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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3: 말씀 한 모금 15 안식

2020.03.23 14:03

관리자 조회 수:18

코로나19를 이겨낼,

말씀 한 모금-에덴 이야기 (15)  2020.03.24.(화)

 

안식 

 

찬송/ 43(새) 57(통) 즐겁게 안식할 날

말씀/ 창 2:1~3절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3)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빛, 바다, 열매 맺는 땅,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빛나는 하늘, 공중의 새, 바다의 물고기, 땅의 생물들을 만드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사람까지 빚으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에 이를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스러우셨던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다 마치시며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토브!” “good!” “좋아!”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날마다’ 보시기에 ‘좋은’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의 창조가 천지 창조의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천지 창조는 ‘쉼’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까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 안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쉼이 창조의 완성입니다. 일하시는 하나님. 그 노동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신성성(神聖性)은 쉼으로만 빛이 납니다. 

 

그래서 그분은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모든 일을 다 마침으로 거룩케 된 날의 복된 안식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젖먹이의 배를 한껏 채워 주신 어미 된 심령으로 안식하시며, 허기진 배를 가득 채운 영아(嬰兒) 같은 우리에게 “이젠 됐어!(good) 잘 자, 푹 자”라고 말씀하신 새근새근한 안식(安息)으로 말입니다. 

 

자본주의는 시간이 돈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단잠은 살 수 없음을 사람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쉼 없는 노동이 없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여, 우리나라 노사(勞使)도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하여, 실행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만 안식하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안식하심으로 그의 피조물인 천하 만물이 다함께 안식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자연 만물의 청지기인 사람이 안식은 인간들만이 누릴 특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여, 동굴 속에서 잠자고 있는 박쥐의 단잠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 결과 박쥐들에게 역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코로나19 전염병입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도 안 됩니다. 이는 창조 질서를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만물이 안식을 누려야 지구의 안녕과 평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라고 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일만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큰 풍랑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토막잠을 즐겨 주무(막4:37,38)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빈들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무리를 흩으시고 홀로 뭍에 계셨습니다.(막6:45~47)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던 공적 생애 3년여 동안 인류 구원을 위한 많은 일을 행하셨지만,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보와 술꾼들의 친구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놀 줄 알며, 즐거워할 때와 슬퍼할 때를 아신 완벽하고 조화로운 삶의 모본이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먹보와 술꾼들과 어울리셨다는 말은 예수께서는 함께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셨고, 그분이 계신 곳은 항상 웃음과 기쁨과 평안과 풍성한 잔치가 배설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참된 안식이 예수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너무도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반드시 어느 한 순간 조용히 다시 자신의 침묵의 성소로 돌아오셨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안식을 위한 기도와 쉼을 가지셨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11:17).”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내 집은 기도하는 즉 안식하는 집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분주하게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갇혀 있는 현실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그동안 우리는 경주마처럼 시간을 역류하면서 앞만 보고 뛰어왔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답답하고 힘듭니다. 우리 이 기간 동안에 내 영혼의 안식을 위해 깊이 침잠(沈潛)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예화의 출처나 작가의 종교 여부를 떠나서 여기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원주민의 발화와 영감에 귀 기울여 봅시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기 아프리카를 탐험한 유럽인들의 경험담입니다. 이 이야기는 회교 신비주의 수행자인 ‘수피’의 우화에 실려 있습니다.

 

한 탐험가가 밀림을 뚫고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짐을 운반해줄 세 사람의 원주민을 고용했습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서둘러서 밀림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짐꾼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더 움직이려하지 않았습니다. 탐험가는 잔뜩 화를 내며 예정된 날짜, 시간까지 목적지에 꼭 도착해야 한다며 짐꾼들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주민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탐험가는 원주민 한 사람을 붙들고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지금껏 잘 오다가 갑자기 주저앉은 이유가 뭐냐’고. 그랬더니 그 원주민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곳까지 제대로 쉬지도 않고 빨리 왔습니다. 우리는 영혼이 우리를 따라 올 시간을 주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려야 합니다.”(법정).〉 

 

내 영혼이 내 육신을 따라 오고 있습니까?

내 영혼이 내 육신과 함께 가고 있습니까?

 

묵상/ 노동의 완성은 쉼에 있음에 대해 묵상하기.

적용/ 내 영혼이 내 육신을 따라 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 지금 여기 잠시 멈추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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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3(새) 57(통) 즐겁게 안식할 날

 

1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

내 맘을 편케 하니 즐겁고 기쁜 날

이 날에 천하만민 다 보좌 앞에서

참 되신 삼위일체 다 찬송부르네

 

2

이 날에 하늘에서 새 양식 내리네

성회로 모이라고 종소리 울리네

복음의 밝은 빛은 온 세상 비치며

또 영생 물이 흘러 시원케 하시네

 

3

이 주일 지킴으로 새 은혜 입어서

영원히 쉬는 곳에 다 올라갑시다

성부께 찬미 하고 성자와 또 성령

참되신 삼위일체 다 찬송 부르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