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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몸살

2008.09.03 23:50

김성찬 조회 수:1053 추천:22

영혼 일기 53: 몸살

2008.09.03(수)

 

 

오늘 온종일 몸살풀이를 했다.
잠자던 근육과 신경망이 깨어나며 몸살이 왔다.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는 생명의 탄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왕 초보 바이크 라이더가 남북 왕복 무려 30여 km를 오갔고,

도합 네 시간여 러시아워 전철로 이동했던 사역이 겹쳤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늦은 밤 지쳐 무너져 내린 육신을 내던져,
그 누군가의 아픔에 귀를 기우려 주어야만 했다. 

그는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난, 약이라도 져먹었지만, 그는 밥 한술도 넘기지 못했을 거다.

그는 못 위에 잠을 청했을 거다.


간당간당한 삶.

사명을 공유하지 못한 생은 지옥이다.

어제 영혼일기의 주인공처럼,
바람과 맞서는 킬리만자로의 사자처럼,

그는 이제라도 홀로 그 산정에 오르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목회적 지향점이 다른 이인삼각이 너무도 힘에 겨웠었다며.   


허나 내가 보기엔 그건 허망한 다짐이다.

그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인삼각 없는 목회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덫이 되어 넘어져 깨질지라도,
함께 하지 않으면 허용되지 않는 위선이 바로 목회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목적으로 헌신했던, 그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마가복음 1장 16절 이하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이 나온다.

시몬과 안드레 형제와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주의 말씀에 그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 낚는 어부라는 말씀의 그 깊은 의미를 그땐 알 까닭이 없었을 거다.

그들은 욕망을 투자했을 뿐이다. 즉시, 가족과 배를 버리고 떠날 만큼, 그들은 예수 따라가면 단단히 팔자를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고기나 잡다가 예수 따라가면 사람 경영하는 고급스런 직업을 얻게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목적을 예수의 목적으로 이끄셨다.

목적의 목적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우리가 그 어떤 동기나,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사명자의 길에 나섰건, 그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 사탕 얻어먹으러 온 아이도, 예쁜 여자애 만나러 왔던 소년도 종국엔 그 목적의 목적으로 이끄시는 주의 사명자로 세우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목회적 사명과는 거리가 먼 결혼이었을지라도, 남편으로만 족하다 여긴 목회자와 결혼했을지라도, 결혼생활 도중에 동의도 제대로 구하지 않고, 그 남편이나 아내가 목회적 사명의 길로 접어들었을지라도, 내 의도와 달리 내가 이인삼각, 둘이 한몸되어 짊어져야 할 그 사명에 매인 바 되었다면, 우린 내 목적을 뛰어 넘는 그분의 목적을 위해 헌신할 수밖에 없다. 그 길은 곁눈질이 불가능한 외길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은 험난하다. 세상적 출세를 바라고 예수께 그 욕망을 투자했던 제자들은 채, 3년도 넘기지 못하고 국사범의 동지로 전락하여 수배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종국엔 모두 다 순교를 당했다. 그 목적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섭리를 따라. 


물론 한 때, 열광적인 청중의 환호에 묻히기도 했지만, 그들의 최후는 순교의 쓴 잔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를 포함한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나를 부르신 그분의 본질적인 목적과는 무관한 목표를 설정해 놓고 뜀박질을 하고 있다. 그리곤 사람위에 군림함으로 그 목표를 이룬 듯 착각하며 으스대거나, 미달했다고 낙담하여 가룟인 유다처럼 예수를 은전에 팔아 치우고 있다.


몸살. 그 목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린 반드시 몸살을 앓아야만 한다. 그 과정에 꼭 험산준령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그 사명의 길에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 살 소망까지 끊어진(고후1:8) 혹독한 몸살을 앓았다. 그리곤 끝내 그 몸살을 목숨과 바꾸었다. 그것이 영광스런 순교였고, 그 부르신 목적이었다. 죽어 열매 맺는,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고후1:6).


그러나 몸살 중의 몸살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이브라는 늑골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은 벗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내 가슴에 파고 든 그 늑골은 벗어내 버릴 수가 없다. 쑤시고, 아파도, 반드시 끌어안고 가야 할 생명이요, 사명이다. 그는 아파했다. 늑골이 탈출을 시도하고 있단다. 너무 힘들어서, 너무 자신이 가련해서 그의 늑골이 독립을 선언했단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보건, 환경적으로, 목회는 물론 인간 자체가 총체적으로 부실하고 무능한 그는 이젠 버림을 받은 영혼이 되었다. 그는 탁발승이자, 노숙자로 전락해야만 한다.


난 그를 붙들었다. 죽지만 말아 달라고, 간판만 내리지 말아 달라고. 이 폭풍우를 잠시만 피해 보라고. 사람들 눈치, 호사가들의 빈말 다 무시해 버리라고. 그래서 어쨌다는거냐,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내 갈길 간다. 소리치며 호기롭게 살자고. 사이렌의 유혹 속에 귀 막고, 에게 해를 건너던 오디세우스처럼, 눈 귀 막고 앞만 향해 질주해 보자고. 이것이 터닝 포인트일 수 있다고. 혹독한 몸살의 막장이라고. 죽어야 다시 사는 순교의 길이라고. 주절주절 그를 다독거렸다. 그는 어둠 속으로 말없이 사라져 갔다.


이 지독한 몸살!

 

난 그의 등 뒤에다 소리쳐댔다.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