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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당신

우리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경향신문 2019.08.16. 오후 8:35

[김택근의 묵언]김대중의 마지막 눈물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2009년 1월6일 일기)

 

2009년이 밝았다. 전직 대통령 김대중은 몸이 아팠다. 훗날 발견했지만 생일에 쓴 일기가 예사롭지 않다. 삶을 정리하고 있었다. 새해에도 정국은 난마처럼 엉켜있었다. 그럼에도 대통령 이명박은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을 자행했다. ‘국민·참여정부 10년’을 지우고 있었다.

 

1월20일 철거민과 경찰관이 사망한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그날 김대중의 일기에는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국민을 적으로 아는 정권, 권세 있고 부자만 있는 정권이다. 반드시 국민에 의해 심판받을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김대중이 보기에 중국은 아직 ‘못하고’ 있고, 인도는 영국에 ‘배워서’ 하고, 일본은 패전 후에 맥아더 장군이 ‘시켜서’ 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국민의 힘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후퇴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내와 같이 다짐했다. 우리가 정치에서 은퇴한 지 오래지만 오늘의 현실, 즉 반민주, 반국민경제, 반통일로 질주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50년간의 반독재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형, 학살, 투옥, 고문을 당하면서 얻은 자유이고 남북화해였던가! 그 자유와 남북화해가 무너져가고 있다. 늙고 약한 몸이지만 서로 비장한 결심과 철저한 건강관리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자고 다짐했다.”(2월23일 일기)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몸을 던졌다. 권력이 어른거리는 정치적 타살이었다. 5월29일 영결식이 있었다. 볕이 불처럼 뜨거웠다. 후임 대통령 영전에 꽃을 바칠 줄은 몰랐다. 김대중은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깊이 울었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투사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거목이, 민주화의 상징이 입을 벌리고 울었다. 그 울음 속에는 어떤 위엄도 없었다. 민주주의만 있었다.

 

6월11일 6·15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가 열렸다. 김대중은 휠체어를 타고 연단에 올랐다. 원고지를 든 손이 떨렸다. 갈라진 목소리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을 꾸짖었다. 마지막 연설이자 최후의 당부였다. “만일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지금과 같은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국민도 불행하고, 이명박 정부도 불행하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 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여당과 청와대 그리고 일부 언론은 전직 대통령이 현실 정치에 관여한다며 비난했다.

 

7월9일 동교동 집에서 그를 뵈었다. 대통령은 내게 자서전을 마무리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초췌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슬픈 영웅이었다. 빛을 받을수록, 높이 오를수록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했다. 세속의 재미와 멀어져야 했다. 그날 따라 무척 고독해보였다. 화제가 시국으로 옮겨갔다. 얘기가 몇 번 끊기더니 대통령이 울었다.

 

“지금이 꿈만 같습니다. 50년 동안 얼마나 희생이 많았습니까. 사람들은 날 보고 가만있으라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민주주의가 저렇게 후퇴하는데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의사, 열사들이 지하에서 통곡하고 있는데 뭐라도 해야지요. 아무도 없으면 나라도 나서야지요. 힘없고 병든 몸이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대통령의 눈물이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김대중은 나흘 후 입원했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민주주의를 붙들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국난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민주주의 역주행에서 비롯됐다. 민의를 무섭게 여겼다면, 국민들에게 길을 물었다면 나라가 이리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발명한 정치 형태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취약하다. 진정 백성이 주인인 세상은 위태롭다.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린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보살펴야 한다. 국민에게 버림을 받아도 다시 민심밖에는 기댈 곳이 없었던 정치인 김대중, 그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주어진 생을 한 점 남김없이 태웠다. 온몸을 바쳐 평화를 만들고 그 속에 들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 됐다. 오늘, 그의 눈물이 스며든 우리 민주주의는 안녕한가.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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