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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이겨낼,

말씀 한 모금-에덴 이야기 (30) 2020.04.21.(화)

 

인간의 타락 6 – 치장/이미지

 

찬송/ 259(새) 193(통)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말씀/ 창세기 3장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

Then the eyes of both of them were opened, and they realized they were naked; so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coverings for themselves.3:7)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창2:25)”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유 의지를 악용해 사람 이상이 되고자 한 이후,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던 상태에서 그들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 했습니다.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이 정직하고, 완벽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했습니다. 

 

하와가 치장을 합니다. 무화과나무 잎 치마로 치장을 합니다. 하와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치장합니다. 수치심을 치장합니다. 수치심을 치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치장함으로 수치심입니다. 

 

우리나라는 성형 공화국입니다. Before & After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끊임 없이 자신을 치장해대다가 그만 자신의 본연의 얼굴을 잃어, 생긴대로의 개성을 상실한 연예인이 그만 설 자리를 잃었다는 씁쓸한 기사도 대합니다. 좀 별나 보여도 그 원판 특징이 고유한 캐릭터여서 조연으로라도 더러 캐스팅 되곤 했었는데, 천편일률적인 After 미인으로 치장하자, 그만 고유한 자신의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치장은 패션입니다. 팔색조처럼 바뀌는 게 패션이요, 치장입니다. 어제 월요일 아침 나는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TV 다시보기를 서핑하다가 ‘놀면 뭐해’라는 프로그램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송가인이 나오는 회차를 클릭했습니다. 송가인과 유산슬이 무슨 신곡을 발표하는 프로였습니다. 듀엣으로 신곡을 부른 후, 송가인이 홀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중, 유산슬이 “부르는 노래가 다 정통 트롯이네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류희열이 “안 움직이잖아!”라는 단발 멘트를 날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정통은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인류 원조 패션은 ‘안 움직이는 것=안 바꾸는 것’입니다. 맨살이 좋았습니다. 벌거벗었느나 부끄러움을 몰라 그 무엇으로도 치장하지 않는 것이, 정통입니다. 자기애로 당당함 그 자체가 정통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인간 이상이 되어보려고, 빚어진 원판 이상이 되어 보려고, 치장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세련된 용어 이미지 메이킹에 사람들은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미지스트 중의 이미지스트는 현대인들이 추앙하는 ‘스타’입니다.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은 그의 저서 『이미지』에서 “스타란 의사사건(pseudo-event)이다”라고 말합니다. 의사사건(pseudo-event)이란 가짜다, 거짓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 정의를 리차드 다이어(Richard Dyer)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스타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 의미는 비어있다. 따라서 스타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지 어떤 재능이나 특정한 자질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용모상 사소한 차이를 기반으로 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유명인의 본보기다.”

 

이미지스트인 스타란 ‘비어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비어 있음으로 팔색조로 자신을 치장합니다. 이미지로 착색한 스타는 자신의 참 모습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여, 자신 아닌 그 무엇으로 꾸미고, 또 꾸며 나갑니다. 결국 거짓 자아로 살아갑니다. 자기 아닌 자기로 살아가는 운명에 처합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른 자신이 자신을 속일 때, 스타는 스스로 그 가짜인 이미지의 막장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맙니다.

 

레오 로웬달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이성을 완벽하게 발휘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천재들, 홉스, 루소 같은 사상가, 니체, 칸트와 같은 철학자,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와 같은 창조적인 예술가,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학가, 뉴턴이나 에디슨 같은 과학자들을 ‘생산적 우상들(idols of production)’이라고 명명했다. 이런 과거의 우상들이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위대함과 천재적인 능력으로 인한 불멸의 영웅이라면, 

 

<현대의 우상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존재로서 명멸하는 스타들이다. 그래서 현대의 우상들은 소모적이며 명멸하는 순간적인 존재이다>.”

 

현대사회에서 매스미디어를 통한 문화산업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첨병과 같은 존재로서 로웬달이 말하는 소비적 우상들(idols of consumption)을 생산해 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눈 앞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이미지스트들은 소모적이며, 명멸하는 순간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런 인위적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와 같은 소비적 우상들을 우리는 소비하는 쾌락으로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말세지말인 오늘 우리는 하나님까지 소비합니다. 하나님 같이 되어보려는 인간 심리를 유명인사에게 투사하여 그 소비적 우상들을 갓ㅇㅇ, ㅇ느님이라 부르며 사람의 하나님 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비어 있음으로 공허한 인간 심리는 이제 함부로 하나님까지 소비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소비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인류를 치장하는 참람함을 우리는 여전히 희희낙락 즐겨 범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이 부끄러워진 사람들은 일생 자기 아닌 것으로 치장하며 살아야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그 무언가로 자신을 꾸미려고 사람인 우리는 우리네 평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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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예수 다시 올 때 그대는 영접할 예복이 있는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묵상/ 내 일생을 허비하고 있는 나의 치장술에 대해 묵상하기

적용/ 나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는 무엇입니까? 나는 오늘 무엇으로 나를 치장하고 있습니까? 주님 예수 다시 올 때 그대는 영접할 예복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