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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칸

유신시절의 조중동이라.....

개혁과 아픔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우선 개혁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개혁에 대하여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왔고 들었습니다. 정치경제 사회 문화 종교등 어느곳에서도 개혁이라는 소리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개혁을 외쳤고 개혁을 해 왔는데도 아직도 개혁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도 개혁을 외칩니다. 그전 정부도 개혁을 한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네 근대사만 보아도 어느 한곳에서도 개혁을 외치지 않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에서 고민하다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개혁에는 절대적인 개혁과 상대적인 개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개혁에 있어서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애ㅔ도 불구하고 개혁의 문제는 언제나 현실적인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개혁을 말하는 그들이 먼저 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개혁의 본질에서 멀어진 , 다시말하면 절대적인 개혁이 아닌 언제나 가변적인 개혁을 개혁의 본질로 생각해 왔기에 끈임없는 개혁을 말하고 시행해 왔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또 다시 개혁을 말해야하는 악 순환의 중심에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개혁의 본질에 대하여 질문하고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끊임없는 아픔과 고통의 재생산 만이 반복 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서 기자의 한마디를 기억합니다.

" 해 아래 새것은 없나니..."

개혁은 상대를 정죄하고 나의 의를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고 모두가 함께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상대적인 개혁에 머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개혁은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개혁에 집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에는 그 한 중심에 경륜이 높고 지혜가 깊은 어른들이 계셔서 나누어져 충돌하는 갈등을 봉합하여 부정에너지와 긍정에너지를 통합하여 새로운 미래에로 힘을 모아온 것이 마을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저력이었습니다. 공동체가 깨어지는 것은 공동체 자체가 무능하고 썩어 있기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떠바치고 있는 힘의 균형이 깨어지기 때문에 공동체가 무너지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한 구절을 기억합니다.

"너의 원수가 네 집안 식구이리라......." 많이 음미하고 묵상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생각을 "아픔"으로 돌려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현대 관상기도에서 관상기도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토마스머턴 그의 책" 침묵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수도자는 현실도피적인 자가 아니다. 수도자는 언제나 깨어있기에 멀리 산속에 있어도 언제나 현실과 함께 있고, 깨어 있기에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그 누구보다도 먼저 듣는다" 고 합니다. 그는 여기서 "깨어 있음"에 대하여 유난히 강조합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개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기도를 드릴 때 제자들에게 부탁하기를 "깨어"기도하기를 부탁했습니다. 어찌 이 부탁이 주님 자신만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아픔은 이쪽이냐 저쪽이냐의 아픔이 아니라 이족 저족의 아픔 모두를 함께 끌어안고 가는 아픔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진정한 통곡의 의미ㅏ가 있고 나의 능력으로는 안되기에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성직자의 고통과 눈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고통의 자리인 개세마네로 가서 생각하고자합니다.

"개세마네 동산에서의 어둔 밤의 적막을 타고 흐르는 단말마적인 통곡과 부르짖음가운데 흐르는 땀방울이 피로변했다"고 하는 복음서 기자의 말을 다시한번 되새기지 앟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물위를 걸으신 분입니다.광풍노도를 말씀한마디로 잠재우신 분이십니다. 그능력 많으신 분이 아버지 앞에 나와 우십니다. 아파서 우십니다. 맞아서 상처의 고통때문에 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열악함과 사회저 지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때문에 우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픕니다.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그 분은 히므의 선택 앞에서 많이 고민 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종용히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관상기도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나의 힘을 나의 능력을 내려 놓고 나의 방법과 나의 해결방식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데서 부터 진정한 기도, 관상기도는 시작되는 것이며 우리의 영적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 하신다면 사건의 원인과 진상이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가 곧 공동체의 문제라는 등식이 성립될 것입니다. 이럴때만 목회자인 우리가 취해야 할 진정한 길이 무엇인 지를 알게 되고, 더 나아가서 개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하시며 땀방울이 핏방울로 기도하셨다는 말씀의 의미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가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괴변적인 역설을 듣습니다. 목사님들도 종종 사용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윤리도덕적인 면에서 볼 때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고 꼭 그러해야하는 당위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말하면서 현실적인 판단은 윤리도덕적인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앙은 윤리도덕을 넘어설때만 신앙입니다. 여기서 우리 목사들은 혼동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윤리도덕적인 세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신앙의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됩니다. 그 세계는 죄와 사람이 분리되고 죄의 주체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분리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에덴동산으로부터 인간을 끌어낸 하나님의 대적자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미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의로운 판단을 내려놓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순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개세마네 동산에서 기도가 끝난 후에 군인들이 주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나아가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정의로운 칼의 휘두름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

이 말씀의 깊고 세미한 음성을 듣는 거기서 부터 관상기도는 시작되는 것이며, 비로소 우리의 기나긴 영적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기서부터시작되는 것이요. 진정한 아픔과 눈물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를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