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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바통 터치

2008.08.28 19:37

김성찬 조회 수:1504 추천:27

영혼일기 47: 바통 터치.

2008.08.28(목).



말씀을 편다.
마가복음 1장 14-15절이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마가1:14).


예수의 등장은 요한이 잡힌 후, 였다.

난 생각해본다.
만일 세례요한이 잡히지 않고, 살아 역사했다면, 예수의 공생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런 If, 는 분명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는 요한은 분명히 내 뒤에 오시는 자의 길을 예비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갇혀야, 내가 죽어야, 그때에야 비로소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난 내 사명의 바통을 온전히 넘겨 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난 가로막고 서있다.

내안에 들끓는 온갖 잡소리에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고 있다.

내안의 주의주장이 전파방해의 근인(根因)이다.


오늘도 이성우 형제가 ‘안전망’이라는,

내 주는 반석이시니 그곳은 안전 하도다 ♫
모든 것 주께 내어 맡기는 기도에 대한 그 아픈 희열을 글로 올렸다.
그 가난은 그래서 그에게 축복이다.


그러나 내 가난은 불행이다.

난 그분께 그 짐을 넘겨 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집, 아집, 자존심 그리고 너무도 빠른 머리 회전.


그랬다.
그 신기에 가까운 바통 터치를 원숙하게 해내던 세계적인 계주 팀들-미국 남과 여, 자메이카 여자 등,

그들은 그 시험대, 바통 터치에 실패해 우승에서 스스로 멀어져갔다.

슬로비디오로 판독해 본 내 결론은 그들이 너무 빨랐다는 사실이다.
너무 빨라 그들은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발 빨라서 망한 족속들. 발이 급해 맘 놓친 이들.

광야 인생들은 그렇게 그 광야에서 스러져 갔다.

발 빠르다는 말은 인내가 없다는 말이고, 욕심이 앞선 다는 거다.

성실한 과정보다 탐스런 열매만 바라는 그 눈빛, 게슴츠레하다. 
경기 중 좀 앞섰다고 우승을 예감하면 실패한다고 선수들은 말했다.
그 유혹이 가장 무섭다는 거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그러나 정말 하나님은 느리다.


그래, 유혹은 빠르나, 사랑은 느린 거다.

우리 그 사랑에 기대지 않고, 유혹에 몸을 내던진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하나님은 느리다. 그래,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도록 원하시는 그 깊은 사랑으로 늦다. 그러나 실상 그 크고, 깊은 사랑을 자신만을, 자신의 대(代), 자신의 민족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여기는 선민들의 눈에는 참으로 늦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은 느린 분이 아니다(The Lord isn't slow). 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The Lord isn't slow about keeping his promises, as some people think he is.

In fact, God is patient, because he wants everyone to turn from sin and no one to be lost.


그렇다.
그 사랑의 느림은,
때가 찬 경륜으로,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모두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 1:15).


때가 찬 하늘 우리 아버지의 그 심오한 사랑의 경륜을 위하여,
때를 알 수 없는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자신의 역할 한계를 깨닫고,
오늘 이 자리가 내게 허락하신 계주 구역인 것을 알아 결승 테이프만을 끊으려고 덤비지 말고, 그 때를 위한 도상의 주자임 만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며, 최선 다 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를 이어 그 충성을 이어가야만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엘리사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 디모데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 자녀 손의 하나님.

 

정통 유대인들은, 그 수 천 년 피골이 상접한 타향살이에서 그들을 이용하고, 농락하는 이들의 핍박을 순순히 저항 없이 받아 들였단다. 그 때가 차기를 희원하며, 저항 없이 그 살육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그 긴(너무 기다려 기린처럼)  모가지를 그 때가 찬 경륜에 떨어뜨렸다.

그렇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그 십자가에, 내 긴 욕망의 모가지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바통을 떨어뜨리지 말고.
터치, 터치, 터치.

결국 맘 급한 자메이카 여자 계주 팀이 무너져 내린 결승 경기에서

느린 러시아가 완벽한 트리플 터치로 금메달을 목에 건 것처럼.

터치, 터치, 터치.


이 사명을 이어가리.

성령님께 내 바통을 이젠 넘겨드리고.

 

난 지켜보리.

그분의 최후 승리를.

 

이젠,

담담히, 믿음으로.

  

그 때를 채울

구속사의 징검다리 되어

묵묵히
밟혀 빛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