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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序詩 독자에게

2008.05.10 10:52

영목 조회 수:3116 추천:53

보들레르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édition de 1861)

序詩


독자에게
Au Lecteur


어리석음, 실수, 죄, 인색함은
우리의 혼을 차지하고 몸을 움직이고,
마치 거지가 그들의 독소로 살아가듯
우린 사랑스런 가책감을 양식으로 삼는다.

우리의 죄는 완고하고, 우리의 후회는 느슨한데;
우린 우리의 참회의 값을 높게도 매기네,
그리고 우리는 즐겁게 진흙탕길로 돌아가,
싸구려 눈물이 얼룩을 지워주리라 믿는다.
우리의 매혹된 영혼을 오랫동안 잠재우는
사탄 트리스메기스투스의 악의 베개 위에서
고귀한 금속과 같은 우리의 의지는
이 화학자에 의해 전부 증발해 버린다.

악마는 우리를 줄에 매달아 움직인다!
우리는 불쾌한 것들에서 매혹을 발견한다;
지옥을 향한 하루하루, 우리는 아래로 떨어진다,
두려움도 없이, 악취를 풍기는 어둠을 통해서.

마치 가난하면서 입맞추고 깨무는 탕아처럼
늙은 창부의 가슴을 고문하고,
우리는 지나치며 비밀스런 즐거움을 훔쳐
오래된 오렌지처럼 강하게 쥐어짠다.

죄어지고, 밀려들어오는, 백만 마리의 기생충처럼,
한 무리의 악마들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주연을 벌이고,
그리고, 우리가 숨쉴 때면 그 보이지 않는 강,
죽음이 입 막힌 울부짖음과 함께 내려온다.

만일 강간, 독, 단검, 방화가
즐거운 그림으로 수놓아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애처로운 삶의 시시한 캔버스,
애석하다, 우리의 마음이 충분히 강하지 못함이니.

하지만 재칼, 팬더, 사냥개,
원숭이, 전갈, 독수리, 뱀,
짖어대고 울어대고 크르렁대고 날뛰는 괴물들 사이에서,
우리의 죄의 수치스런 우리 안에서,

그곳에 더 흉칙하고, 더 악하고, 더 추악한 자 있으니
그는 밀지도 제스처가 크지도 울음소리가 크지도 않지만,
뜻대로 세계를 부스러기로 만들어 버리고는
하품 한 번으로 세계를 삼켜버린다.

지겹도다! 본의 아닌 눈물을 맡은 눈,
그는 담배를 피우며 교수대를 꿈꾼다.
독자여, 이 섬세한 괴물을 알고 있을 것이리라;
위선적인 독자, 나의 분신, 나의 형제여! 

 

 

 

 

 

 

 

 

문학 - 자본주의에 절망한 보들레르 <악의 꽃> 해설

예술 위하여, (2007/09/13 10:11)

시대를 앞서 나간 죄로 그 당시 파리로부터 추방당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 생애의 영광을 누리기는커녕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으며, 욕이란 욕은 다 먹은 천재 시인. 파리에서 추방된 시인은 벨기에로 도피했지만 거기서도 자신의 꿈을 완수하지 못한 근대시의 아버지.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시, 소설, 문학과 미술과 음악 평론, 수필, 번역 등 미완의 작품을 두 박스나 남기고 저 세상으로 유배된 죄인. <악의 꽃>이라는 한 권의 시집과 <파리의 우울>이라는 소산문시를 남겼을 뿐인데, 19세기와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 오늘날 그를 연구한 공식 논문만 5만 건이 넘는다.

독신이었던 보들레르는 46세에 전신마비와 실어증으로 약 1년 동안 신음하다 1867년 여름 어린 시절의 연인 어머니의 향기로운 품에서 고통 없이 눈을 감는다. 문학인 음악가 미술가 등 100여 명의 친구들에 의해 장례식을 치른 뒤 가족 묘지에 묻힌다. 보들레르 자신도 말했듯이 몇 년이라는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천재로 남았을 것이다. 프랑스 시단이, 파리의 무지한 독자들이 보들레르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위대한 유산을 짓밟은 셈이다.




"단테가 내세의 지옥과 연옥을 탐색한 것처럼 보들레르는 인간 세계를 탐사하기 위하여 인간의 숨겨진 심층과 치부, 사회 질서와 도덕의 터부를 파헤쳤다. 당시의 많은 시인들이 그들의 시상(詩想)을 자연이나 사랑, 예술의 꽃동산에서 찾을 때 보들레르는 악(惡)의 늪에서 미를 얻으려고 했고 현실이라는 거름통에서 금(金)을 캐내려고 했다. 이러한 시인의 기도는 당시의 사회와 시단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며 충격적이며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최완복 교수)

그러나 어떤 평론가들은 보들레르를 세기말 쾌락주의자로 몰아세운다.
"현실이라는 것이 살만한 가치가 없으며 진보라던가, 사랑이라던가, 신앙이라는 것은 부질없다. 그러니 심미적인 쾌락과 찰나적인 향락에 젖어 현실의 고통을 잊어버리자." 아마 보들레르 생존 당시 프랑스의 시단과 파리의 정서도 이런 식의 평가를 내렸을 것 같고 지금도 이런 식의 수준 낮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쟌느 뒤발
보들레르

보들레르는 인간 세계의 악(惡)을 파고들어 살 만한 가치를 발견하려고 몸부림친 시인이다.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지옥 속에서 '꽃'의 발견이 보들레르가 꿈꾼 이상이다. 이상을 실현하려고 온몸을 바친 보들레르의 시집 제목 <악의 꽃>에서도 이런 상징이 잘 드러난다. 악(惡) 속에서 피어난 꽃과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연꽃의 차이가 뭐란 말인가.

<악의 꽃>의 책을 열면 '독자에게'라는 제목이 붙은 서시(序詩)가 있다. 이 시에서 보들레르는 자신의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말한다.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édition de 1861)

독자에게
Au Lecteur


어리석음, 실수, 죄, 인색함은
우리의 혼을 차지하고 몸을 움직이고,
마치 거지가 그들의 독소로 살아가듯
우린 사랑스런 가책감을 양식으로 삼는다.

우리의 죄는 완고하고, 우리의 후회는 느슨한데;
우린 우리의 참회의 값을 높게도 매기네,
그리고 우리는 즐겁게 진흙탕길로 돌아가,
싸구려 눈물이 얼룩을 지워주리라 믿는다.
우리의 매혹된 영혼을 오랫동안 잠재우는
사탄 트리스메기스투스의 악의 베개 위에서
고귀한 금속과 같은 우리의 의지는
이 화학자에 의해 전부 증발해 버린다.

악마는 우리를 줄에 매달아 움직인다!
우리는 불쾌한 것들에서 매혹을 발견한다;
지옥을 향한 하루하루, 우리는 아래로 떨어진다,
두려움도 없이, 악취를 풍기는 어둠을 통해서.

마치 가난하면서 입맞추고 깨무는 탕아처럼
늙은 창부의 가슴을 고문하고,
우리는 지나치며 비밀스런 즐거움을 훔쳐
오래된 오렌지처럼 강하게 쥐어짠다.

죄어지고, 밀려들어오는, 백만 마리의 기생충처럼,
한 무리의 악마들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주연을 벌이고,
그리고, 우리가 숨쉴 때면 그 보이지 않는 강,
죽음이 입 막힌 울부짖음과 함께 내려온다.

만일 강간, 독, 단검, 방화가
즐거운 그림으로 수놓아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애처로운 삶의 시시한 캔버스,
애석하다, 우리의 마음이 충분히 강하지 못함이니.

하지만 재칼, 팬더, 사냥개,
원숭이, 전갈, 독수리, 뱀,
짖어대고 울어대고 크르렁대고 날뛰는 괴물들 사이에서,
우리의 죄의 수치스런 우리 안에서,

그곳에 더 흉칙하고, 더 악하고, 더 추악한 자 있으니
그는 밀지도 제스처가 크지도 울음소리가 크지도 않지만,
뜻대로 세계를 부스러기로 만들어 버리고는
하품 한 번으로 세계를 삼켜버린다.

지겹도다! 본의 아닌 눈물을 맡은 눈,
그는 담배를 피우며 교수대를 꿈꾼다.
독자여, 이 섬세한 괴물을 알고 있을 것이리라;
위선적인 독자, 나의 분신, 나의 형제여! 
(번역 : 윤영애 교수)

'지옥을 향한 하루하루, 우리는 아래로 떨어진다.'는 자본주의가 만든 절망을 시로서 고발한 내용이다. 부르주아지의 모습을 '재칼, 팬더, 사냥개, 원숭이, 전갈, 독수리, 뱀, 짖어대고 울어대고 크르렁대고 날뛰는 괴물들'이라고 비유한다. 이 괴물들은 자신의 죄를 눈물의 기도로서 용서될 수 있다고 믿으며,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다시 추악하게 날뛰는 무리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출구가 없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의 추악상을 그리면서 보들레르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이상의 '꽃'을 <악의 꽃>에서 그렸다.

아래는 보들레르 일대기이다.(작가 류가미 씨 정리. 류가미 씨는 보들레르를 좋지 않게 쓴 전기를 보고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왜곡된 내용으로 일관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일부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은 고치고 부족한 부분은 첨가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1759-1827)는 시대의 풍운아였습니다. 원래 신부였던 그는 프랑스 혁명기에 환속해서 나폴레옹 통치시절에 원로원 사무국장을 지냅니다. 동시에 그는 아마추어 화가로서 그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화가와 두 번째는 보들레르의 어머니와 결혼했습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알퐁스는 나중에 법관이 되고,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 바로 샤를 보들레르였습니다. 샤를 보들레르가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이었습니다. 샤를 보들레르의 어머니 카롤린은 혁명 때,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장교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를 잃고 양아버지 밑에서 자라납니다.

양아버지 페리뇽은 보들레르의 친아버지 프랑수아와 고향 친구였고, 같이 환속한 신부였고, 학교 동창이었고, 그리고 황제 치하의 정치인이었습니다. 페리뇽 집을 드나들던 프랑수아는 거기서 28세의 카롤린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34세 연상이었습니다.

프랑수아와 카롤린의 결혼은 그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금전결혼이었습니다. 지참금 없는 가난한 고아 처녀가 부유한 노인의 재산을 보고 결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결혼일지라도 부부사이가 나쁘리란 보장은 없지만 사실 62세 남자와 28세의 여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경험이란 존경심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프랑수아는 늦게 낳은 그의 아들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아버지 프랑수아는 보들레르와 함께 산책하면서 기품 있는 삶의 자세와 미술에 대한 지식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는 샤를 보들레르가 6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샤를 보들레르의 불행은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보들레르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1861. 5. 6.) 순수한 기쁨과 '앳된 사랑'으로 이루어진 '푸른 낙원'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에게는 '불행한 과부 시절'에 해당되는 이때를 그는 평생 잊지 못하고 마흔 살이 되어서도 그리워합니다. 그때를 그리워한 보들레르의 마음은 시 <슬프고 방황하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34세의 과부 카롤린은 다음해 39세의 육군 소령인 오픽와 재혼을 합니다. 그런데 카롤린은 오픽과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죽은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카롤린과 오픽과의 관계는 보들레르의 친아버지가 죽은 직후에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픽은 카롤린의 내조 덕분인지 훗날 장군으로까지 출세합니다. 오픽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가난한 처녀보다 돈 많은 과부를 배우자로 선택할 만큼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근면성이라는 부르주아지의 미덕과 탐욕이라는 악덕을 골고루 지닌 사람이었지요.

그는 부와 권력을 중요시하는 부르주아지의 사회에서 보기 좋게 성공한 사람이었으나, 대신 꿈과 이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술적인 성향이 강한 의붓아들을 이해할 리가 없었지요.

보들레르는 평생 동안 자신의 두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예술가 기질이 풍부했던 자신의 친아버지를 이상화했고 속물근성이 있는 의붓아버지를 증오했습니다. 사실 사춘기 이후 그의 인생은 의붓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점철됩니다.

보들레르는 18세 되던 해, 선생님과 충돌해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합니다. 교실에서 메모지를 돌렸는데 보들레르는 누가 돌렸는지를 말하지 않은 의리를 지키고 퇴학 처분을 받습니다. 그의 부모는 보들레르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그에게 가정교사를 붙였고 그는 다음해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합니다.

그는 법대생이 되지만, 공부는 하지 않고 문인들과 매춘부들과 어울리기 바빴습니다. 그는 방탕한 생활 덕분에 빚을 지게 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문학을 단념시키고 그의 행실을 고치기 위해, 그를 억지로 인도 캘커타행 기선에 태워 보냅니다.

보들레르는 인도양의 모리스 섬과 부르봉 섬에서 9개월 쯤 머문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그는 의붓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신이 성년이 되었으니, 죽은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때 그가 받은 유산은 10만 프랑이었는데,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따지면, 약 70억 정도가 됩니다.

돈이 생기자, 그는 다시 문인들과 매춘부와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의 생활은 포도주와 해시시(대마초) 그리고 섹스로 요약됩니다. 그는 향락을 위해서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돈을 써버립니다. 그리고 이때 무명의 흑인 혼혈 여배우, '검은 비너스'라고 불리는 잔느 뒤발을 만납니다.

그가 의붓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부르주아지의 가치를 무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듯이, 그는 여성 관계에서 어머니와 못 다 푼 애증관계를 되풀이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름답고 다정한 여자였지만 동시에 돈을 위해서 34세나 위인 남자와 결혼할 만큼 탐욕적인 여자였습니다. 그가 평생 사랑했던 잔느 뒤발 역시 관능적이지만 거짓말쟁이의 여자였지요. 그녀는 평생 동안 보들레르에게 달라붙어 흡혈귀처럼 그의 돈을 착취했습니다.

보들레르는 2년 만에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의 절반을 탕진합니다. 금전관리에 매서운 그의 가족들이 그런 그를 가만두고 볼 리가 없었죠. 그의 가족들은 보들레르 정신 상태가 이상하다고 주장하며, 보들레르가 금치산자 판정을 받게 만듭니다. 보들레르는 방탕하게 낭비를 했지만 그렇다고 정신적인 장애가 있던 사람은 아닙니다. 만약 그가 정신적인 장애가 있었다면 위대한 시인으로 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가족, 더 크게 보아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재산을 탕진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자 정신병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가족이란 공동으로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금치산자 판정을 받은 보들레르는 자신의 유산에는 손을 댈 수 없게 되었고 그 유산에서 나오는 이자 수입에 의존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매달 받는 이자 수입은 200프랑(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140만원)이었습니다.

한 때 돈 잘 쓰던 댄디(멋장이) 보들레르는 이제 빚쟁이를 피해 파리 전역의 호텔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그는 이제 돈 몇 푼을 위해 원고청탁에 목을 매게 되죠. 어릴 때부터 친아버지 프랑수아로부터 미술에 대한 교육을 받은 데다 '그림 숭배를 찬양할 것. 나의 위대한, 유일한 원초적 정열'이라고 여긴 보들레르는 미술에 대한 시각은 뛰어났습니다. 그가 세상에 낸 첫 책은 '1845년 미술전' '1846년 미술전' '1855년 만국 박람회' '1859년 미술전' '들라크루아의 삶과 작품' '현대 생활의 화가' 등은 19세기 최고의 미술 평론이었습니다.

그는 27세 되던 해인 1848년에 2월 혁명에 참여합니다. 그가 2월 혁명에 참가한 것은 정치적 소신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의붓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었습니다. 그의 의붓아버지는 그 당시 부르봉 왕조에서 장군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르봉 왕조를 무너지고 다시 공화정을 들어선다는 것은 그의 의붓아버지의 실각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의붓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그가 의붓아버지가 대변하는 부르주아지의 가치를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돈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는 이러한 속물적인 사회에서는 꿈도 이상도 말라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선택한 것이 방종과 타락이었습니다. 그는 위선적인 부르주아 사회에 반항하기 위해, 악덕의 가면을 씁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입니다. 1857년 36세 되던 해, 보들레르는 청년시절부터 다듬어 온 시를 정리하여 시집으로 출판합니다. 그러나 이 시집에 대한 평판은 최악이었습니다. <르 피가로>는 "추함에 천박함이 아우러진 책이며(...) 마음과 정신이 나간 모든 사람에게 문을 개방한 병원"이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는 법원으로부터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시 6편의 삭제라는 판결을 받습니다. 위고, 플로베르, 생트 뵈브 같은 문인들이 그에게 격려 편지를 보냈지만 그를 좌절에서 구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악의 꽃>이 출판된 1857년은 보들레르가 증오했던 의붓아버지가 사망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는 반항할 상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은 이제 그의 청년 시절이 끝났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는 <악의 꽃>의 실패로 아편과 알코올 속에 빠져 들게 됩니다.

1860년 보들레르는 해시시(대마초)에 대한 체험을 쓴 <인공낙원(人工樂園)>을 출판합니다. 그리고 1861년에 초판에서 삭제되었던 6편의 시를 다시 실어 <악의 꽃>을 출판합니다. 그는 차곡차곡 문인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갔습니다. 반면 그의 생활은 점점 더 나빠져 갑니다.

41세 되던 1862년 그는 마침내 파산을 선고받습니다. 벨기에 문단과 출판사의 제의를 받은 한편으로는 빚쟁이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그는 1864년 벨기에로 떠납니다. 그는 평론을 통해 자신의 시를 해설하고, 반대로 시로서 자신의 미학을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평론집이 꼭 출판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는 강연회의 부진과 출판사의 약속 위반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벨기에에서 그는 한 건의 출판계약도 맺지 못합니다.

45세 되던 1866년, 벨기에에 머물고 있던 보들레르는 갑자기 건강이 나빠집니다. 이듬해 그의 어머니는 그를 다시 파리로 데려가 치료합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그는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보들레르가 묻힌 가족 묘지 안의 묘지.

보들레르 일대기에도 나왔듯이 시인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의 천박성에 몹시 실망하고 여기에 반항한 인물이었다.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반항으로 돈을 물 쓰듯이 써버린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댄디로서 품위를 지키고 정신적 이상을 잠시도 놓지 않았다.

보들레르는 중세 때처럼 신에 의한 구원을 믿지 못하고, 17세기 계몽주의자들처럼 혁명이 평등한 세상을 가져다 줄 것도 믿지 못하고, 18세기 낭만주의자들처럼 사랑이 잔인한 세상에서 마지막 안식처가 될 것도 믿지 못했다. 신의 구원도, 정치적 변혁도, 인간의 사랑도 믿지 못하게 된 보들레르와 그 동료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고 예술을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아름다움을 결사적으로 추구했다.
예술과 아름다움의 추구야말로 선한 사회를 만드는 빛과 소금이라는 진실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보들레르의 시는 인간의 양심을 울리는 '큰 북'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글 : 러브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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