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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2021.07.07(수) 오후7시  

 

묻습니다. 

사슴의 보배는 무엇입니까? 곰의 보배는? 영국인의 보배는? 한국인의 보배는?

신자의 보배는? 

 

묻습니다. 

이미 있었기에 오늘도 있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믿음이 신길교회 성도 여러분 각자에게 있습니까? 마리아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믿는 믿음이 여러분 각자에게 있습니까?

물론, 그런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실상이 인본주의적인 자기 신념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다음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사건의 주인공 마리아의 믿음을 통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 믿음은 이렇습니다. 

 

하나, 말씀에 순종하여 믿는 믿음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둘, 그 순종하여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 감화감동하게 하심으로(by God) 믿지 않을 수 없는,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수동태의 믿음입니다. 신적 수동태입니다. 

 

믿음의 확증을 찾아 나선 마리아. 믿음이 아니라 믿음 이전에 있었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듣게 된 믿음을 믿음 되게 할 단서가 되는 말씀.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가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럼,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느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5~37).“ 

 

그 말씀의 확증을 찾아서 150km나 뛰어간 마리아에게 엔 케렘 우물가에서 그녀를 만나자마자 사촌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예상 밖의 말씀  

 

“아니, 너 마리아 아니냐? 혼인을 앞둔 처녀가 웬일로 여기까지?” 

이렇게 반문했어야 마땅할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그 믿음/그 말씀을 확증하게 된 마리아.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눅1:43,44)”는 뜻밖의 말씀을 듣게 된다. 순간 그녀의 순종하여 믿은 믿음이 믿어지지 않을 수 없는 말씀의 확증, 즉 믿어지는 믿음을 마리아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얻게 된다.  

 

묻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믿어지는 믿음을 소유한 신자입니까?

 

마리아가 나사렛을 떠나 엔 케렘까지 찾아 나선 믿음의 확증이란, 결과적으로 믿어지는 믿음의 확증을 찾아 나선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 제목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믿어지는 믿음의 확증을 찾아서,입니다. 아니, 말씀의 확증을 찾아서,입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이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눅1:36)라는 단 한 줄 말씀의 확증을 찾아 나선 마리아에게 성령께서는 믿어지는 믿음을 선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그 믿어지는 말씀의 확증에 감읍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절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절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리로다(눅1:46~50).”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말씀의 확증을 찾아 나선 여정입니다. 이 시간 우리도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처럼 내게 언약하신 주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확증의 밤이 되길 간구합니다. 

 

마리아 같은 말씀의 확증, 믿어지는 은혜를 선사받은 이들이 교회를 이루어 왔습니다. 우리 기독 신앙은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널리 알려진 예를 들어 봅니다.

예) 하나, 엔돌핀 박사 이상구 박사

고교 시절 노아가 950살이나 살았다는 창세기 9:29절 말씀 거부, 비난, 박해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창9:28)

미국에서 의사로 동기 중에서도 벤츠를 제일로 먼저 살만큼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세상 부귀영화를 못 누리고 죽게 되면 어떡하나,라는 공포와 우울증이 덥벼들어 거반 죽어가다가, 어느 목사가 주고 간 성경을 펼치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자신에게 나타내 보여보라고 시한부 시험을 하다가, 다시 편 말씀이 창세기9장 29절이었다고 한다. 노아가 그의 나이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근데 성경책을 내던지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믿어지는 믿음이 임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의사, 동정녀 탄생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국내 유수한 의과대학을 거쳐서 미 브라운 대 의료 연구원까지 되었던 분이 한국 음식 먹으러 따라간 한인교회에서 말씀을 듣다가 자신의 의학적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 전능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신적 수동태에 의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믿어지는 믿음이 임했고, 의사 직을 버리고 목회자가 되었다는 사례.

 

말씀의 확증을 찾아 나섰던, 지난 신길교회 성도들이 앞장 서서 보내 준, 2019년 11월 성지 순례를 통해서 어떤 목회자들은 무너져 내리던 목회적 사명을 회복했고, 듬성듬성 빠져나가던 소갈머리가 자신도 모른 사이에 다시 돋아나고, 위암 후유증으로 매일 밤 위통을 겪던 어느 신부는 성지순례 기간 중 잠깐 무릎을 꿇었던 기도처에서 낙뢰 같은 성령의 불을 받고난 후, 위통이 싹 사라졌다는 간증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성지 순례는 신앙 일생에 한 번 쯤은 해볼 만한 영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꼭 성지 순례를 가야만 믿어지는 믿음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무엇이 믿어지는 믿음을 바랍니까? 그 무엇은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지 순례란 말씀 순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확증을 찾는 일은 지금 여기서도 가능합니다. 우리 손 마다 말씀이 쥐어져 있지 않습니까?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을 성령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믿는 믿음이, 내가 하나님을 믿어주는 믿음이 아니라, 믿지 않을 수 없는, 믿어지는 믿음을 소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 앉아 계신 신자 분들 가운데 이렇게 저에게 반문하고 있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당신 김 목사는 마리아처럼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을 맛 본 적이 있냐?고 말입니다.

네, 저는 그 언약이 믿어지는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청년 시절 중병에 시달렸었습니다. 발병 초기 나는 병원엘 갔습니다. 나의 주치의는 내 중학생 시절 내가 다니던 교회 장로님이셨던 차우균 외과 의사셨습니다. 그분은 그 바쁜 업무 중에 몸은 물론이고, 맘까지 병든 나를 붙들고, 이런 조언해 주셨다. 

 

성찬아, 서울에 있는 대학 못 다니게 된 것 때문에, 너무 맘 상해하지 말아라. 나는 서울대 의대를 나왔고, 미국 유학도 다녀왔다. 미국에서 미국인 외과 의사들도 엄두를 내지 못한, 가망 없던 환자 수술을 내가 맡아서 멋지게 성공하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전도유망한 다 갖춘 젊은 의사였다. 그런 내가 아버님 병원(차남수 외과)을 대를 이어 맡느라, 목포로 내려 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친구들은 서울에서 큰 병원을 세우며, 나와 비교가 안 될 만큼 너무나도 잘 나가고 있다. 너무나도 부럽고, 아쉽지만, 나는 피할 수 없었던 내 선택이 선사한 긍정적인 면만을 바라보려고 노력 한단다. 그 선택으로 가업을 잇는 효도를 할 수 있었고, 신앙적으로도 작지만 큰 교회의 중직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오늘에 감사해 하고 있단다. 

 

네 병은 급성이고, 내가 특별 처방을 해줄 테니, 꼭 내 지시대로 따라라.

 

그런데, 나는 그분의 간곡한 전인 처방 요청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기괴하게도, 그 어떤 의사의 진단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의사들의 진단과 조언이 내 귀에 들리지 않은 게 아니라, 전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의사의 진단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이 나의 병든 영육을 귀신 같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불신에 꽉 붙잡히게 되면서, 나는 이 병원 저 병원 순례만 했을 뿐, 전혀 믿어지지 않던 의사의 처방에 전혀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이 깊어지면서 병원에도 더 이상 가지 않았고, 처방 약도 먹지 않았다. 결국 급성이 만성으로 전환 되면서, 갖은 질병이 함께 덤벼들어, 내 몸은 살 가망을 잃을 정도의 종합 병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신이 무섭습니다. 불신이 병을 키웁니다. 사태를 악화시킵니다. 하나님과 단절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불신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가랴입니다. 그가 제사장입니다. 그런 신분을 지닌 자가 말씀 앞에 불신으로 맞섭니다.

 

제사장 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납니다. 놀라며 무서워하는 사가랴에게 천사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언합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1:13~17).” 

 

그런데 뜻밖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제사장 사가랴가 불신의 언어를 토해 냅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눅1:18~23).“  

 

그 토해낸 불신의 언어로 제사장 사가랴는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단절 되고, 사람들과의 의견 교환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행여, 우리 가운데 기도가 막히고, 인간관계가 무너진 신자가 있습니까? 딱 2사람 있는 거 같아요. ㅎㅎ

 

그러나 정작 이 사태 속에서 중요한 것은, 제사장 사가랴가 믿지 않는다고 말씀이 무화 되지, 없었던 것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는 않아도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21:33).”

우리는 찬송합니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가기 까지는 늘 보호 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런 불신의 과정을 통해 나는 종합병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한의사는 나에게 서른 살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도 겁을 줬습니다. 온갖 몬도가네를 연출했으나 백약이 무료인 것처럼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병중에서도 CCC 나사렛은 하루에 두 시간 이상 기도해야 한다는 김준곤 목사님의 말씀 따라 매일 밤 근무지 학교에서 가까운 시골 예회당에 나아가서 꾸준히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 길가다가 구렁이도 만나고, 폭우가 쏟아지는 칠흑같이 어둔 진탕 길을 30여 분 걸어가야 하는 예배당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생활을 해 가던 어느 날, 예배당 마루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 내 병을 고쳐주실 약속의 말씀을 달라며 성경책을 들어 확 펼쳤습니다.  

 

       펴서 읽어라

       Tolle Lege!

 

성 어거스틴이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 가사! 펴서 읽어라(Tolle Lege)!라는 말을 하늘 명령으로 듣고, 펼친 성경. 어거스틴 회심케 한 유명한 한 줄 성구.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펴서 읽어라

      Tolle Lege! 

 

나는 눈을 감고 가슴에 품고 있던 성경을 쫙 펼쳤습니다.

 

여기서 잠깐, 

신길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여러분 개개인이 겪고 있는 죄의식에서, 병고에서, 제반 환란에서 벗어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제가 낭송하는 말씀이 믿어지는 은혜를 이 시간 여기에서 달라고 성령님께 함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확 펼쳤더니, 시편 103편이 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마루바닥인 시골 예배당 무릎 꿇고 있는 내 기도 자리에 까지 밝은 보름달 빛이 영창을 통해 환하게 비쳐왔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편1~5) 

 

할렐루야. 

시골 마루 교회당 영창으로 쏟아져 들어 와, 내 눈 앞에서 말씀을 밝힌 환한 달빛은, 성령의 조명이었습니다. 순간 확 펼쳐진 그 말씀이 확 믿어지는 놀라운 신비를 나는 체험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병에서 치유를 받았다는 믿음, 이미 받았다는 주의 언약이 굳데 믿어지는 믿음을 얻었습니다.   

 

그날이 을묘(乙卯)년, 1975년 10월 30일이었습니다.

하여, 그 다음날 나는 광주에서 출퇴근하는 동료 교사에게 한문 겸용 성경 한 권을 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받아 든 성경에 붉은 색연필로 믿어지는 확증을 다지는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을묘 시월 삼십날이라고 입력했습니다. 바로 이 성경책이 바로 그 증거물입니다. 

 

나는 말씀 안에 확신을 얻었고, 목회자로 헌신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쉽게 병마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150km 12세 소녀 마리아가 달려 간 시간만큼이나 병고는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내게 약속하신 언약이 믿어지는 믿음에 굳게 서 있었습니다. 

 

그 후 1979년 3월 어느 날입니다. 병약하셨던 故 이상훈 교수께서 가파른 학교 언덕길 100여 미터 등정이 그 육신으로 버거워, 그 언덕길 때문에 택시를 타고 출근하신다고 하셨던, 서울신대 교정 그 가파른 언덕길을 아침마다 호루라기를 불며 150여 명의 기숙사생들의 구보를 선도하고 있던 나를 발견했습니다. 내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의 언약이 믿어지는 믿음의 열매로 이젠 죽어도 여한 없는 장수의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부흥은 우리 신앙 선조들의 주의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2814M나 되는 헐몬산의 만년설이 녹아 땅으로 스며든 후, 100년이 지나면 터져 나와 목마른 사슴의 목을 축여주는 샘물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 신길교회도 그 믿음의 열매요, 그 말씀의 열매입니다.  

 

오늘 신길교회 수요기도회 설교를 준비하려고, 제 홈페이지에 신길교회를 입력해 봤더니 거의 80여 꼭지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일생 거의 매일 영혼일기를 써오고 있습니다. 2009년 7월16일 목요일 제주 서귀포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로 제주에 머물고 있던 저는 그곳에서 서울중앙지방회 지방회장 자격으로 신길교회 이신웅 담임 목사님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금요일 김포공항에서 빗속을 뚫고 와 신길교회 금요기도회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 한통의 전화로 신길교회와 저의 인연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한 필요가 없습니다만, 그 80여 꼭지의 글 속에는 이신웅 목사님의 원로추대와 이기용 담임목사 취임에 관한 세부 사항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길교회 담임 목사님이나 당회가 모른 행정적 비사가 가득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예지력이 강한 사람입니다. 중앙성결교회가 후임자 선정 건으로 1년 여 씨름을 하고 있을 때, 나는 한기채 목사가 온다 라고 예언했습니다. 근데 정말 한기채 목사가 그 교회 담임으로 부임해 왔습니다. 신길교회가 중앙지방회로 들어오는 산파역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당연히 잘 지어진 교회 후임 목회자로 누가 와야 할까, 더러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면식도 없는, 서산이라는 시골동네에서 청소년들을 전국에서 불러다가 밤을 새워가며 성령 집회를 하고 있는 젊은 목사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나는 알지도 못한 그분이 신길교회 후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했었습니다. 복음 진리 사수의 선봉장이신 이신웅 목사님 대를 이어야 할 신길교회 담임 목사는 우리 성결 부흥 복음의 전통을 잘 이어나가야 할 분이었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2016년 12월 29일 목요일 제가 신길교회 임시 당회장으로 지방회 인사부에서 결정 된 직후, 이신웅 목사님을 통해 후임자가 서산 이기용 목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제가 선임된 것 같은 벅찬 희열을 느꼈습니다.  

 

왜 설교 시간에 사람이야기를 하냐고 시비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저는 아부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 손바닥의 손금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허나 제가 설교하는 강단이 신길교회이고, 오늘 설교한 내용이 신길교회 성도들이 과부의 두 렙돈 같은 물질을 모아 무려 45명이나 되는 목회자 부부 성지 순례를 보내 준, 은혜에 보답하는 영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영감을 선두에 서서 불러일으켜준 분이 신길교회 담임 이기용 목사님과 박미선 사모님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미국에서 오늘 설교자인 저에게 전화를 넣어주셨습니다. 5월 한 달 동안 후배 목회자들에게 새벽 강단을 내어주는 헌신의 후유증으로 목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지난 성지 순례기간 중에 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9박 11일의 일정을 통해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회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직접 몸으로 두 분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성지에서까지 약한 체력 때문에 몇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도 함께한 목회자들의 두고 온 교회 성도들까지 돌보는 도움을 아끼지 않던 박미선 사모님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해서 내가 놀렸습니다. 박미선 사모가 시집을 잘 온 줄 알았는데, 이기용 목사가 장가를 잘 갔네. 이기용 목사님이 선선히 그렇다고 했습니다. 두 분 다 잘 만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 확장의 비전이 우리 목회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고, 공동의 비전화 되어가고 있음에 매우 기쁩니다. 

 

나눔으로 섬기는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팬데믹 시대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바가 되었지만, 이기용 목사 부부는 이미 그 비전을 뼈를 깎는 자기희생으로 행동화하고 있습니다. 이신웅 원로 목사님 부부와 성도들을 대표하는 박성철 원로 장로님 부부의 나눔으로 섬기는 삶을 이기용 담임 목사 부부는 신길교회 온 성도들과 더불어 이렇게 멋지게 꽃피우고 있습니다.  

 

이웃교회가 부흥하면 옆집 교회가 배가 아픈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길교회의 부흥을 우리는 함께 기도하며,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몸을 찢어 보여 주신 <너를 부요하게 한 나의 자원한 가난>을 행동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최후의 심판의 표준과 근거임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용 목사님의 장점 중의 하나는 타인의 장점을 그 깊은 눈으로 포착하여 그 장점을 극대화 시켜 주는 권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대표로 있는 목회자 서로돕기운동 연합 더조이유니언 선교회의 발족도, 이기용 목사님께서 저를 흔들어 깨웠기에 가능했습니다. 목회자 개개인 별로 보면 모두 다 유능하고, 갖춘 분들인데, 목회 현실에 갇혀서 움쩍달싹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서로 가진 목회적 달란트를 유무상통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창립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3년 어간 우리 선교회에서 100명의 목회자를 상호지지 격려하는 일을 해냈습니다.  

 

믿음은 강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불러일으키는 힘이 고등한 기독교 윤리와 기풍입니다. 성령의 감화감동하심으로 믿어지는 믿음을 소유한 우리 신길교회 성도들은, 불신 세상에 그 믿음을 불러일으켜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 한 가지, 그 분이 오신 목적,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복음적 비전을 이루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는 말씀을 생활화 합시다. 그리하여, 너를 부요하게 한 나의 자원한 가난을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강단과 신길교회 성도들을 통해 불신 사회에 믿어지게하는 역사가 차고넘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옵니다. 우리가 믿는 일에 온전해 지기 위해서는 절대로 말씀을 편식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말씀 되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앎입니다. Knowing the word. 

둘째, 말씀의 해석입니다. Interpreting the Word. 

셋째, 말씀의 생활화입니다. Living the Word.

넷째, 말씀의 행동화입니다. Doingthe Word. 

 

말씀이 믿어지게 하고, 믿어지는 믿음을 나타내 보여야 하는 교회는 반드시 마지막 단계 말씀의 행동화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저희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말씀이 달랐던 이유는 말씀의 앎/지식에만 머물렀던 서기관들의 가르침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요, 말씀의 사람입니다. 마리아처럼 믿음의 확증을 찾아서, 말씀의 확증을 찾아서 순례의 길을 나선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땅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런데 말씀이 말씀 되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앎입니다. Knowing the word. 

둘째, 말씀의 해석입니다. Interpreting the Word. 

셋째, 말씀의 생활화입니다. Living the Word.

넷째, 말씀의 행동화입니다. Doingthe Word. 

 

 

저는 과부의 두 렙돈 같은 물질로 목회자들에게 성지 순례를 보내 준 신길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보답을 할까, 출발하기 전부터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에게는 성지 순례 기간 내내 밤낮 없이 쏟아부어주신 영감 기록이 제 아이패드에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신길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지 순례를 통해 밟은 성지의 감촉과 부어주신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성경 말씀에 녹여서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이미 있었기에 오늘도 있는 그 믿음의 확증을 찾아서>>입니다. 그 구성을 일정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1부에서는 우리가 영적 나그네라는 본질적 정체성을 다지고, 2부에서는 다윗 언약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3부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오늘 설교 본문 예수의 동정녀 탄생부터 골로다 십자가까지 그리고 4부에서는 부활 없이 교회 없는 부활 증인공동체인 교회에 대해 정리했습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

다시 오늘 설교 주제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말씀 되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앎입니다. Knowing the word. 

둘째, 말씀의 해석입니다. Interpreting the Word. 

셋째, 말씀의 생활화입니다. Living the Word.

넷째, 말씀의 행동화입니다. Doingthe Word. 

 

 

      

 

또 묻습니다.

언약이 큽니까? 믿음이 큽니까? 

그 언약보다 더 큰 믿음은 없다. 이는 내가 만든 어록(?)입니다.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게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말씀보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결단이 위대하다는 착각 속에 우리는 빠져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나도 인본주의적인 자기 신념을 언약보다 더 큰 믿음인 양, 강조해 왔기 때문입니다. 해서, 지구상에서 믿음이 제일인 곳이 한국교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창세기12장 1~3절입니다. 아브람에게 너 집만 떠나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라는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음에는 3시제가 있습니다.

-과거 시제 요한복음 5장 24절 ……영생을 얻었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현재 시제 빌립보서 2장 12절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미래 구원 로마서 13장 11절 ……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13:11)

신길교회

중앙교회가 1년 여 후임 목사 선정을 해 나가던 시기, 내가 예언했습니다. 한기채 목사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