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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송호근

[송호근칼럼] 내 가슴의 전봇대 [중앙일보] 2008.6.10 화 31면

새정권 출범 100일 만에 시민과 정권 사이에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철망과 강판으로 무장한 전경 차량이 광화문 광장을 반으로 가르며 단단한 성곽처럼 서 있었다. 시민 행진은 그곳에서 멈췄다. 촛불이 혜성처럼 흘렀다. 산발적인 구호가 터져나왔다. 막힌 통로를 뚫으려는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흔들어댔다. 성곽 위에서 앳된 전경들이 조선시대의 수병처럼 머리를 쏙 내밀다 사라졌다. 시민들의 함성은 차량 철갑에 부딪쳐 퉁겨나왔다. 시민들은 바닥에 주저앉거나 선 채로 노래를 불렀다. 21년 전 오늘, 그 바리케이드는 독재의 철탑이었다. 21년 후, 오늘의 바리케이드는 대통령의 고집이었다. 그 고집에 질려 시민들은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가슴속에 육중한 ‘전봇대’가 박혀 있는 듯했다.

가슴속의 전봇대. 바로 이것이다, 시민들이 걷어주기를 원했던 것은, 고단한 목소리로 청와대를 향해 외쳤던 메시지는. ‘국민을 섬기겠다’는 그 초심의 전정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달라는 애원이 바리케이드를 넘어 북악 기슭에 부딪쳤다. 그랬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지난 토요일 밤, 부시 대통령에게 하소연하던 자신의 모습을 이순신 장군 동상 너머에 집결한 수만 명 시위대의 심정에 겹쳐 볼 수 있었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의 ‘작은 실화(失火)’가 산천초목을 다 태울 정도로 발전한 것에 성깔을 부리지 않았거나, ‘재협상 불가’라는 불변의 방침을 고집스레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시민들은 가슴속 전봇대를 스스로 철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대통령은 자신의 성공신화의 뇌관인 ‘고집과 추진력’이 결국 국민 성공시대를 개막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6·10 시민항쟁 21주년, 성년을 맞은 민주주의를 축하할 겸 시민들은 독재만큼 단단한 ‘대통령의 고집’과 대적하러 오늘 다시 광장으로 간다.

광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서로 묻지않는 게 좋다. 그 질문에는 마땅한 답이 없다. 남녀노소가 격의없이 토론하고, 대학생과 회사원이 어울려 합창하고, 연인과 가족들이 소풍 가듯 즐기고, 주부와 청소년들이 함께 춤춘다는 외에 별다른 기획은 없다. 일부 편협한 논자들이 선동하는 것과는 달리 그곳엔 조직적 배후, 급진 이념, 음모 집단, 사탄이 없다. 있다 해도, 축제를 수놓는 소도구들일 뿐이다. 이런 희한한 인파를 세계 어디에서 볼 것인가? 21년 전의 항쟁 행렬엔 적이 분명했다. 비장한 표정 하나로 행군해서 물리치면 그만이었다. 오늘의 인파가 원하는 것은 투쟁이 아니라 ‘공명(共鳴)의 주파수’다. 시민들은 무언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온갖 정치 사태들이 일어나도 ‘소통 회로’만큼은 풍성해질 것을 기대했다. 노무현 정권이 훈계로 일관하는 통에 그 믿음은 유보되었다. 지난 대선이 일종의 ‘응징 투표’였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런데 반사이익을 몽땅 챙겨 등장한 이명박 정권이 경박스러울만치, 아주 간단히, 공명을 차단해버린 것에 시민들은 망연자실하다.

‘쇠고기 협상’은 기폭제였다. 이 사태에 임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시민들은 민주화 20년의 역사가 시민 요구를 얼마나 잘 대변했는지를 되돌아보고, 정권마다 내세운 이념정치의 논리와 윤리가 시민 주권을 얼마나 잘 옹호했는지를 반문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대들의 정치와 권력’ 논리에 생활세계의 순정이 압제되고 주눅들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갑갑해졌다. 정기적 통증을 앓듯 5년마다 정권이 교체되어도 지배층의 성곽은 더욱 단단해지고 보통 삶을 유지하는 사회적·경제적 비용은 더욱 높아졌던 현실에 대한 비탄과 분노가 ‘쇠고기 정국’과 만나 천둥이 되고 번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다시 광장으로 간다. ‘재협상 요구’가 외교적 망신을 자초하고 국운이 걸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망가뜨릴 악수라는 사실을 감수하고라도, 소통 회로를 고쳐 가슴을 짓누르는 육중한 전봇대를 뽑아버리고 싶은 것이 위기 정국의 사회심리다. 산업공단의 전봇대는 면장 정도면 볼 수 있지만, 시민들 가슴속에 박힌 전봇대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이럴 일은 아니었다. ‘쇠고기 협정 사수’와 ‘성난 민심 달래기’ 중 양자 택일하라고 신생 정권을 윽박지를 심산은 없었을 게다. 그런데, 오늘의 광장은 결국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판결의 장으로 진화했다. 지팡이를 꽂아도 나뭇잎이 돋았을 100일의 정치적 호기를 낭비하고 작은 불씨 하나로 두둑했던 정치 자원을 다 태워먹은 ‘경제 9단’은 정치 초년병이었다. 그래도, 시민들은 대통령의 탁월한 학습능력을 믿기에 희망의 촛불을 켠다. ‘공명의 정치’가 살아나 가슴속 전봇대를 시원하게 뽑아주기를 기대하는 오늘의 광장, 그 광장의 함성은 푸르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