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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 정말 기도해야 할 때?

2014.10.22 10:27

김성찬 조회 수:4106 추천:15

영혼일기 1602 : 정말 기도해야 할 때?

2014.10.22(수) 

 

「정말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ᆞᆢㅡ

 

YouTube에서 한성주소장 땅굴위기 강연 - 분당기쁜우리교회에서 보기 - 한성주소장 땅굴위기 강연 - 분당기쁜우리교회에서: http://youtu.be/X0iSszBBFOs」

 

지난 며칠 사이에 이상과 같은 내용을 담은 카톡이 빗발쳤다. 한마디로 어느 공군 예비역 장군이 목청 높인 북한 정권이 남한 땅 전(全) 지역의 땅굴화(化) 작업에 성공했다는 고발이자 경고가 그 강연의 요지다. 목포까지, 거제도까지 서울은 청와대 밑은 물론, 천지 사방이 거미줄처럼 땅굴로 난도질당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그 추측이 직통 계시 수준이다. 그 어떤 경각심을 고취시킨다는 의도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지나치다. 한마디로 공인 되지 않은, 내 상식으로는 시대착오적 레퍼토리 같다. 더 놀라운 것은, 분당의 어느 한 교회에서 행한 그 강연에 화들짝 직통 계시를 접한 양 반기며, 그 복음(?)을 전파하는데 맹렬한 목사들의 정서적 현주소다.

 

정리해 본다.

그 복음(?)을 신봉하는 강단은,

 

거칠다 - 이념의 강단은 성속(聖俗)의 언어를 가리지 않는다.

편파적이다 - 이념의 강단은 양과 염소를 억양(抑揚)으로 구분한다.

몰(沒)상식하다 - 이념의 강단은 상식(常識)을 거부한다.

 

정말 기도해야 할 때라는, 그 분별력 없는 긴급동의는 그 동의에 재청하지 않는 목사는 애국심과 신앙심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한 두 번이 아니라, 툭하면 울리는 카톡 소리이기에. 반복 되는 그 경고는 그런 불쾌감을 거듭거듭 접속하는 이의 가슴에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세뇌시킨다. 천당 밑 분당 거룩한 강단에서 있었던 신탁이기에 함께 신성시하라. 하여 그 신탁을 누리고, 나누어라. 땅 끝까지 전파하라.

 

내게 그런 카톡을 보내 온 이들이 죄다 목사들이다. 목사들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그들은 나에게만 그런 내용을 패스한 것이 아님에 틀림없다. 나의 순진한 친구 목사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그 동영상을 틀어놓겠다고 했다. 그들은 그 복음(?)이 요즘 강단에서 자취를 거의 감춘 성서적 종말론 보다 더 시급한 복음이라 여기고 있어 뵌다. 더 놀라 운 것은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던 아무개 목사한테서 뜬금없이 카톡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그게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가 직접 나에게만 보냈을 리 만무하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한 때 총회장으로 군림 했던 교단의 목회자들에게 이상과 같은 교지(敎旨)를 내려 모든 교회, 모든 목사들의 멸공통일의식을 다시 단단히 다지게 하려 했던 것 같다.

 

나도 실재한 땅굴 견학을 다녀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전 근대적 도발이 과연 실제 상황에서 얼마나 유용할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의도가 적발 된 이상 그런 무모한 땅굴 파기를 오늘에도 그들이 계속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전술 전략적 실리가 없음을 우리보다 저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가 국방을 책임지는 고위급 인사들의 판단이라고, 그 강연자는 동영상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일개 공군 예비역 장군의 자기 확신에 매몰 된 추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그 맹신을 신성한 강단에 세우고, 거칠고 선동적인 이념 도발을 일삼게 한, 일개(一介) 교회의 그 어떤 의도가 일순 한국교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교회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증거다. 이념 집단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물론 무신론적 공산주의는 우리가 철저히 경계해야 하고, 동시에 복음으로 녹여내야 할 대상이지만, 오늘 한국교회가 정권유지의 한 수단으로 전락한 멸공 통일 노선을 신성한 교리처럼 떠받드는 모양새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런 옛 판 파일(file)을 뒤적였다. 지난 세기에 내가 쓴 글이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그들의 글과 강연 등을 접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기억조차 없었던 먼 옛날의 사건이 자꾸만 오버 랩 되어 오곤 했다.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세기) ’70년댄가, 정확히 그 연도는 기억 할 수 없지만, 문득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시절 우리는 간식으로 곧잘 ‘라면 땅’을 즐겨 먹었다. 라면 부스러기를 기름에 튀긴 고소한 과자를 말이다. 그런데 어느 하루아침에 그 ‘라면 땅’이 맛이나 가격 문제가 아닌 엉뚱한 일로 다시 한 번 더 유명해졌었다.

 

그 문제의 발단은 뽀빠이가 그려진 상품 도안에 있었다. 내용인즉슨, 한 간첩단이 적발 되었는데, 그 간첩단 중의 한 사람이 문제의 ‘라면 땅’의 도안을 그렸다는 것이다. 적화통일의 음모가 담긴 ‘라면 땅 도안’을 말이다. 그제야 우리는 그 도안에 적화통일의 음모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왜냐하면 간첩단 사건 이전에는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런 음모가 전혀 우리들에게는 무해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감추어진 음모인 그 문제의 그림 때문에 ‘적화(赤化)’된 사람은 없었고, 간첩단 사건 발표 후에도 그 그림 때문에 ‘간첩’이 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값싸고 맛난 라면 땅이었을 뿐이었다.》

-「라면 땅과 반(反) 뉴에이지 운동」中, 김성찬 『성경이 말하게 하라』-

 

그리고 더 중요한 진실한 사실은 오늘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무슨 말인가? 정말 그 간첩단의 일원으로 암약했던 이가 ‘라면 땅의 도안’을 그린 사람이었는지, 간첩이 그린 거였고, 정말 뽀빠이가 걸친 마후라가 남침의 의도를 드러낸 도안이었는지, 며느리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랬었다는 거지, 그게 실체적 진실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말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그렇게 인식하게 됐다.

 

작금 현(現) 정부도 북한 정권의 남한 전(全) 국토의 땅굴화(化) 수작에 의문을 표하며,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공식적 정부 입장이나 과학적 근거 없는 일개 공군 예비역 장군의 자기 확신에 근거한 선동이 이렇게 쉽고, 빠르게 한국 교회를 강타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좋게 말해, 이런 발 빠른 대처는 우리 목회자들의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대한 번개 같은 신앙적 경계심의 표출이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종말론적인 경계심을 갖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런 공적 근거 없는 호소에 장단 맞추는 이 땅의 목회자들의 상식에 나는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경험칙(則) 상, 이 땅의 목회자들이 선량한 시민들에게 의심의 해석학과 기만과 저항의 영성을 길러 준 거짓말하는 지도자들에게 맹종해 온 ‘쓸데없는 의원’(욥13:4)에 불과했다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에릭 에릭슨의 말이다. “종교는 신앙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신뢰감을 회복시키고, 인간을 지배하는 악마적 세력을 구체화하여 인지할 수 있게 함으로써 물리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불신의 땅굴화(化) 작업이 정점에 다다르고 있는 느낌이다. 땅이 꺼지는 종말의 징조를 보면서도 우리는 우리네 종말 신앙을 점검하지 않고, 남남 갈등을 증폭시키는 생각 없이 물든 정서적 반감만 상호 극대화시키고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악마적 세력(여기서 그 강연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을 구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상식과 안목을 회중들이 갖추도록 하는데 힘써야할 목회자들이 외려 앞장서서 그 판단력을 흐려 놓고 있다. 

 

그렇다면 균형 잡힌 상식과 안목이란 어떻게 획득하는가? 그것은 기초적 신뢰를 득(得)하는 데에서만 가능하다. 에릭슨이 말하는 기초적 신뢰(basic trust)란,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불신적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긍정하고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감각이다”고 정의한다.

 

그런데 그런 강연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 팽배한 불신적 현실과 우리 사이를 더 불화하게 함으로써, 결국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 우리로 하여금 부정하게 한다. 그리고 입장 다른 이웃에게 자신들의 왜곡 된 불안 심리를 전가하는 정서적 도발을 일삼아 이 땅을 ‘불신의 땅굴화(化)’할 뿐이다.

 

나는 그 강연은 시청하며, 그 정보의 객관적 의미, 즉 표면적 의미보다는 그 이의 제기에 담긴 주관적, 심층적 의도를 자꾸만 의심하며, 엿보았다. 저 주관과 심층을 구성한 기반은 무엇일까? 그의 지대한 염려와 불안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의 문제만은 아닐 거다. 이 땅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 모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를 긍정하고,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감각이 결여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저나 너나 나나 우리 모두가 다.

 

간구한다.

그 해프닝이 이벤트(사건)가 되지 않기를.

그럴 리도 없지만, 그래도.

 

http://blog.daum.net/martuis/1048

 

‘정말 기도해야 할 때’ 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전인적 균형 잡힌, 분별력 있는 감각이 생성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