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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5: 산산조각

2019.08.09 08:10

관리자 조회 수:34

권순진 선생이

포스팅해 놓은 정호승 시인의 시 

<산산조각> 마지막 두 행이 눈에 든다. 

 

(전략)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이는 시적 상상력으로는 그렇게 넉넉하게 조각 난 삶에 기운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게 충격을 준 것은 권 선생의 시평 중에 인용한 법정 스님의 “종이 깨어져서 종소리가 깨어져도 종이다”라는 말씀이었다.

 

이는 

시적 상상력도, 

추상적 화두도도 아닌, 

 

깨진 삶도 온전한 삶이라는 

지극히 현실적 진단이라고 

순간 내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완벽주의가 완벽하게 무너뜨린 파편 된 삶조차 완벽한 삶이라는 말이다.

 

비 논리적이고, 비 과학적인 해석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말로 들렸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만,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는 있지만, 

산산조각난 채 살아가야만 하지만, 

 

산산조각을 

법정스님은 ‘완전체 종’이라고, 

“종이 깨어져서 종소리가 깨어져도 종이다”라고 진단하고 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김 없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예루살렘도 예루살렘이라는 말이다.

 

소리를 잃은 깨진 종은,

절대로 다시 종일 수 없다는

내 옹근 가치 판단을 확 흐뜨려 놓았다.

 

난해하다.

아니

양심상, 기질상 받아들이기 힘들다.

 

근데

더 잘 보수해서 원본보다 더 흥미로운 물건 되게 하는 <긴쓰기>*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망가진 그대로가 완전체라는 

이 화두가

왜 내게 복음처럼 들렸을꼬?

 

환청인가?

 

이아침에 

가슴 가득 차오르는 

이 낯선 자존감은 뭔가?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고 있다.

시방

 

2019.08.06(화) 오전8:38

 

* <긴쓰기>

 

일본 문화에서는 깨진 물건이 온전한 새 물건보다 더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보수 과정을 통해 그것이 더 흥미로운 물건으로 거듭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건을 고쳐 더 좋게 만드는 행위를 가리키는 긴쓰기(金継ぎ, 금으로 이음)라는 단어도 존재한다. 긴쓰기의 기원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자신이 사용하던 다기가 깨지자 중국에 보내 수선을 의뢰했다. 다기가 깨진 부분에 보기 싫은 철끈이 묶인 채 돌아오자 쇼군은 진노했다. 그러자 일본 장인들이 이음매에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혀 깨진 부분이 드러나게 다시 수선을 했다. 깨진 부분을 잇는 금박을 일종의 장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수선 방식이 자리를 잡자 쇼군들은 더 이상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았다. 물건에 생긴 흠결을 감추기보다 그것의 가치를 살려 제2의 생명을 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긴쓰기가 인기를 얻자 일부 수집가들, 특히 다인(茶人)들 사이에는 금박을 입혀 수선하기 위해 일부러 도자기를 깨는 유행까지 생겨났다. 물건에 제2의 삶을 불어넣는 이런 긴쓰기 방식에는, 비극을 겪는 과정에서 부서졌다 회복된 인간이 삶의 풍파를 전혀 모르는 온전한 인간보다 훨씬 매력 있다는 생각 또한 담겨 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1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p. 212~213

(페친 김진덕 님의 포스팅을 여기에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