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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찬

그 아픈 우리네 기억들을 또렷하게 재생시키는 우매한 인간 역사, 그 동호반복.

고교시절 양시론에 섰다가 왕따 된 님의 상흔을 다시 떠올리게 한 우리 서울중앙지방회, 신앙공동체의 이 분열이 가슴 아픕니다.

제 경우도 님의 아픔 못지않은 상흔이 한 가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 여 년 전, 서울 구(舊) 북지방회가 분열했었습니다. 만장일치로 결의된 분할 안을 정치적 힘으로 파기한 세력들에 의해 촉발된 파행이 결국은 ‘헤쳐모여’라는 식으로 끝장을 봤습니다. 합법적 분할이 아니라, 불법적 분열이었습니다. 그 과정은 치졸하고, 추악했습니다. 할 말이 많고, 그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여기서는 말을 줄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는 그 ‘헤쳐모여’에 동의도 가담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미물 거미도 제 줄을 탄다는 데, 그런 줄타기는 내 알량한(?) 명분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후배가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선 나를 “바보”라고 놀렸습니다.

그 후, 십년. 가해자 이상으로 거국적 악행을 일삼던 강북 ‘각반’들은 자진 소멸해 버리고 우리 의롭고, 선한 싸움을 자기희생적 인내로 견뎌왔던 일군의 무리들이 남하하여 이제 막 눈총 따가웠던 그 무거운 짐 보따리 풀어 젖히려는 순간인데, 다시 보따리 싸야하는 혼돈의 늪에 빠져드는 형국입니다.

단언컨대, 신앙공동체의 맛을 잃어버린 서울중앙지방회는 이제 분할, 아니 분열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 목사님 같은 순전한 ‘요나’가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필론의 돼지는 폭풍우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창(船倉)에서 쿨쿨 잠들 수 있었다지만, 우리는 돼지가 아니기에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서로 치고 박고 싸워 누가 옳은가 판단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제 감정과 이해관계에만 충실할 것입니다.

저에게 이 사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라시면, 그 아픈 경험에 비추어, 까치밥도 못되게 터져 버리기 전에, 아직 아쉽고 덜 익었다고 생각될 때 감을 따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방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그 감을 따내는 방법이 100% 합법이 아니라도, 99%는 적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