 함께 만찬 식탁에 나가려는 자는 많으나,

고난을 당하려는 자는 거의 없다.

 

그분과 함께 만찬 식탁에 나가려는 자는 많으나,

그분과 함께 금식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없다.

 

누구나 그분과 더불어 기쁨을 누리고자 하나,

그분을 위하여 또 그분과 함께 고통을 참으려는 자는 거의 없다.

 

떡을 나누어 주는 그분을 따르는 자는 많으나,

그분의 고난의 잔을 마시려는 자는 거의 없다.

 

그분의 기적을 숭배하는 자는 많지만,

그분이 당한 십자가의 치욕을 따르려는 자는 거의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도 환란이 일어나지 않을 때뿐이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축복을 소망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분에게서 위로를 받을 때에 한해서이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잠깐 동안 자취를 감추시어 그들을 떠나시면,

그들은 불평불만을 터뜨리면서 크게 낙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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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토마스 아 켐피스가 고발한 ‘오늘날’은 ‘그 어느 오늘날’인가?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15세기, 중세를 산 사람이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의 부패성을 폭로한 당대의 ‘오늘날’은 당연히 그가 살았던 중세(中世)다. 그런데 그 먼 중세에 나온 신앙 지도서에 오늘 우리의 영적 실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는 마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부패한 영적 상태를 예견한 묵시 문서 같다.

 

그 오늘날이

이 오늘날이다.

 

오늘처럼 어제도

오늘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오늘도

 

우리는 원죄의 부패성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동어반복(同義語 反復;tautology)

시대를 불문하고 동일(同一)한 그리스도인들의 비본질적인 신앙 행태를 우리는 오늘, 그 고문서에서 발견한다. 그때도 그랬구나. 오늘도 그렇고, 아니 초대 교회 시대에도 그랬었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계(警戒)를 발했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이는, 고통하는 때에 경건의 모양이 있는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이 벌리는 일이다. 그런데 그 말세가 인류 최후의 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오늘날’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고발한 중세(中世), 바로 ‘그 오늘날’이나, 작금 21세기 ‘오늘날’이나 죄다 말세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애(自己愛)에 취해 외려 고통을 당하는 말세다. ‘오늘날 말세다. 말세인 ’오늘날‘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Thomas à Kempis, 1380년 ~ 1471년 7월 25일)는 중세 독일의 신비사상가이다. 그는 라인 강 하류의 켐펜에서 태어나, 92년 동안의 일생을 거의 즈볼러에 가까운 아그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 및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공동생활의 형제회'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 회에 가담하여 모범적인 경건한 생활을 보냈다. 이 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정결·복종의 생활을 보내도록 노력하고 재산은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다. 일은 사본(寫本) 및 인쇄·제본과 교육으로,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에 에라스무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을 배출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회와는 달라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의 조용한 실천활동이 강조되고 있다.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이후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다. 그래서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를 몇 가지 썼는데, 그 중 한 책이 기독교 세계에서 널리 애독되는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http://ko.m.wikipedia.org/wiki/%ED%86%A0%EB%A7%88%EC%8A%A4_%EC%95%84_%EC%BC%90%ED%94%BC%EC%8A%A4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는 여전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오래 전부터 해 오는 것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의 뜻하는 바와 반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지만 만약 그대가 사소한 일마저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보다 어려운 일을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악습에 서서히 빠져들어 엄청난 난관에 처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그러한 성향을 억제하여 아예 악습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말로 그대가 거룩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얻게 될 내적 평화와 남에게 가져다 줄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인식한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의 영적 발전에 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으리라."

 

“예수님을 사랑하되 자신을 위한 특별한 위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자는 어떠한 환란과 괴로움을 당해도 그리고 최상의 위로를 받는 중에도 예수님을 찬미한다. 이런 사람은 예수께서 전혀 위로를 주시지 않아도, 한 결 같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언제나 예수님께 감사드린다.”

 

어렵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잠깐 동안 자취를 감추시어 그들을 떠나시면, 그들은 불평불만을 터뜨리면서 크게 낙심”해 마지않는 부실한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십자가, 고난, 금식, 치욕 같은 군색한 기독교 용어를 잊은 지 오래다. 헐벗고, 굶주린 세월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우린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구하기만 하면 돈벼락 내려 주시던 주술적 하나님만 우리는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공동생활의 형제회' 소속이었다. 그 형제회는 프란치스코회와는 달라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에게 구걸하지 않았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그들은 하나님에게도 구하지 않았다.(그랬을 거다.)

 

그들은 “예수께서 전혀 위로를 주시지 않아도, 한 결 같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언제나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거룩한 형제들이었을 거다. 위로를, 만찬 식탁을, 반짝 기쁨을, 떡을 나누어 주는 그분을, 기적을 그리고 천국만을 탐하는 이방인 같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자원하여 가난해진 이들의 조용한 신비적 실천, 그 말없는 권위자이었을 거다.

 

그래 그래서 말씀은 금언이요, 변함없는 진리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2-33).”

 

오, 당신, 예수를 주소서!

헛것만 구하는 나에게.

 

“오, 주님! 그러므로 당신께서 만일 당신의 손을 우리에게서 거두신다면 우리에게는 진실로 거룩함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만일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당신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용기는 도움이 되지 못하며, 당신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순결성은 지켜지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거룩하신 돌보심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한다면 우리 자신을 돌보고자 하는 조심성이란 아무 소용이 없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