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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2 주일예배 설교문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샬롬,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드십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위로가 온 가내 가득 넘치길 기도합니다.

속히,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함께 예배하는 시간이 오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래, 내일 주일 가정예배 설교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또는 혼자서라도 아래 올린 찬송과 기도문 그리고 설교문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2020년 03월 22일(주일) 주일 예배 자료입니다.>>

 

찬송 : 220(새) 278(통) 사랑하는 주님 앞에

 

1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한자리에 /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 부르네

 내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2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온갖 충성 다 바쳐서 /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힘써 섬기세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

 

3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조차 하나 되어 /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0장 25절~37절

제목 : 이웃과 더불어 살기

 

<오늘 설교 본문 말씀을 받들어 함께 소리 내어 읽읍시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그동안 ‘하나님과 거리 좁히기,’ ‘가족끼리 살 부비기’에 이어서 ‘이웃과 더불어 살기,’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문화 충격〉

 

어느 핸가 제가 처음으로 미국엘 들어갔을 때, 저는 펜실바니아주 랭커스터 시에 있는 밀레니엄 'Sight & Sound' 뮤지컬 극장엘 들렸습니다. 그 뮤지컬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룻>을 관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려 이천 석이나 되고, 270도 3면이 무대인 장엄한 기독교 뮤지컬 공연장에서는 성경 이야기를 주제 삼아 뮤지컬 공연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뮤지컬 <룻>을 감상하던 중, 저는 낯선 장면을 목도했습니다. 그 낯선 장면이란, 모압 여인 룻이 유대 여인들에게 인종 차별을 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경 룻기는 모압 여인 룻이 홀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나서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정착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단일 민족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저는 인종 차별은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뮤지컬 <룻>에 나오는 인종 차별이 매우 생경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저는 룻의 효심이나, 시어머니 나오미의 친정 동네 베들레헴 사람들의 룻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만 읽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훈남 보아스로 대표되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이방 여인 룻에 대한 친절한 돌봄과 살가운 배려만 읽어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누가 축지법을 쓰듯, 이제 지구는 한 촌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지구촌 시대, 자연스레 우리는 지역 차별을 넘어 인종 차별이라는 용어에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말해서, 지구촌이 이제는 한 식구라는 말입니다. 이웃의 범위가 전(全) 지구적, 우주적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

 

그런데, 일찍이 이웃의 범위가 전(全) 지구적이라는 개념으로 확장시켜 놓은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거의 매일 보고, 듣는 책, 성경이 이웃에 대한 우리네 제한적 정의를 철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온전한 이웃의 개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온전한 이웃 개념과, 이웃에 대한 바른 정의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되물으십니다.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율법 책에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에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답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쭙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는 토라(모세오경)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연구하여 가르치는 유대인들의 선생입니다. 그는 율법교사답게 율법이 말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웃에 대한 바른 개념과 정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웃이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쿠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없는(골3:11)” 모두모두 서로의 이웃입니다. 그리고 참 이웃이란 자비가 필요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동족 유대인만이 그의 이웃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런 편벽된 이웃에 대한 개념에 젖어 있던 율법사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여인이나 먹보와 술꾼과 창녀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유대인 남자 예수의 말과 행동거지가 심히 눈에 거슬렸을 겁니다. 그래서, 본문의 기록자 누가는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영생 운운하다가, 끝내 <내 이웃이 누구냐?> 아니, <예수, 네 이웃이 누구냐?>라고 따져 묻고 있는 장면을 이같이 상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을 더 읽어 내려가 봅시다.

예수께서는 율법교사의 간교한 질문에, 비유를 들어 역공을 펼치십니다.

 

공동번역, 누가복음 10장 30절부터 37절입니다. 

 

〈다음 말씀을 받들어 함께 소리 내어 읽읍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일컫는 이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네 사람입니다. 강도 만난 유대인, 유대 종교지도자 제사장, 유대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입니다. 즉, 세 사람의 유대인과 한 사람 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인데, 피해 달아난 사람도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동족이자 같은 유대교인입니다. 그러나 정작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돌봐 준 이는 사마리아인입니다.

 

여기에 갈등 구조가 놓여 있습니다. 비유의 천재이신 예수님께서 엮은 의도적인 구성입니다. 사마리아인을 개같이 천대시하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동족 강도 만난 이웃을 보고도 달아 난 유대 종교지도자와 자기 동족을 혐오하는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이런 구성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불완전한 성경 이해와 해석에 대한 의도적인 따끔한 일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공생애 기간 내내, 이웃의 개념과 참 이웃의 정의를 분별하지 못하고, 종교적 선민의식에만 젖어 있는 유대인들에게 의도적인 도발을 해오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복음을 배척하자,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사람들을 예로 드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 교리에 불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러자 편협한 유대인들이 화를 내고, 난동을 부리다가 예수님을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같은 동네 목수 요셉의 아들이 감히 메시아라고 구세주를 참칭하고, 상종해서는 안 되는 이방 사람 시리아 사람 나아만과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의 믿음이 참 믿음이었다고 예수께서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 말씀을 받들어 함께 소리 내어 읽읍시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잘 들어라.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 주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 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눅4:24~30)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누가 참 이웃입니까?

 

21세기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은 누가 우리 이웃이며, 누가 참 이웃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네 실천적인 삶은 예수님 시대 율법교사처럼 종교적 교리와 전통에 얽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율법교사와 진배 다름이 없습니다. 

 

〈이웃에게 이웃이 되기〉

 

사교 집단 신천지의 거짓부렁과 폐쇄성이 재난에 재난을 더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 사람들의 신천지를 향하던 공격의 화살이 교회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여, 교회가 세상에 의해 봉쇄되어가고 있습니다. 페스트를 피해서 성당으로 몰려들었던 이들이 집단 사망한 역사적인 교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세상이, 교회를 우려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배를 절대 폐할 수 없다는 신앙 의기를 나는 존중합니다. 그러나 절제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맨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 내야 합니다. 

 

완전, 완벽, 절대는 없습니다. 그런 주의주장은 전혀 종말론적 성경 이해하고는 배치됩니다. 세상은 불완전 합니다. 그래서 완전을 이룰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는 신앙하는 것입니다. 집합 주일 공적 예배 논란을 통해 우리는 기존의 예배 신학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절대로 주일 공예배를 폐할 수 없다는 절대,란 역으로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 천국을 이루어 보겠다는 인본주의적 발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절대로 예배할 수 있는 땅이라면,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대망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절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말세지말에는 명백하게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바대로, 우리가 집합 공예배를 드릴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 마음을 성전 삼아 주셨습니다. 하여, 내 마음에 모신 구주 예수님을 진리 가운데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작금 앞으로 닥칠 종말 대비 예행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모이기를 폐해서도 안 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는 말씀 따라서, 우리는 전염병이 잦아들면, 반드시 한 마음으로 함께 모여 여호와를 힘껏 찬양해야 합니다. 그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시다. 

 

이 같은 이유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에 덕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자, 이 재난의 전염성이 약화 되는 시기까지, 우리교회는 주일 공예배를 이렇게 가정 예배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 결단은 믿음의 강약을 논할 꺼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뱀처럼 지혜롭게 주일 공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을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제 각각 자기의 위치와 형편과 신앙고백 따라 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주일 가정 예배를 드리는 방식으로, 이웃에게 이웃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예배만 절제해서는 안 됩니다. 참 이웃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씀을 생활화, 행동화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말씀을 알고, 말씀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참 이웃이 되기 위해서,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참 이웃인 이유는?〉 

 

그는 자기 동족을 차별하고, 멸시한 유대인을 그 위기에서 구원해 내는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참 이웃은 사람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지역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인종 차별도 하지 않습니다. 

 

지난 ‘80년대 제 나라 군인들에게 살육 당하고, 도시가 봉쇄당했던 광주 시민들이 맨 앞에 서서 대구 시민 중 코로나19 확진자를 자기 동네로 모셔서 치료 받게 한 미담이 있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욕하면서 악한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당했던 봉쇄의 아픔과 슬픔을 승화시켜서, 대구 사람 봉쇄를 몸으로 막아낸 것입니다.

 

특히 이 재난 앞에서 인종 차별이 극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름(Different)을 다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름을 틀림(Wrong)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금, 아시아인들이 유럽에서는 전염병 바이러스처럼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서구인들 안에 잠복 되어 있던 피부색의 ‘다름’에 대한 차별 의식이 코로나19를 통해 급속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지구촌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다름’에 대한 차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관을 재확립해야만 합니다. 

 

볼프(Volf)는 그의 저서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에서, 그는 우리 지구촌이 처한 ‘우리 모두’라는 말을 없애 버리고, ‘우리와 저들’이라는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우려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대안으로, 그는 인종 간의 불화라는 공포스런 삶 속에, “서로 받아들임”이라는 길 찾기를 시도하자고,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중요성〉

 

그 방편으로는 회개와 용서, 더불어 사는 삶, 그리고 기억의 치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자원한 수난을 통해서, 사람 사이의 불화를 뛰어 넘는 헌신적인 사랑과 낯선 이방인들을 위해 자신 안에 한 공백을 만드셨다. 예수께서 수난을 통해서 자기 안에 만드신 공간이란, 헌신과 남을 받아들이는 참으로 완전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내부의 모습이다. (...)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는 나의 안에 계시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요10:3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 홀로 존재함이 아니라, 다른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 속에 함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차별 받고, 멸시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 동족도 피해 달아나던 강도 만난 유대 사람에게 생명의 공간을 마련해 준 비유의 주인공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신 헌신과 사랑으로 빚은 여백을 우리 죄인을 위해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을 보여준 비유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땅에서는 광주 사람들이 자기 안에 사랑의 공백을 만들어서 대구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한 모범입니다. 

 

<‘Mask for Peace'>

 

‘Land for Peace!'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땅을 서로 균등하게 나누자,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재난의 속에서 가장 절실한 구호가 'Mask for Peace'가 아닌가 싶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마스크를 나누어 쓰자,라는 구호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생명 같은 마스크를 나누어 쓴 지구촌의 미담이 있습니다.

 

〈인천 시로부터 마스크를 지원받은 중국 도시가 한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이 확산하자 훨씬 더 많은 양의 마스크를 인천으로 보냈다. 지난 3월 4일 인천 시에 따르면 인천 시의 자매 우호 도시인 중국 웨이하이(威海)시는 최근 감사 서한문과 함께 마스크 20만개를 인천 시에 보냈다. 웨이하이 시는 편지에서 "인천 시에서 보내 주신 응원과 지원에 감사드리며 인천시를 지원하기 위해 마스크를 지원한다"며 "인천 시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고 양 도시의 견고한 우정을 기원 한다"고 전했다.  

 

인천 시는 앞서 코로나19 감염자가 국내에서 급증하기 전인 지난 12일 웨이하이 시에 마스크 2만개를 지원했다. 인천 시는 웨이하이 외에도 충칭(重慶)에 3만개, 산둥(山東)성과 선양(瀋陽)에 각각 2만 5천 개 등, 중국에 모두 10만개의 마스크를 지원했다. 시는 애초에는 중국 자매 우호 도시 15곳에 마스크 24만 개, 보호 안경 2만1천개를 보내는 방안을 추진하다 국내 코로나19 감염 상황이 심각해지자 지원을 도중에 중단했다. 시는 중국에서 지원한 마스크에 대한 품질 검사를 마치고 현재 분배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인천 시 관계자는 "마스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곳 위주로 분배 계획을 효율적으로 세우겠다"고 설명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은 한 혈통>

 

작금 코로나19 전염병 재난으로, 비록 우리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웃 간의 마음의 거리는 좁히며, 이웃과 더불어 사는 모범을 상호 실천해야 합니다. 히브리-기독교 전통에는 우리가 같은 부모를 지닌 한 인간 가족의 일부라는 지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말씀을 받들어 함께 소리 내어 읽읍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행17:24~26).” 

 

그러므로 이 새로운 시대는 우리 가족 또는 이웃이라는 개념 속에 반드시 인류 공동체를 포함해야 합니다. 지구촌 시대를 열어주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은, 우리가 서로 깊은 영적 유대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는 전(全) 인간 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전(全) 지구적인 의식, 양심, 돌봄, 공동체적인 삶입니다. 이 재난의 위기를 기회 삼아 우리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전인적 영적 치유력과 비전을 제공해 줘야 합니다.

 

〈‘Korea Wonderland!’〉

 

감사하게도, ‘Korea Wonderland!’ ‘대한민국, 참 이상한 나라!’라는 칭송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마스크를 못 사는 국민들에게 보탬이 될까 하는 생각으로, 한 땀 한 땀 손수 바느질했다는 83세 할머니가, 그렇게 만든 20여 개의 마스크를 수줍게 전달하고 사라졌습니다, 라는 감동 사례가 지구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코벤져스’라는 신조어가 공중부양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의료원 7층에 있는 의료진 상황실 출입문에는 이 네 글자를 크게 쓴 사진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언론 매체 사진 속에서 하얀색 레벨D 방호복과 고글로 전신을 가린 채 눈만 빠끔히 내놓은 간호사 10여명이 병실 복도에 모여 V자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121병동에서 근무하는 이선숙 파트장(간호사)은 “우리 간호사들이 코로나를 물리치는 어벤져스(히어로들)라는 뜻”이라며 웃었다고 합니다. 

 

교회들도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이웃들과 교회들을 돕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에서도 1,200여 교회 월세로, 1백만 원 씩을 나누어 드리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역사학자로 '사피엔스' 저자인 유발 하라리 교수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저지한 성공 사례로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를 꼽으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전세계가 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어려울 때면 공동체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며 위기 국면에 맞서는, 우리의 국민들의 자기 비움과 희생, 헌신과 국가적 투명한 시스템과 리더십이, 민주 사회의 핵심 가치라는 사실을,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에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설교 문을 작성하고 있는 시간에도 스마트 폰에서 부저가 뿌뿌 울리고 있습니다. 시청에서 발송해 준 긴급재난문자 알림 소리입니다. 이 이상한 나라, 한국을 배우자는 운동이 지구촌에 물결치고 있습니다.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참 이웃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웃이란, 오늘 본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지역과 인종을 따지지 않는 이웃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리고 참 이웃이란, 위험을 무릎 쓰고,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위기에 처한 이웃에게 흔연히 내어 주는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너도 가서 이같이 행하라, 주께서 우리에게도 권면하십니다.  

 

아멘으로 받아들이며, 예수님께서 수난을 통해서 자기 안에 만드신 완전한 이웃 사랑의 공간을 우리 안에도 만듭시다. ‘아버지는 나의 안에 계시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듯,’ 하나님의 사람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 속에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이 시대 정신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든 사람에 대한 자기희생과 극진한 배려를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실천합시다. 그리하여, 전염병 재난에 허덕이고 있는 온 세상과 신앙공동체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십자가의 정병들이 됩시다.  할렐루야, 아멘. 

 

<다음 기도문으로 함께 소리 내어 기도합시다.> 

 

기도문

주님, 우리나라 전국이 코로나19 때문에심한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 꿇은 이 시간저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을 이들을 위해먼저 기도합니다. 

 

연로하신 분들을 기억해주십시오. 건강한 젊은이들보다 더 불안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정을 기억해주십시오.  오늘도 환자들을 직접 만나고 있는의사와 간호사들을 기억해주십시오. 묵묵히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공무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두려움도 전파되지만사랑과 평안도 전파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절제와 평안이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혐오와 두려움을대체하게 하여주십시오.

 

한계를 정하지 않고 쓰고 먹는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된 이번 사태 앞에서교회가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게 해주소서.

우리의 오늘 하루 삶이탐욕과 두려움을 이기는 삶이 되게 하소서.

 

여호와 라파(치유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치유의 광선을 발하시어, 속히 이 전염병을 이 땅에서 물러가게 하여 주옵소서.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교우들과 우리 국민들과 세계 사람들을 코로나19에서 안전하게 지켜 보호하여 주옵소서.       

 

주님 지난 3월 12일 세계보건기구(WHO)가 110개국·12만명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 되자, 결국 '세계적 대유행’(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제 국가에서 확진자가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이 위기 국면에 처하게 되었고, 6대주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주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동시에 아시아인들에 대한 냉대와 차별이 극심해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이 재난 속에서 인종 혐오 감정까지 극대화 되는 불행한 사태를 막아 주옵소서.

타인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엎드려 주의 자비를 구하오니, 이 땅을 속히 고쳐주옵소서. 

속히, 공예배가 다시 드려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이 재난 중에도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상호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음입니다. 

 

이 재난 중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해 주십시오.  

가족들과 살 부비는 시간을 잘 선용하게 해 주십시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참 지혜와 실천력을 공급하여 주십시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되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