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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투신(投身)

2008.09.04 23:44

김성찬 조회 수:1026 추천:19

영혼 일기 54: 투신(投身)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상호 작용의 수단을 우리는 미디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미디어의 중요성에 대해, 마샬 맥루한(McLuhan)은 "미디어가 메시지‘라 말했다.
보도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언론매체들의 오만이 섬뜩한 현실인 것은, 그의 지적대로 미디어가 곧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래, 미디어 없이 메시지는 없다. 다시 말해 미디어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상호간에 정보와 지식, 감정과 의사를 교환하고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다.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그런데 그 의사소통은 그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약속된 체계를 따를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약속에 의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때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만일 그 합의된 약속을 깨뜨리고 그 누가 아버지를 Father이라 부른다면 사회는 일순 먹통이 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약속의 체계를 우리는 문화라 부른다. 그래서 아버지를 Father로 발음하는 동네는 타문화권이다. 그런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동네에 함께 살면서도, 우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세상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이 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며, 또 인간 사회가 형성 유지 발전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그 의사소통에 우린 실패한 것이다.


하여 우린, 이제 그 매체가 우리네 것이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특별한 그네들은 그 미디어를 독점하고, 일방통행식 메시지만을 전달해 왔다. 이제 우리가 그들이라 부르는 그들은, 자기네 집단의 정치적 이익과 주의주장만을 관철시키는 편파적인 도구로 그 신문매체를 전락시켜 버렸다. 성결동산에 바벨탑의 저주가 내리고 있다. 그래 정치권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네 동네에도 소통부재가 이젠 극에 달했다. 우리는 서로가 타인이 되어버렸다.    


우리 안에서 타 문화권에 내던져진듯한 이 문화적 단절.

난 이미 그 쓴맛을 톡톡히 봤다.

너무 오래된 과거라 이젠 의식도 되지 않는, 나완 무관한 듯한 문화적 내침을 받고 살아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깃털이 다른 새라고 날 견제한 것이다. 억양이 다르다고. 그 억양이 그 희생양된 표지였다. 능력과 전문성과 인품과 헌신도와는 별개로. 아니 내가 유독 눈에 띠어서 그 시기심으로 그들은 날 의도적으로 견제해왔다. 그러나 나야 뭐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럴수도 있다지만, 그 신문은 지난 한해 그 발행인에게까지 태클에 태클을 걸어왔었다. 자기네 정치적 집단이익을 위해서. 그들의 병든 영성은 이렇게 그릇된 패거리문화를 성결동산에 노골화시켰다. 

 

문제는 그들의 병든 영성이다. 그런 영성으로 교회의 메신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허물과 병인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더해 그들은 오만하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은 자신들의 매체만이 성결동산에서 유일한 매스미디어라 착각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 오만에 더해, 그들은 무지하다.

문화라는 것이 절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동시에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그들은 모른다.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대중문화는 그 가변적 문화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여, 왜곡된 언론문화를 바로 잡으려는 새론 문화적 시도가 우리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

성결을 성결이라 부르고, 일치를 일치라 부르는,

발가벗은 임금님을 발가벗은 임금이라 부르는 약속의 체계를 재정립할 언론문화를 위해.


난 오늘, 이 새로운 문화변혁에 몸을 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