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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2: 위기?

2021.06.03 11:07

관리자 조회 수:11

4002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 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 공백기간에 매우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나는 것이다.”-안토니오 그람시(옥중수고)-  

 

몇 달째 몸 무게가 확연하게 줄고 있다. 일생 1kg도 쉬 늘거나, 줄어든 적이 없었는데 무려4kg 정도 몸무게가 줄었다. 위장 장애 탓인가? 아님. 이 아침에도 비는 추적추적 나리고, 남편 목사님을 작년에 돌연 먼저 보냈다는 고향 어린(?) 후배 김선아 사모의 뜻밖의 메신저를 접했다.  

 

그람시의 진단처럼 위기란 낡은 것이 죽어가는 자리에 새 희망이 움틀 수 없는 다양한 병적 징후라고 한다면, 이 하루의 시작이나 끝이 병적이지 않아야 낡아가는 것을 대체할 희망을 싹 틔울 수 있다함이 아닐까? 하여, 내가 새벽마다 밝히는 생명의 말씀, 그 말씀이 낡아가는 것들을 새롭게할 유일한 권능이리라. 

 

“주님, 밤에도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나는) 주의 법을 지킵니다(시119:55).” 칠흑 같이 어두운 밤길에 날마다 시골 예배당을 향해 걷고 걸었던, 내 육체가 다 망가졌던 청년 집사 시절에도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시119:105)”이셨으니, 말씀만이 살리는 생명, 그 참이다. 이제 다 저문 밤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는 말씀이 내 심령 안에 거하기에 위기는 위기일 수 없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1,12).”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는 너/타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을 선사한다. 사명 다하고 서둘러 본향으로 간 가득찬교회 최재식 목사가 받아누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그 성소는 그 희망의 복음이 가득찬교회가 되리라 믿는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드뎌, 오늘 낮 12시에 코로나19 백신을 맞는다. 감사하다. 아스트라제네카. 나 아(我)를 위해서 만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도 맞는다. 아(我)스트라제네카 이자 <너/彼>스트라제네카이다. 피아(彼我) 구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준 코로나19의 위력/감화력이 공동체 연대 의식을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코로나19가 역설적으로 네 안전이 내 안전인 인간 띠다. 

 

어제는 청량했다. 오전 횃불 목회 리부트 수강과 조장 화상회의를 맛나게 끝낸 후, 오후 아내와 나선 드라이브 코스는 포천 고모리 호수 공원에서 철원 동송읍까지였다. 절친 상록파 대부를 앞세워 삼팔선을 오갔다. 한껏 고즈넉한 삼팔 접경 지대에 거하는 작가들이 우거하는 중심이나 변방 된 한탄강의 예술혼은 비무장한 총총한 밤별이었다. 그 어디매든 보다 더 나은 삶을 구축하려는 열정과 패기로 밤을 뜬눈으로 밝히는 이들이 살아 생동하고 있었다. 한탄강의 작가 이경옥 사진 갤러리에서 북녘 마을 사람들의 막연한 삶의 적막을 깨뜨리는 드높은 기개를 엿볼 수 있었다. 살아 있어 감사했다. 이경옥 작가 사진 갤러리에서 차 한 잔의 여유로 망중한을 즐기다가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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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질긴 빗소리도 즐건 아침이다.

 

2021.06.0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