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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금빛 책망

2008.08.24 20:45

김성찬 조회 수:816 추천:22

영혼일기 44: 금빛 책망

2008.08.24(주일)




설교는 퍼즐 같다. 설교라는 하나의 완성된 조합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숱한 조각들이 동원된다. 퍼즐이 조각의 수나, 그 모양의 다양성에 따라 난이도 차이가 크듯, 설교 또한 그 구성을 위한 자료들의 다양성에 따라 그 품격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의 다양성이 아니라 일관성이다. 한 주제를 디테일하게, 즉 세밀하게 묘사해 내는(파고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말씀을 잘 쪼갠다는 말이 그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핵심주제를 주제되게 하는 단순성의 반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자가 한 주제를 잘 쪼개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낼지라도, 회중들은 그 설교 퍼즐 조각 모양 중 어느 하나를 택해 자기 것 삼는 경우가 태반이다. 여기서 자기 것 삼았다는 말은 그 조각에 감동을 받았거나, 걸려 넘어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설교의 피드백을 받아보면, 그 감동 감화가 천태만상이다. 그리고 회중이 걸려 넘어지는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설교는 보편적 진리를 객관적으로 설파해야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주관적이고, 그 설교를 듣는 청중이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설교도 객관적일 수 없다. 물을 담은 그릇에 따라 그 물모양이 변하듯 말이다. 설교라는 한편의 난해한 퍼즐 맞추기가 대체로 장님들 코끼리 만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요즘 오후 찬양예배 시간에, 우린 오전예배 설교를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타임을 갖고 있다.

내가 놀라는 것은 그들의 피드백이 내가 전한 주제와 너무나 동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십 중 한, 둘 정도 주제에 걸 맞는 말씀적용을 한다. 전혀 설교와는 무관한 자기 현실에서 출발하고, 어떤 이들은 그 설교 본문을 다시 강해하고, 그나마 몇몇 회중들은 그 설교 중 자신에게 부딪힌 퍼즐의 단편을 전체인양 해석해대곤 한다. 이런 식이라서 교수학습 평가이론으로 재단하자면 그 수업은 낙제점이다. 물론 중언부언하는 설교자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듣는 회중들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 암튼 그런 피드백을 듣고 있는 내 자신이 종종 안타깝다.


설교의 극약 같은 것이 있다.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그런 것.


먼저, 설교자의 억양이 그 중 하나다. 설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투리를 사용하라는 말이 있다. 그것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였다. 그 사투리는 다양한 회중들에게 각기 자신들의 언어로 들려진 신통력을 지녔었다. 그것이 방언이다. 그러나 삼국시대를 거친 우리네는 억양이 설교의 호불호를 결정하는 극약이다. 이 억양은 설교내용과 관계없이 마음의 열고 닫는 마스터 키 다. 악령이 그 문지기다.

대제사장 무리에게 붙잡혀 가신 예수의 흔적을 쫓던 베드로에게 그 십자가의 원수들은,

네 억양이 너를 표명한다(마26:73)라고 시비를 걸지 않았던가? 

그렇다. 이런 억양시비는 십자가의 적들의 몫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이런 열혈당원들이 득시글하다.


둘, 설교자가 양념으로 내뱉은 정치성 깃든 퍼즐 조각 하나가 설교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거기엔 설교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감정이 이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만인이 정치에 깊숙이 관여된 판국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정치성 깃든 퍼즐 한 조각에 대한 회중의 평가에 따라 설교의 호불호가 결정된다.


주변 목회자들에 의하면, 촛불 문화제로 표현하느냐 아니면 촛불 시위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회중의 반응이 두 쪽으로 쫙 갈라진다고 한다. 거기다 더해 대통령 이름 석 자를 호명함에 있어 어떤 뉘앙스를 풍기느냐에 따라 교회 출석여부까지 결정된다는 거다. 그래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다. 이 땅 교회 모든 설교자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극히 그런 표현을 자제하려 애쓴다. 그러나 설교가 계몽적인 면이 있기에 우린 그 어느 한편에 설 때가 있다. 더군다나 사회 지도층 인사인 목회자는 말씀에 비추어 세상을 판단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오늘은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올림픽 열기가 덮어버린 각종 시시비비에 대한 이야기 끝에 현 대통령을 한마디 거론했다. 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말 걸어오심을 정략으로 이용하지 말고,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자기성찰의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양념을 쳤다. 갑자기 회중들 중 일부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


피드백 시간에 한 권사님께서 이런 결과가 자신의 기도의 응답이라고 간증했다.

기독교 장로이신 이명박 대통령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요 은혜라고 그분은 말했다.

좀 길었다.

사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설교자가 분별력을 가지라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구국의 결의를 그렇게 표명했다.


그 간증 이후 난 한마디 했다.


그 다시 기적으로 말 걸어오심에 대하여,
그 깊으신 하나님의 금메달로 꾸짖는, 그 금빛 책망의 의미를,

왜 쿠바를 이기게 하셨으며, 올림픽 7강의 대열에 서게 하셨는가를

그 선진 사회의 당당한 일원되게 하셨는가를

곰곰이 헤아려 보라고.


그분은 떨떠름해 했다.


말씀 적용의 시간이 급속히 냉랭해져 버렸다.


그들은 이 올림픽 승리의 열기를 몰아 절대적 통합몰이를 시도하려하는 듯하다.
방송도 장악하고, 시위대들도 죄다 붙잡아 들이고.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 파시즘적 통합이다. 그 어떤 목적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그런 통합 말이다. 그러나 어떠한 타자도 아무 것도 아니어서는 안 된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에 의하면,

고문당하는 자가 비명을 지를 권한을 지니듯이, 끊임없는 괴로움(Leiden)은 표현의 권리를 지닌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쓸 수 없으리라고 한 말은 잘못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시도 쓸 수 있어야 하고, 그 누구도 아무 것도 아니어서는 안 된다.

촛불도 밝힐 수 있어야 하고, 방송사 사장도 임기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베이징에서 금빛 투혼을 발휘한 이들의 땀과 눈물을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이다.

관용, 배려, 인내, 믿음, 투혼, 튼실한 팀웤, 공동의 언어, 공동의 기억.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정치로 이룰 수 없는,

그 금빛을 바래게 해서는 안 된다.


오늘 내 설교의 주제가 이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