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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칸

성경은 말할 때가 있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할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님의 글에서 라이홀드 니버의 바르트에 대한 비판은 정당했다고 말하는데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인격과 사상은 시대적 아픔을 외면하고는 절대적으로 정립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나름대로의 지론입니다. 바르트는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온 몸으로 살아낸 사람입니다. 자기 조국의 지도자인 히틀러가 이태리의 지도자인 뭇솔리니와 함께 세계 2차대전을 주도하며 명분없는 국토확장과 종족 우월주의 국가 우월주의등의 명분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을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의 소시개로 사라져가는 세계적 현실 앞에서 바르트는 그 유명한 바르멘 선언문의 기초를 잡게됩니다. 이것은 한 신학자가 하나님 앞에서 깊은 고뇌끝에 행동으로 나타난 결단입니다. 그는 사람을 생각했고 생명을 사랑했습니다.

바르트신학의 단계적 변천은 변증법적 신학에서 말씀의 신학으로 그리고 화해의 신학으로 결론을 맺습니다.*(오래전에 했던 독서들이라 확실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맞을 것입니다.) 그가 화해의 신학으로 가는 것은 그가 겪은 세계대전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몰트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직접 참전하므로서 겪었던 것들이 그대로 신학에 반영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유명한 책을 쓰지 안았습니까. 이것역시 화해론을 그 기저에 깔고 있는 저술입니다.

그러므로 라인홀드 니버의 지적이그르다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라인홀드 니버의 바르트에 대한 지적은 바르트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며 성숙되지 않은 지적이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입니다.

또 독일의 파시즘의 사상적 배경에는 랑케라는 신학자이며 역사학자의 이론적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야할 것입니다. 랑케주석이 우리나라에 번역소개되어 있습니다마는 이런 배경때문에 일부 보수주의 교단에서 좀 회자되다가 지금은 중고서점에나 가야 볼 수있는 책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앙은 태도다"
라는 말씀을하시면서 파시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생각에 이것은 어법구조상 맞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왜냐구요? 신앙은 파시트적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신앙을 태도라고만 표현한다면 파시트들도 나름대로의 고백이 있고 그에따르는 행위적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 못하면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 줄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신앙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표현"은 보고 듣는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다만 수많은 의미로 독자들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독자들의 몫이지요 그래서 저는 신앙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고 영성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치관과 고백위에 서 있는 사람은 언제나 개인적인 신앙의 자리로, 자기고백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돌아감은 비겁한 물러섬이나 후퇴가 아니라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하는 것입니다. 예를든다면,

상대를 제압할 수있는 충분한 힘과 능력을 구비한 자가 아무런 이유없이 얻어맞고 저항하지 않는 용기야 말로 더 큰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정의에 대하여 용기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는 자가 말하지 않는다는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라인홀드가 바르트를 비난한 그 비난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요. 바르트 입장에서 보면 라인홀드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당시 라인홀드의 입장은 서방측의 엄청난 동조를 이끌어내고 있었을 때이니까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참된영성은 철저하게 개인 영성입니다.관상기도나 향심기도나, 레시오 디비나나, 예수마음기도나 이 모든 영성훈련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공동체의 영성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정립되어야만 공동체의 영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없는 공동체 영성은 조직의 논리요 경영학 이론일 뿐입니다.

조직의 논리나 경영학 논리에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성과 달성의 목표가 있을 뿐입니다. 조직의 성장만이 강요될 뿐입니다. 바로 여기서 분열과 갈등이 조장 될 뿐입니다. 교회, 노회(지방회), 총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교회가 병든 것은 영성이 아닌것이 논리성을 확보하여 영성의 자리를 차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영적이고 영성회복이라고 우기는데 있지않는가 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로, 말씀으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서 거기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깊은 산속에 있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옹달샘과 같이 이 세상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영성의 수원지, 영성의 발원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어떤 폭풍우 비바람이 쓸고 간다할 지라도 마르지도 않고 흘러 넘치는 넉넉함으로 이 풍진 세상을 씻어내고 목마른자들이 찾아들어 마른목을 추기고 새 힘과 새로운 정신을 공급받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그 채찍으로 우리를 내려 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