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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4 : 귀곡성

2019.03.09 09:44

관리자 조회 수:16

모든 말은 알아 들으라(주라)고 한 말이다.

모든 몸짓도 알아 들으라(주라)고 한 몸짓이다.

모든 침묵도 알아 들으라(주라)고 한 침묵이다.

 

오후 내내,

알아 주라고 한 말을 들었다.

이틀 동안,

알아 주라고 한 몸짓을 보았다.

 

쉽지 않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최소한 말없음이 있었다.

 

나에게

호소하고

항의한다는 말(또는 몸짓)은

나를

기대어, 기대하며

나의 동의를 고대하고 있다는

말(몸짓)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끌며, 매달리는 것은

단지 알아 듣지 못할까 봐, 

반복, 반복,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반복, 반복, 반복함으로,

반복의 기적으로 학습 되어지고, 소통 되어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알아 들으려고, 입 다물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이해해 주려고, 몸 사리며 발자욱 소리의 강약을 가늠하려 들었다. 

 

왜냐하면,

화자話者는 나를 자신의 유일한 청자聽者로 셈하고 있(었)기에

 

동일하게 알아 듣는 청자가 될 수는 없지만,

상응하는 청자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겼을 것이기에,

화자는 나를

 

감사합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아버지시여-아들 예수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요11:41,42)

 

항상 자신의 말을 완벽하게 알아 듣는 아버지 하나님을 둔 아들 예수는 얼마나 행복한 화자였을까!!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막4:23)

 

예수의 발화를 알아 듣지 못했던 허다한 무리들, 심지어 그의 제자들조차. 하여, 그분은 끝내 몸을 찢는 몸말로 소통을 이루고자 하셨었지.

 

다 알아 듣지 못한 자의적 해석자인

나를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을까?

 

그 아픈 몸짓까지 처절하게 연출했으나, 

거의 그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 보지 못한,

이 청맹과니 때문에

 

다시 밤이 왔다.

모든 소통의 말과 몸부림을 무화시키는 

죽음처럼 주검 된,

밤이 다시 왔다.

 

밤에서 밤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네 삶은

모든 것을 무화화시키는

영면에 드는 걸까?

 

불통-귀곡성으로만 남는

 

 

 

2019.03.07(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