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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단애

2008.05.03 04:49

영목 조회 수:943 추천:41

류인서

어둠의 단애/류인서

 

 

저문다는 것, 날 저문다는 것은 마땅히 만상이 서서히 자신의 색을 지우며 서로의 속으로 스미는 일이라야 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의 그림자에 물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그렇게 한 결로 풀어졌을 때, 흑암의 거대한 아궁이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너를 바래주고 오는 먼 밤, 제 몫의 어둠을 족쇄처럼 차고 앉은 하늘과 땅을 보았다 개울은 개울의 어둠을 아카시아

는 아카시아의 어둠을 틀어안고 바윗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제 어둠의 단애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한 어둠을 손잡아주는 다른 어두움의 손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대구 출생
2001년『시와 시학』등단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학


=====================================
[감상]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는 것이 어둠이라 했다. 너와 내가 섞여서 하나가 되고 서로의 色을 지워가는 것이 어둠의 본래 표정이라 했다. 대저 세상의 이치가 그러함에도 자기만의 조그만 어둠에 갇혀 다른 어둠에 섞이지 못하는 우울한 현실을 ‘너를 바래주고 오는 먼 밤‘에 보았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제 각각의 어둠의 단애(斷崖)에 갇혀있는 것을 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손내밀지 못하고 캄캄절벽처럼 서있는 것을 보았다. 시인은 이중적인 어둠의 모습을 통하여 현실과 당위 사이의 모순을 보고자 한다. 그리고 세상을 절벽에서 구해줄 따스한 손내밈과 온기를 간절히 바라는지도 모른다. [양현근]

어둠의 표정은 한 가지가 아니다. 저물면서, 어둠은 사물들에게 새로운 윤곽을 부여하고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다. 저물어 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문득 어둠의 신비한 작용을 볼 수 있다. 더구나 당신을 바래다주고 오는 밤, 어둠에 서서히 묻혀가는 것들을 보게 된다면, 그때 어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류인서 시인의 첫 번째 시집에서 어둠의 작용은 이중적이다. 우선 어둠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의 그림자에 물들어가는 일”이다. 아니,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두워지면서 사물들은 서로에게 스며든다. 그런데 “너를 바래다주고 오는 먼 밤” 어둠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다. 사물들은 다만 “제 몫의 어둠을 족쇄처럼 차고 앉아” 있다. 밤의 시간 속에서 사물들은 한 결로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의 어둠 속에 딱딱하게 갇혀 버린다.
그것은 너를 바래다주고 오는 먼 밤의 나의 내면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당신을 바래다 준 나는, 어둠 속에서 너의 캄캄한 절벽을 느낀 것인지 모른다. 각기 제 어둠의 단애를 빠져 나오지 못하는 너와 나를 발견했던가. 아니면, 그 속에서 “한 어둠을 손 잡아주는 다른 어두움의 손”을 더욱 간절하게 바란 것일까? (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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