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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찬

먼저, 우리가 주고받은 역사적 논거들을 다시 정리해 보자면,

라인홀드 니버가 "바르트가 미쳤다.미치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숙청을 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비난에 대해 바르트가 3년 여의 침묵 끝에 내뱉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는 살생은 살인이 아니고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살생만 살인인가?" 라고 항변했던 이유는,

그가 히틀러에 의해 추방되었던 독일(본 대학)로 복귀한 후, 동서가 이데올로기로 화석화되어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주시했던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는 그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동구 공산주의보다 서방 측이 추구하는 냉전체제가 더 비극적이며 몰지각한 태도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좌경신학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에게 있어서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양대 블록으로 갈라진 어느 한 쪽에 속해서 이를 응원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것보다는 양진영의 사이에 서서 다리를 놓아주고 끊임없는 연결을 맺어 주는 것이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선성(Goodness)이 이 땅 유토피아를 건설해 주리라고 굳게 믿었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1, 2차 세계대전으로 그 빛을 잃어 가면서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며, 말씀으로 돌아가자던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뜨겁게 분출되었던 것을 우리 모두 잘 아는 바입니다.

이상과 같은 간략히 그의 신학과 신앙의 족적을 더듬어 볼 때,

"바르트신학의 단계적 변천은 변증법적 신학에서 말씀의 신학으로 그리고 화해의 신학으로 결론을 맺습니다.*(오래전에 했던 독서들이라 확실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맞을 것입니다.) 그가 화해의 신학으로 가는 것은 그가 겪은 세계대전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라는 대칸님의 분석은 타당합니다.

증오는 화해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라고 제가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불같이 타오르는 그들의 증오와는 무관한 제 3자인 우리가 말하는 화해는 맹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관상기도라는 것이 동방정교회 쪽에 가까운 기도라는데, 그 수도사적 묵상과 침잠은 동방정교회가 러시아에 포교될 때, 서방처럼 극심한 핍박을 받지 않았기에 그런 유형의 조요한 영성이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

제가 처한 작은 공동체의 치졸한 교권투쟁 내지, 비열한 살의는 대칸님이 설파하고 계시는 관상기도나 개인 영성 함양만으로는 어거할 수 없는 갈등구조라는 데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 파산은 회복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는 이 기도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무엇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무엇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십시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