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구합니다.
2008.01.31 21:44
오늘 중앙교회에서 저는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저를 보게되었습니다.
판단하고 있는 ,
오늘 깨달아 알게 하시고 마음을 치시니 ,
모든 분께 용서를 빕니다.
몇몇분에겐 눈길로 미안함을 알렸습니다만~
.
누구일런지 모르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이라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가 누구일런지
주께서 예비하셨음을 믿습니다.
.
지방회가 나뉘어도
마음은 나뉘지 않게 하시옵길 믿고 믿습니다.
.
지금은 MBC 에서
성직자(?)의 호화 생활
대형화
납세 등등의 주제로...
하고 있군요
너희가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7-19 22:41)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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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찬
2008.02.0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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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
2008.02.02 10:09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삶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농촌전도가면 자주 듣게되는 말씀입니다. 준비하란 말이지요...시기를 놓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하는 말씀입니다!!!마치 이땅에서 영원토록 살 것처럼 탐욕에 빠지지 말고 분노에 잡히지 말고 ,,,놓아버려야지요...뽕나무위의 삭개오가 나무에 오르려면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했습니다. -
김성찬
2008.02.02 11:15
우리 기독교도들의 내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반기독교주의는 자신 스스로에 대한 증오이며, 그것은(기독교도들의 반기독교주의) 천국시민의식을 지니고도 추악한 현실에 기생하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삶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반기독교주의.
하나, 어젯 밤에 자신이 섬기던 교회를 눈물로 떠나게된 장로님 부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개척해서 크게 성장한 담임목사의 전횡과 타락을 내 앞에서 아프게 진술했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상담이 끝나고, 그들은 십일조 봉투를 찻상에 올려 놓으며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어떤 기도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둘, 우리 지방회원들이 모여 그 현안을 놓고 치고받고, 서로 네탓이라고만 우겨대던 결론없던 밤. 바로 그밤, 그 그젯 밤엔 티비에서도 개신교 목사들의 호화생활 등에 대한 목사들끼리 얼굴 붉히는 토론이 있었다지요.
한마디로 집착입니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도 놓을 수 없는...... -
박병권
2008.02.02 17:40
중앙교회 현장에서 이성우 목사님과 헤어지면서
그 눈빛을 확인했습니다.
제 마음은 허망했는데 이목사님은 깨어있는 영성으로 깨달음을 얻으셨네요
애당초 결론이 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각자의 의견, 양측의 의견
그러니까 현 지방회의 고수하는 측과 분할하려는 측의 논리를,
정당한 논의과정에서 듣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어르신들의 간곡한, 차라리 죄송스럽다 못해 민망스러운 봉합노력에
무슨 논의도 오가지 못했다 싶습니다.
서로의 갈등구조를 잘 드려낸 한판, 1차전을 치룬 듯 합니다.
제정신을 차리고 싶습니다
발전적인 분할을 원하는 저로서는
현 상황의 인식과 처리방법에 있어 정신차리고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초에 학생회 셩경캠프를 진행한 후 몸살기운에 머리가 띵한 날이었습니다.
원래 상태로 몸이 돌아왔으니까
정신도 제대로 돌아온 듯 하네요,
초발심, 분할을 원했던 그마음은
-소통구조가 열린 조직- 교권이나 정치욕구를 앞서는 바른 논의구조체
시대와 상황앞에서 정당하게 분석하고 적용하는 조직
세대나 교회 싸이즈에 함몰되지 않는 상호 열린구조
-물질에 매이지 않는 조직 - 지방회비 적게 걷고, 불필요한 경비 안쓰고
봉투 오가지 않고, 생산적인 일을 만들고 돈쓰는 조직
-리더십을 생산적으로 향상시키는 조직- 기본적 욕구인 임원욕구를 정당한 노력
을 통해 해소시키고,
좋은 인물을 브랜드로 만들어가는 조직
-목회자들, 평신도를 업그레이드 하기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조직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저도 어느 한 쪽에 발들여놓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마음은 놓지 않으려 합니다.
정신 흔들리지 않게 형님이 잘 좀 잡아주셔요, -
김성찬
2008.02.04 08:39
그대의 초발심, 그 촘촘한 밑그림은 앞으로 전개될 우리 신세계의 기간망(基幹網, backbone network)입니다.
대안도 권능도 없는 원로님들의 위엄(?) 앞에 순복하는 모습은, 적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날 밤, 마지막 찬송 부를 때(제목은 기억 안나지만, 짐짓 우리가 한 형제 자매라는 식의 '가증스런' 가삿 말이었던 것 같음),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있던 의지의 한국인이 두 사람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그대'였습니다.
대안도 없는 봉합, 그 뚜껑은 이내 열리고 말 것입니다.
단단한 대안을 지닌 그대의 복심이 불원간에 큰 빛을 발 할 것입니다.
초발심으로, 그리고 우리 모두 다 백의종군 함으로
감동을 불러 일으켜 봅시다.
그날.
신앙은 강요될 수 없습니다. 다만 불러 일으킬 수 있을 뿐입니다. -
박병권
2008.02.05 21:42
어찌 이렇게도 심히 중대한 분석을 거침없이 해 주십니까?
다만 이러한 마음으로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려 할 뿐입니다.
백의 종군, 이 말도 심히 결연하게 들립니다만
원단 그대로 받아들여서
앞으로의 진행과정에 욕심을 부리지 않기를, 그리고 결과에 대하여 담담하기를
스스로 다짐하는 말로 받겠습니다.
그나 저나 트러블 메이커가 2차전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니
이건 어찌 대비해야 할꺼나요?/// -
김성찬
2008.02.05 22:13
일본의 신학자 泉田 昭는 "그리스도인의 일치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으며 선교에 큰 진전이 있었다. 일치야 말로 축복의 원천이며 발전의 원동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5장 6절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사명을,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분리와 분열을 촉진시키려는 내밀한 음모, 그 전방위적 공세가 집요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양육강식의 정글로 변질된 이 신앙공동체.
살리는 문법, 상생의 책략,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할 때입니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 납시다.
헤프닝을 이벤트(사건)화 하십시다.
만천하에 교훈과 두려움이 될 수 있도록.
참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자입니다.
글구,
현재 진행형인 전방위적 공세.
그러나 그 진원지는 여기.
내안의 두려움입니다.
-
대칸
2008.02.06 00:07
사건의 본말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이 논의에 뒤어든다는 것이 죄송하고 어색합니다만 함께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나는 원래 직업군인이었는데 어쩌다가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의 글이 좀 딱딱하다는 소리를 듣는 편입니다. 나는 장로교 목사입니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어느교단 할 것없이 파벌과 분열 그리고 모든 갈등을 안고 있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신학대학에 입학을 하면서부터 개혁을 외쳤고 진정한 개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오랜 세월을 고민해 왔습니다. 제도개혁은 참으로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개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앞의 댓글에서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런정도는 돌들도 할 수 있느니라. 이 해석에 일리가 있다면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들이 돌들의 수준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목사님들은 돌이 아니쟎습니까? 도 한장면이 생각나는데요 베드로가 주님께 장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가겠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케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닌것 같은데 너무 심각하게 토론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만사에 달관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는 없으시기 바라고요. 우리가 성직자이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답변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쟎습니까? 그런고로 교단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다르데는 능력이 없는데 교단의 무슨 사건만 터지면 아주 뛰어난 감각을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냥 그 분들에게 맡겨두시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안 나서면 돌들이 나서서 소리 지르지 않겠습니까? 돌들이 되지못해 화가 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납니다. 특별한 리더쉽이 없으면 한발 물러나 관전하는 것도 영성함양에 큰 도움이 되지 안겠습니까? -
김성찬
2008.02.06 07:53
"제도 개혁은 쉽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옳습니다.
늘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지요.
그러나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할 때도 있습니다. 내용을 발전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한 한 수단으로 형식의 변화가 필요하기도 하구요.
그러나, 님의 '돌'에 대한 성찰은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목사들이 '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돌'만도 못한 처신을 한다는 말입니다.
안식일 날이라고, 에봇을 입었다고 덫에 걸린 짐승의 신음소리를 외면하려들어야만 하는 겁니까?
공동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방식으로 전위에 나서는 행동도, 배후에서 무릎 꿇는 기도도 다 필요하고, 값진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리더쉽이 아닐까요?
그것이 우리의 집합적인 죄(collective Sin)를 씻는 공동체적 영성함양을 위한 일이 아닐까요?
"그냥 그 분들에게 맡겨두시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안 나서면 돌들이 나서서 소리 지르지 않겠습니까? 돌들이 되지못해 화가 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납니다. 특별한 리더쉽이 없으면 한발 물러나 관전하는 것도 영성함양에 큰 도움이 되지 안겠습니까?"
대칸님의 역설(?)적 궤변을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어렵습니다.
유신시절 조중동의 사설을 보는 느낌입니다. ㅋㅋ -
대칸
2008.02.06 12:18
유신시절의 조중동이라.....
개혁과 아픔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우선 개혁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개혁에 대하여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왔고 들었습니다. 정치경제 사회 문화 종교등 어느곳에서도 개혁이라는 소리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개혁을 외쳤고 개혁을 해 왔는데도 아직도 개혁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도 개혁을 외칩니다. 그전 정부도 개혁을 한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네 근대사만 보아도 어느 한곳에서도 개혁을 외치지 않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에서 고민하다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개혁에는 절대적인 개혁과 상대적인 개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개혁에 있어서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애ㅔ도 불구하고 개혁의 문제는 언제나 현실적인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개혁을 말하는 그들이 먼저 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개혁의 본질에서 멀어진 , 다시말하면 절대적인 개혁이 아닌 언제나 가변적인 개혁을 개혁의 본질로 생각해 왔기에 끈임없는 개혁을 말하고 시행해 왔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또 다시 개혁을 말해야하는 악 순환의 중심에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개혁의 본질에 대하여 질문하고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끊임없는 아픔과 고통의 재생산 만이 반복 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서 기자의 한마디를 기억합니다.
" 해 아래 새것은 없나니..."
개혁은 상대를 정죄하고 나의 의를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고 모두가 함께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상대적인 개혁에 머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개혁은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개혁에 집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에는 그 한 중심에 경륜이 높고 지혜가 깊은 어른들이 계셔서 나누어져 충돌하는 갈등을 봉합하여 부정에너지와 긍정에너지를 통합하여 새로운 미래에로 힘을 모아온 것이 마을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저력이었습니다. 공동체가 깨어지는 것은 공동체 자체가 무능하고 썩어 있기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떠바치고 있는 힘의 균형이 깨어지기 때문에 공동체가 무너지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한 구절을 기억합니다.
"너의 원수가 네 집안 식구이리라......." 많이 음미하고 묵상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생각을 "아픔"으로 돌려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현대 관상기도에서 관상기도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토마스머턴 그의 책" 침묵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수도자는 현실도피적인 자가 아니다. 수도자는 언제나 깨어있기에 멀리 산속에 있어도 언제나 현실과 함께 있고, 깨어 있기에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그 누구보다도 먼저 듣는다" 고 합니다. 그는 여기서 "깨어 있음"에 대하여 유난히 강조합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개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기도를 드릴 때 제자들에게 부탁하기를 "깨어"기도하기를 부탁했습니다. 어찌 이 부탁이 주님 자신만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아픔은 이쪽이냐 저쪽이냐의 아픔이 아니라 이족 저족의 아픔 모두를 함께 끌어안고 가는 아픔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진정한 통곡의 의미ㅏ가 있고 나의 능력으로는 안되기에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성직자의 고통과 눈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고통의 자리인 개세마네로 가서 생각하고자합니다.
"개세마네 동산에서의 어둔 밤의 적막을 타고 흐르는 단말마적인 통곡과 부르짖음가운데 흐르는 땀방울이 피로변했다"고 하는 복음서 기자의 말을 다시한번 되새기지 앟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물위를 걸으신 분입니다.광풍노도를 말씀한마디로 잠재우신 분이십니다. 그능력 많으신 분이 아버지 앞에 나와 우십니다. 아파서 우십니다. 맞아서 상처의 고통때문에 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열악함과 사회저 지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때문에 우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픕니다.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그 분은 히므의 선택 앞에서 많이 고민 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종용히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관상기도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나의 힘을 나의 능력을 내려 놓고 나의 방법과 나의 해결방식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데서 부터 진정한 기도, 관상기도는 시작되는 것이며 우리의 영적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 하신다면 사건의 원인과 진상이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가 곧 공동체의 문제라는 등식이 성립될 것입니다. 이럴때만 목회자인 우리가 취해야 할 진정한 길이 무엇인 지를 알게 되고, 더 나아가서 개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하시며 땀방울이 핏방울로 기도하셨다는 말씀의 의미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가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괴변적인 역설을 듣습니다. 목사님들도 종종 사용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윤리도덕적인 면에서 볼 때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고 꼭 그러해야하는 당위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말하면서 현실적인 판단은 윤리도덕적인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앙은 윤리도덕을 넘어설때만 신앙입니다. 여기서 우리 목사들은 혼동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윤리도덕적인 세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신앙의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됩니다. 그 세계는 죄와 사람이 분리되고 죄의 주체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분리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에덴동산으로부터 인간을 끌어낸 하나님의 대적자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미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의로운 판단을 내려놓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순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개세마네 동산에서 기도가 끝난 후에 군인들이 주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나아가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정의로운 칼의 휘두름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
이 말씀의 깊고 세미한 음성을 듣는 거기서 부터 관상기도는 시작되는 것이며, 비로소 우리의 기나긴 영적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기서부터시작되는 것이요. 진정한 아픔과 눈물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를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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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찬
2008.02.06 13:59
이젠, 오늘 이 시대, 이명박 시대(보수정권)의 조중동 사설 같군요. ㅋㅋ
좋은 글 먼저, 감사드립니다.
발터 라우센부시(Walter Rauschenbusch)는 그의 저서 '사회 복음을 위한 신학(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에서 사회 복음을 정의 하기를, 개인주의적인 복음이 외면하고 있는 '죄로 가득 찬 사회 질서,' 그 집합적인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민족의 구원을 믿고 바라던, 옛 선지자들의 신앙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개인의 구원 없이는 사회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절반의 진리'라고 지적합니다. 집단이 행한 악행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진리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인용해 보자면---.
그는 사회 복음의 신학은 죄란, 본질적으로 이기심이라고 정의 합니다. 하나님께만 범하는 죄는 희귀하다는 것입니다. 죄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사사로운 거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대칸님의 이런 글은 신앙적 낙관론이랄 수 있습니다.
대칸님의 글을 여기 옮겨 보자면,
"이 말에 동의 하신다면 사건의 원인과 진상이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가 곧 공동체의 문제라는 등식이 성립될 것입니다. 이럴때만 목회자인 우리가 취해야 할 진정한 길이 무엇인 지를 알게 되고..."
옳지만, 그대의 '내탓'만으로 이 사태의 근본 원인과 처방을 찾자는 식의 논조는, 절반의 진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회(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 움튼) 악의 제거는, 어느 한 개인의 깊은 영성이나 신앙고백만으로는 불가능핟는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런 자유주의적 환상, 정치적 낙관론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사회는 결코 개인적 차원에서 처럼 도덕적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병든 신앙공동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니버는 정치 세력을 통한 정의를 강조하며 크리스찬 리얼리즘(현실주의)를 그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이런 진단과 관점에서 볼 때, 수도원의 개인 영성만으로 병든 이 신앙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구조 악을 허물, 연대가 필요합니다. 하여, 우린 불의와 정의가 맞설 때, 반드시 어느 편엔가 서야 합니다.
살리는 문법을 구사하고, 상생의 책략을 도모하며, 행동하는 양심 되어야 합니다.
이 일에 우리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할 것입니다.
눈치보지 말고,
당당하게. -
대칸
2008.02.06 16:11
깊은 산속에 옹달샘이 하나가 있엇습니다.
그 옹달샘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어떠한 가뭄이 찾아와도 마르지 않는 항상 그 샘의 웅덩이를 채우고 넘치는 넉넉함으로 작은 물줄기를 내려보내고 있는 샘이지요. 그런데 그 샘은 작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산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와서 그 샘에와서 그 물을 마시고 모두가 건강하게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샘은 각양각색의 생명체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그 샘물 때문에 그 곳에서는 싸우는 일이 없엇습니다. 왜냐구요, 그 샘은 작지만 모두를 먹여 살릴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원지가 오염되었습니다.
수원지가 오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안방으로 공급되는 물은 생명을 살리는 물처럼 보여도 그 물은 언제나 오염되어 있는 물이고 그 물을 마시고 사는 자는 언제나 또 다른 질병의 위험에 놓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개혁이라는 화두를 생각해 본다면 개혁은 중간이 아닙니다. 가정으로 공급되는 녹슨 파이프라인을 교체하는 것이 개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파이프 라인을 아무리 좋은 것으로 교체를 한다 할 지라도 그 근원이 오염되어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겟습니까? 영성훈련과 영성의 회복은 진보 보수를 가르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참된 영성은 모두를 살리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영성을 내적치유나하는 심리상담학적 수준으로, 개인의 상처받은 마음이나 치료하는 정도로 격하시켜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영성의 본질을 묻게되고 그 본질을 회복하고자 몸부림치는 것 아닙니까? 참된 영성 안에는 피아가 없고 진보 보수가 없습니다. 진보니 퇴보하니 하는 말도 필요가 없습니다. 윤리학을 전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윤리적 측면에서만 보려고 할 것입니다. 모든 학문에는 그 학문이 지향하는 입장과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에서 제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답변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마다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다른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해법은 많으나 그 어느것도 정답은 없습니다. 이것이 학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서의 물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나아가서 이 개혁은 곧 관상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관상기도와 개혁은 각기 다른 로선에 있는 것 아니라 신앙이라는 화두 안에 언제나 함께하는 것들입니다.
월터 라우쉔 부시의 글을 이용하여 말씀하셨는데 저도 라우쉔 붓에 대한 책을 읽고 한때 우리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청소년들과 윤락여성들을 위하여 야햑도 만들어
섬기고 대학 4년내내 그런일들을 주도적으로 펼쳐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게 돌아오는 질문은 상대적이었고 그것은 또다른 편견으로 채워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라우쉔 부시가 목사님의 아들이었다는 것 잘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목회 사역의 현장이 어디인지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받은 영향으로 Social Gospel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 용어도 상대적인 용어 일 뿐입니다. 상대적인 용어는 상대적 규정일 뿐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칼바르트에 얽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모두가 알다싶이 바르트는 독일 히틀러를 몰아내기 위하여 앞장을 섰고 "바르멘 선언"이라는 유명한 글을 기초한 장본인 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탈린이 공산주의 노선을 가지고 동구라파를 적색으로 물들여가기 시작할 때 바르트는 3년동안 침묵했습니다. 그때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라인홀드 니버 교수가 한 말입니다. "바르트가 미쳤다.미치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숙청을 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바르트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다가 3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는 살생은 살인이 아니고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살생만 살인인가?" 저는 이글들을 접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의 허구가 저지르는 죄악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이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이는 괜챦고 사회주의 안되고 공산주의는 더욱 안되고 등등......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존재하며 인간들이 만들어 굴레씌운 윤리 도덕을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정의이지 하나님의 정의는 아닙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분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즘 말하는 통합의 영성입니다. 시중에 그런 책들이 나와 있던데 사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이르고자하는 그런 통합의 영성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통합의 영성이라는 말은 참 좋습니다.
성찬님의 생각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된 영성에 이르면 정의와 불의가 나뉠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공의 편에 서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그 자체가 개혁이고 그 자체가 정의의 기준이 될 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한번도 내가 정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곧 진리요 길이라"고 말씀하신적은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눈치보지 않습니다. 그 분이 가셨던 그 길을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영성인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데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 아닙니까? 바로 이 고민이 관상기도로가는 시작인 것을 알 고 계십니까?
초대교회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참다운 통합, 아름다운 하나됨의 길을 위하여 묵묵히 그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들을 정죄하면 상대적으로 나의 의를 들어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핍박을 온 몸으로 받아내었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영성과 희생이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같은 기독교의 참된 영적자산을 물려받은 상속자들인데 이 아륻운 영적자산들은 어디서 다 잃어버리고 썩은 물이 넘쳐 구리내 나는 곳에서 참된 영성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공의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 소견에 옿은대로 말하는 정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성찬님이 인용하신 사사기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
김성찬
2008.02.06 22:05
동의합니다.
수도원의 영성이 피폐한 유럽사회를 지탱해 준 유일한 힘이었다고. 진정한 개혁은 골방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러나, 침묵은 다릅니다. 칼 발트에 대한 라일홀드 니버의 비판은 정당합니다. 칼 발트의 3년여의 침묵은 침묵이 아닙니다. 비겁한 외면이요, 방관이요, 보신주의입니다.아니 또 다른 동조입니다.
신앙은 태도다, 라고들 말합니다.그런데 그의 파시스트들에 대한 신앙적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야수적 인간 사냥에 혈안이 된 파시스트들의 집단 광기에 대해,이래서는 안된다, 고 그는 소리를 질렀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민주적 독재와 살육에 대해서도 분연히 항거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체제나 사상이 어떠하든지, 그 행위의 열매가 비진리일 경우 우리는 결코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이데올로기나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 인간됨, 인간되기, 인간답게 살기가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영성에 대한 대칸님의 정의는 인상적입니다. 참된 영성 안에 공의도, 사랑도 공존한다고 저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관상기도 라는 말이 내 안에 큰 기대를 불러 일으킵니다. 녹슨 수도관 교체만으로 근본 오염을 막을 수 없다는 성찰도 눈 길을 멈추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공의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 소견에 옳은대로 말하는 정의가 아닌가, 라는 대칸님의 체험적 고백에 대해서도 부분 동의를 표합니다.
허나, 저는 내가 곧 정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 시대의 불화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집합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그분의 전능과 우리의 무기력 사이의 불화를.
왕이 없어 모두가 왕된 포스트모던한 세상에, 중심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고난을 자초하신 성전 청결 예식이 우리 안에 재현되어야 합니다.
채찍을 들어 치시니...
-
대칸
2008.02.09 16:07
성경은 말할 때가 있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할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님의 글에서 라이홀드 니버의 바르트에 대한 비판은 정당했다고 말하는데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인격과 사상은 시대적 아픔을 외면하고는 절대적으로 정립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나름대로의 지론입니다. 바르트는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온 몸으로 살아낸 사람입니다. 자기 조국의 지도자인 히틀러가 이태리의 지도자인 뭇솔리니와 함께 세계 2차대전을 주도하며 명분없는 국토확장과 종족 우월주의 국가 우월주의등의 명분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을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의 소시개로 사라져가는 세계적 현실 앞에서 바르트는 그 유명한 바르멘 선언문의 기초를 잡게됩니다. 이것은 한 신학자가 하나님 앞에서 깊은 고뇌끝에 행동으로 나타난 결단입니다. 그는 사람을 생각했고 생명을 사랑했습니다.
바르트신학의 단계적 변천은 변증법적 신학에서 말씀의 신학으로 그리고 화해의 신학으로 결론을 맺습니다.*(오래전에 했던 독서들이라 확실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맞을 것입니다.) 그가 화해의 신학으로 가는 것은 그가 겪은 세계대전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몰트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직접 참전하므로서 겪었던 것들이 그대로 신학에 반영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유명한 책을 쓰지 안았습니까. 이것역시 화해론을 그 기저에 깔고 있는 저술입니다.
그러므로 라인홀드 니버의 지적이그르다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라인홀드 니버의 바르트에 대한 지적은 바르트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며 성숙되지 않은 지적이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입니다.
또 독일의 파시즘의 사상적 배경에는 랑케라는 신학자이며 역사학자의 이론적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야할 것입니다. 랑케주석이 우리나라에 번역소개되어 있습니다마는 이런 배경때문에 일부 보수주의 교단에서 좀 회자되다가 지금은 중고서점에나 가야 볼 수있는 책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앙은 태도다"
라는 말씀을하시면서 파시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생각에 이것은 어법구조상 맞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왜냐구요? 신앙은 파시트적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신앙을 태도라고만 표현한다면 파시트들도 나름대로의 고백이 있고 그에따르는 행위적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 못하면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 줄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신앙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표현"은 보고 듣는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다만 수많은 의미로 독자들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독자들의 몫이지요 그래서 저는 신앙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고 영성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치관과 고백위에 서 있는 사람은 언제나 개인적인 신앙의 자리로, 자기고백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돌아감은 비겁한 물러섬이나 후퇴가 아니라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하는 것입니다. 예를든다면,
상대를 제압할 수있는 충분한 힘과 능력을 구비한 자가 아무런 이유없이 얻어맞고 저항하지 않는 용기야 말로 더 큰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정의에 대하여 용기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는 자가 말하지 않는다는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라인홀드가 바르트를 비난한 그 비난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요. 바르트 입장에서 보면 라인홀드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당시 라인홀드의 입장은 서방측의 엄청난 동조를 이끌어내고 있었을 때이니까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참된영성은 철저하게 개인 영성입니다.관상기도나 향심기도나, 레시오 디비나나, 예수마음기도나 이 모든 영성훈련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공동체의 영성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정립되어야만 공동체의 영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없는 공동체 영성은 조직의 논리요 경영학 이론일 뿐입니다.
조직의 논리나 경영학 논리에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성과 달성의 목표가 있을 뿐입니다. 조직의 성장만이 강요될 뿐입니다. 바로 여기서 분열과 갈등이 조장 될 뿐입니다. 교회, 노회(지방회), 총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교회가 병든 것은 영성이 아닌것이 논리성을 확보하여 영성의 자리를 차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영적이고 영성회복이라고 우기는데 있지않는가 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로, 말씀으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서 거기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깊은 산속에 있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옹달샘과 같이 이 세상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영성의 수원지, 영성의 발원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어떤 폭풍우 비바람이 쓸고 간다할 지라도 마르지도 않고 흘러 넘치는 넉넉함으로 이 풍진 세상을 씻어내고 목마른자들이 찾아들어 마른목을 추기고 새 힘과 새로운 정신을 공급받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그 채찍으로 우리를 내려 치소서. -
김성찬
2008.02.09 21:19
먼저, 우리가 주고받은 역사적 논거들을 다시 정리해 보자면,
라인홀드 니버가 "바르트가 미쳤다.미치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숙청을 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비난에 대해 바르트가 3년 여의 침묵 끝에 내뱉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는 살생은 살인이 아니고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살생만 살인인가?" 라고 항변했던 이유는,
그가 히틀러에 의해 추방되었던 독일(본 대학)로 복귀한 후, 동서가 이데올로기로 화석화되어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주시했던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는 그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동구 공산주의보다 서방 측이 추구하는 냉전체제가 더 비극적이며 몰지각한 태도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좌경신학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에게 있어서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양대 블록으로 갈라진 어느 한 쪽에 속해서 이를 응원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것보다는 양진영의 사이에 서서 다리를 놓아주고 끊임없는 연결을 맺어 주는 것이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선성(Goodness)이 이 땅 유토피아를 건설해 주리라고 굳게 믿었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1, 2차 세계대전으로 그 빛을 잃어 가면서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며, 말씀으로 돌아가자던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뜨겁게 분출되었던 것을 우리 모두 잘 아는 바입니다.
이상과 같은 간략히 그의 신학과 신앙의 족적을 더듬어 볼 때,
"바르트신학의 단계적 변천은 변증법적 신학에서 말씀의 신학으로 그리고 화해의 신학으로 결론을 맺습니다.*(오래전에 했던 독서들이라 확실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맞을 것입니다.) 그가 화해의 신학으로 가는 것은 그가 겪은 세계대전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라는 대칸님의 분석은 타당합니다.
증오는 화해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라고 제가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불같이 타오르는 그들의 증오와는 무관한 제 3자인 우리가 말하는 화해는 맹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관상기도라는 것이 동방정교회 쪽에 가까운 기도라는데, 그 수도사적 묵상과 침잠은 동방정교회가 러시아에 포교될 때, 서방처럼 극심한 핍박을 받지 않았기에 그런 유형의 조요한 영성이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
제가 처한 작은 공동체의 치졸한 교권투쟁 내지, 비열한 살의는 대칸님이 설파하고 계시는 관상기도나 개인 영성 함양만으로는 어거할 수 없는 갈등구조라는 데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 파산은 회복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는 이 기도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무엇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무엇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십시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문 중에서) -
대칸
2008.02.09 21:29
성찬님의 신정통주의 신학의 분출에 대한 간단한 정리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안에는 관상기도라는 것이 동방이다 서방이다라는 출처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관상기도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구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상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또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상기도는 동방정교회의 유산도 아니고 서방로마교회의 유산도 아닌 기독교의 유산이라는거 아십니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는 AD 313년에 사라졌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기독교는 로마국가의 종교로 자리를 잡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313년 이전의 신앙은 말그대로 프로테스탄트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국가종교에 귀속되기 싫어했던 사람들이 좀더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고백을 갖기 위해 사막으로 광야로 나가 홀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했던데서 부터 유래합니다.그래서 이들은 한때 로마 교황으로부터 이단시 되기도 했지요. 그러던 것이 제2 바티칸 공의회 이후 관상기도가 인정을 받고, 성령쇄신(성령충만)운동 그리고 성경공부가 허락되면서 그들도 밤마다 모여서 통성기도하고 부르짖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한국 천주교만 그런지 전 세게 천주교가 다 그런지는 잘 모르겠읍니다)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프로테스탄트가 부활했다고나 할까. 저는 천주교를 기독교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관상기도라는 말에 대하여 이렇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사실 복잡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용어입니다. 왜 그들은 그들도 통성기도하고 우리처럼 금요철야기도하고 하면서 기독교의 모든 것을 다 수용하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용어에 민감한지 모르겠습니다.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이면 무조건 이상하게 보는 시각도 좀 교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관상기도에는 여러가지 명칭(앞에서 언급한)으로 말하고 있는데 제가 그 부분에 관심을 가진 이후로는 모두가 다 같은 내용이고 같은 기도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 표현이 다르고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대로 제가 하고 있는 향심기도에 대해서도 소개가 될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알게된 것은 우리의 기도는 기도의 주체가 언제나 "나"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상기도에 들어서면 기도가 "하나님께 아뢰는자리가 아니라 듣는 자리"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됩니다.
우리가 성숙하지 못했을때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야 했지만 관상기도에 들어서면 이제는 내가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듣는 자는 결단의 자리로 나갑니다. 그 결단의 자리는 어떤 형태로든 행위가 있습니다.그것이 죽음의 길이라할 지라도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눈치 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미움도 증오도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듯이 있을 뿐입니다.
성찬님이 언급한
아도르노에 대해서는 제가 잘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언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말씀 드릴수 있는 것은 관상기도에서 이루어지는 화해는 증오에 대한 상대적 급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 증오까지도 안고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화해가 관상기도가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상기도에 들어선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성찬님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갈등은 예수님이 오셔도 해결이 되지 않을 거이라는 것 알고계실 것 같은데.......,
반대로 이갈등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를 보면 기도의 주체가 니버 자신입니다. 한 때 저도 그 기도를 너무 좋아하여 눈물을 흘리며 묵상했습니다. 그때가 80년대 격동기(대학, 대학원시절)를 온몸으로 살아가던 때였습니다. 이제 저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의 정의는 어떻습니까?
기도는 청원이나 애걸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은총의 선물입니다.
기도는 힘없고 약한자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참으로 성숙한 자가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의로운 자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죄인이 드리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의 기도는 주께서 기뻐받으시는 열납되는 제물입니다.
관상기도에 들어서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잠이 깬 속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더 깊고 넓은 인류전체의식의 중심에서
항상 성령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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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을 어젯밤 늦게 읽었으나, 댓글을 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슬픔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만 드는 그 왜곡된 엄격주의 때문에.
"증오는 '화해'의 부정적 측면이다. 유대교에서 화해는, 최상의 개념으로서 화해의 의미는 전적으로 기다림Erwartung 이다" 라고 아도르노는 말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우리는 그 끝을 볼 수 있을까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다 변절한 이들의 조바심이 삭신에 스며들어 옵니다.
짦은 만남, 내뱉은 허튼 소리
돌아서며 후회했습니다.
담엔 말씀 앞에서 만납시다.
이 추악한 현실태에 차라리 소리된 '돌'이고 싶은 그대에게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