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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8: 계시 해석의 점진성

2019.04.19 20:26

관리자 조회 수:62

성 금요일(Good Friday)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한다.

 

그러다가, 그 십자가의 진의를 밝혀 왔던 교회사 교리 논쟁 중, 한 대목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가 아닌 오직 택하신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청년 집사 시절 나는, 내가 평일에 출석하고 있던, 시골 장로 교회 목사님과 ‘제한적 구속’에 대한 논쟁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나에게 “김선생은 내가 이중 예정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 중에서 제일로 감당하기 힘든 분,”이라고 했다.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1618~1619, 네덜란드의 도르드레흐트)는 알미니안주의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면서, 5가지 핵심 칼빈주의 사상을 정리한다. 일명 ‘튜립(TULIP) 신학’이다. 그 가운데 ‘제한적 구속(Limitid atonement)’이 포함 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가 아닌 오직 택하신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음을 강조한다.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본다.

 

나사렛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을 위한 죽음일까?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듯이, 나사렛 예수의 죽음이 가져 온 혁명적인 변혁의 혜택을 온 인류가 만끽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 만인을 위한 죽음을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죽음으로 제한해야만 하는가? 그 죽음이 제한 되어 있다고, 해석하고, 불변의 진리처럼 신봉해야 하는가?

 

그 ‘제한적 구속론’은 자신만이 택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자에게는 그 구원의 확신 농도를 더 짙게 해 주겠지만 말이다. 

 

교회사 학자이자, 칼빈주의자인 한홍 목사도 이렇게 해석한다. 

 

“도르트와 웨스트민스터의 슬픈 여운 중에 하나는, 칼빈의 신학을 정작 칼빈이 살았더라면 결코 의도하지 않았을 경직되고 엄격한 시스템으로 굳혀 버렸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예정론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형언키 힘든 기쁨을 표현하는 창구였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그것은 정통 신학을 가려내는 딱딱한 잣대로 변해버렸고, 마치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선택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신종 바리새주의, 영적 엘리트주의를 낳고 말았다.”(한홍 <<한홍목사의 종교개혁 히스토리>> pp. 147,148)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 항의자)라고 부른다. 따라서 비복음적인 물리적인 힘에 맞서는 저항 정신이 개신교 신앙을 보수하는 기본 정신이다. 또한 그 저항 정신은 계속해서 개혁 되어가야 하는 현재 진행형이다.(Reforming church) 

 

말씀 계시는 완성 되었으나, 계시 해석은 미완이다.  

 

계시 해석의 점진성을 통해서, 루터와 츠빙글리, 존 칼빈, 알미니우스, 필립 스페너, 존 웨슬리, 마틴 냅으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교회는 계시 해석의 역사를 앞으로 밀고, 뒤로 돌려 보며, 계시의 진의를 재 확인해 오고 있다.

 

<16세기 후반 네델란드의 목사요 교수인 야코부스 알미니우스(Jacobys Arminius,1560~1609)는 칼빈주의 교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이 생기기도 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또 어떤 사람들은 멸망시키기로 예정해놓으실 수 있는가?”

 

알미니우스는 이 사상에 심각한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치열한 고민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의 구원’을 예정해놓으셨다는 것이다. 다만 어떤 이들은 그 구원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들은 거절할 뿐이다.>

 

결국 예정론이란 인간 개개인의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전지하신 능력으로 누가 하나님의 구원을 수용하고, 누가 거부할 것안지를 미리 아시는 것뿐이다. 

 

알미니우스의 이 논리가 바로 유명한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가 된다. 

 

이 논리가 가져온 파장은 엄청나게 알미니우스가 사망한 한참 뒤에도 뜨거운 신학적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한홍, 상게서,pp.145,146)

 

그래서 도르트 총회(1618~1619)가 소집되어 알미니안주의가 공식적으로 거부되고, 칼빈도 살아 있다면 동의하기 어려웠을(?) 경직된 교리  ‘튜립 신학’이 정리 된다.

 

그랬으나, 계시 해석의 점진성에 따라 이후 알미니안주의는 부활한다.

 

그 2세기 후, 초기 종교 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은 영국국교회(성공회) 목사 요한 웨슬리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성결론을 접목시켰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에 인간도 책임감 있게 반응해야 함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반(反) 칼빈주의인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6세기말 네델란드의 신학자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예정론과 그리스도의 대속이 택자에게만 제한된다는 교리를 거부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성령의 설득을 거부하고 구원의 제안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등을 돌린 신자들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한홍,상게서,p.234)”

 

이는 말씀보다 교회 전통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반동으로 루터는 말씀 우위를, 절대 왕정의 권위를 타파해야 했던 시기에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종교개혁의 열매가 영적 부패와 타락으로 이어지자 웨슬리는 성결론을 계시 해석의 점진성에 따라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알미니안주의는 훗날 웨슬리의 감리교회와 미국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산물인 성결교회, 잃어버린 영혼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일부 침례교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오늘날, 감리교회는 5천 만 성도로 성장했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면 거기서는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 오순절교인, 플리머스 형제단, 성결교인 등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만 상봉 하게 될 것이다.”(오스왈드 스미스,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라>>)

 

아멘아멘 

 

요한복음1[개역개정]

 그가증언하러왔으니빛에대하여증언하고<모든사람이자기로말미암아믿게하려함이라

 

요한복음1[NIV]

 He came as a witness to testify concerning that light, so that through him <all men> might believe. 

고린도후서 5장 [표준새번역] 14~17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NIV] 14~17.

14  For Christs love compels us, because we are convinced that one died for all, and therefore all died. 

15  And <he died for all>,  that those who live should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but for him who died for them and was raised again. 

16  So from now on we regard no one from a worldly point of view. Though we once regarded Christ in this way, we do so no longer. 

17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2019.04.19(성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