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속에 옹달샘이 하나가 있엇습니다.
그 옹달샘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어떠한 가뭄이 찾아와도 마르지 않는 항상 그 샘의 웅덩이를 채우고 넘치는 넉넉함으로 작은 물줄기를 내려보내고 있는 샘이지요. 그런데 그 샘은 작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산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와서 그 샘에와서 그 물을 마시고 모두가 건강하게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샘은 각양각색의 생명체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그 샘물 때문에 그 곳에서는 싸우는 일이 없엇습니다. 왜냐구요, 그 샘은 작지만 모두를 먹여 살릴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원지가 오염되었습니다.
수원지가 오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안방으로 공급되는 물은 생명을 살리는 물처럼 보여도 그 물은 언제나 오염되어 있는 물이고 그 물을 마시고 사는 자는 언제나 또 다른 질병의 위험에 놓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개혁이라는 화두를 생각해 본다면 개혁은 중간이 아닙니다. 가정으로 공급되는 녹슨 파이프라인을 교체하는 것이 개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파이프 라인을 아무리 좋은 것으로 교체를 한다 할 지라도 그 근원이 오염되어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겟습니까? 영성훈련과 영성의 회복은 진보 보수를 가르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참된 영성은 모두를 살리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영성을 내적치유나하는 심리상담학적 수준으로, 개인의 상처받은 마음이나 치료하는 정도로 격하시켜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영성의 본질을 묻게되고 그 본질을 회복하고자 몸부림치는 것 아닙니까? 참된 영성 안에는 피아가 없고 진보 보수가 없습니다. 진보니 퇴보하니 하는 말도 필요가 없습니다. 윤리학을 전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윤리적 측면에서만 보려고 할 것입니다. 모든 학문에는 그 학문이 지향하는 입장과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에서 제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답변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마다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다른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해법은 많으나 그 어느것도 정답은 없습니다. 이것이 학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서의 물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나아가서 이 개혁은 곧 관상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관상기도와 개혁은 각기 다른 로선에 있는 것 아니라 신앙이라는 화두 안에 언제나 함께하는 것들입니다.
월터 라우쉔 부시의 글을 이용하여 말씀하셨는데 저도 라우쉔 붓에 대한 책을 읽고 한때 우리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청소년들과 윤락여성들을 위하여 야햑도 만들어
섬기고 대학 4년내내 그런일들을 주도적으로 펼쳐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게 돌아오는 질문은 상대적이었고 그것은 또다른 편견으로 채워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라우쉔 부시가 목사님의 아들이었다는 것 잘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목회 사역의 현장이 어디인지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받은 영향으로 Social Gospel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 용어도 상대적인 용어 일 뿐입니다. 상대적인 용어는 상대적 규정일 뿐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칼바르트에 얽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모두가 알다싶이 바르트는 독일 히틀러를 몰아내기 위하여 앞장을 섰고 "바르멘 선언"이라는 유명한 글을 기초한 장본인 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탈린이 공산주의 노선을 가지고 동구라파를 적색으로 물들여가기 시작할 때 바르트는 3년동안 침묵했습니다. 그때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라인홀드 니버 교수가 한 말입니다. "바르트가 미쳤다.미치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숙청을 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바르트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다가 3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는 살생은 살인이 아니고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살생만 살인인가?" 저는 이글들을 접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의 허구가 저지르는 죄악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이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이는 괜챦고 사회주의 안되고 공산주의는 더욱 안되고 등등......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존재하며 인간들이 만들어 굴레씌운 윤리 도덕을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정의이지 하나님의 정의는 아닙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분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즘 말하는 통합의 영성입니다. 시중에 그런 책들이 나와 있던데 사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이르고자하는 그런 통합의 영성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통합의 영성이라는 말은 참 좋습니다.
성찬님의 생각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된 영성에 이르면 정의와 불의가 나뉠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공의 편에 서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그 자체가 개혁이고 그 자체가 정의의 기준이 될 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한번도 내가 정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곧 진리요 길이라"고 말씀하신적은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눈치보지 않습니다. 그 분이 가셨던 그 길을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영성인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데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 아닙니까? 바로 이 고민이 관상기도로가는 시작인 것을 알 고 계십니까?
초대교회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참다운 통합, 아름다운 하나됨의 길을 위하여 묵묵히 그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들을 정죄하면 상대적으로 나의 의를 들어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핍박을 온 몸으로 받아내었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영성과 희생이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같은 기독교의 참된 영적자산을 물려받은 상속자들인데 이 아륻운 영적자산들은 어디서 다 잃어버리고 썩은 물이 넘쳐 구리내 나는 곳에서 참된 영성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공의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 소견에 옿은대로 말하는 정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 옹달샘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어떠한 가뭄이 찾아와도 마르지 않는 항상 그 샘의 웅덩이를 채우고 넘치는 넉넉함으로 작은 물줄기를 내려보내고 있는 샘이지요. 그런데 그 샘은 작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산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와서 그 샘에와서 그 물을 마시고 모두가 건강하게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샘은 각양각색의 생명체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그 샘물 때문에 그 곳에서는 싸우는 일이 없엇습니다. 왜냐구요, 그 샘은 작지만 모두를 먹여 살릴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원지가 오염되었습니다.
수원지가 오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안방으로 공급되는 물은 생명을 살리는 물처럼 보여도 그 물은 언제나 오염되어 있는 물이고 그 물을 마시고 사는 자는 언제나 또 다른 질병의 위험에 놓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개혁이라는 화두를 생각해 본다면 개혁은 중간이 아닙니다. 가정으로 공급되는 녹슨 파이프라인을 교체하는 것이 개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파이프 라인을 아무리 좋은 것으로 교체를 한다 할 지라도 그 근원이 오염되어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겟습니까? 영성훈련과 영성의 회복은 진보 보수를 가르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참된 영성은 모두를 살리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영성을 내적치유나하는 심리상담학적 수준으로, 개인의 상처받은 마음이나 치료하는 정도로 격하시켜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영성의 본질을 묻게되고 그 본질을 회복하고자 몸부림치는 것 아닙니까? 참된 영성 안에는 피아가 없고 진보 보수가 없습니다. 진보니 퇴보하니 하는 말도 필요가 없습니다. 윤리학을 전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윤리적 측면에서만 보려고 할 것입니다. 모든 학문에는 그 학문이 지향하는 입장과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에서 제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답변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마다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다른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해법은 많으나 그 어느것도 정답은 없습니다. 이것이 학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서의 물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나아가서 이 개혁은 곧 관상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관상기도와 개혁은 각기 다른 로선에 있는 것 아니라 신앙이라는 화두 안에 언제나 함께하는 것들입니다.
월터 라우쉔 부시의 글을 이용하여 말씀하셨는데 저도 라우쉔 붓에 대한 책을 읽고 한때 우리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청소년들과 윤락여성들을 위하여 야햑도 만들어
섬기고 대학 4년내내 그런일들을 주도적으로 펼쳐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게 돌아오는 질문은 상대적이었고 그것은 또다른 편견으로 채워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라우쉔 부시가 목사님의 아들이었다는 것 잘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목회 사역의 현장이 어디인지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받은 영향으로 Social Gospel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 용어도 상대적인 용어 일 뿐입니다. 상대적인 용어는 상대적 규정일 뿐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칼바르트에 얽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모두가 알다싶이 바르트는 독일 히틀러를 몰아내기 위하여 앞장을 섰고 "바르멘 선언"이라는 유명한 글을 기초한 장본인 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탈린이 공산주의 노선을 가지고 동구라파를 적색으로 물들여가기 시작할 때 바르트는 3년동안 침묵했습니다. 그때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라인홀드 니버 교수가 한 말입니다. "바르트가 미쳤다.미치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숙청을 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바르트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다가 3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는 살생은 살인이 아니고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살생만 살인인가?" 저는 이글들을 접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의 허구가 저지르는 죄악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이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이는 괜챦고 사회주의 안되고 공산주의는 더욱 안되고 등등......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존재하며 인간들이 만들어 굴레씌운 윤리 도덕을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정의이지 하나님의 정의는 아닙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분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즘 말하는 통합의 영성입니다. 시중에 그런 책들이 나와 있던데 사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이르고자하는 그런 통합의 영성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통합의 영성이라는 말은 참 좋습니다.
성찬님의 생각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된 영성에 이르면 정의와 불의가 나뉠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공의 편에 서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그 자체가 개혁이고 그 자체가 정의의 기준이 될 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한번도 내가 정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곧 진리요 길이라"고 말씀하신적은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눈치보지 않습니다. 그 분이 가셨던 그 길을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영성인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데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 아닙니까? 바로 이 고민이 관상기도로가는 시작인 것을 알 고 계십니까?
초대교회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참다운 통합, 아름다운 하나됨의 길을 위하여 묵묵히 그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들을 정죄하면 상대적으로 나의 의를 들어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핍박을 온 몸으로 받아내었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영성과 희생이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같은 기독교의 참된 영적자산을 물려받은 상속자들인데 이 아륻운 영적자산들은 어디서 다 잃어버리고 썩은 물이 넘쳐 구리내 나는 곳에서 참된 영성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공의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 소견에 옿은대로 말하는 정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성찬님이 인용하신 사사기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