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프로이트로, 프로이트를 넘어 - 로마를 넘어 골고다로

 

시놉시스(뮤지컬을 보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Act 1 예수와 그 제자들 주위에 따르는 군중들이 점점 늘어나자, 제사장들은 이에 위협을 느껴 예수를 제거하려고 하고, 그들의 사주를 받은 바리새인은 창녀 마리아를 이용하기로 한다. 즉, 예수를 유혹하여 동침하면 로마에서 파견된 안티바스 장군과 함께 로마에 가게 해 준다는 그럴 듯한 제안을 마리아에게 한다.마리아는 창녀로써의 삶을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예수를 노골적으로 유혹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한편, 예수의 제자들은 백성을 억압하는 위선적인 율법과 로마의 지배로부터 예수가 구원해 주길 간절히 바라지만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언행에 실망하기 시작한다. 이러는 가운데 예수가 성전을 뒤엎는 사건이 일어나자, 대제사장은 더 이상 예수를 놔둘 수 없어 바리새인을 다그치고, 바리새인이 마리아를 위협적으로 협박하여, 마리아는 예수를 다시 유혹하나 실패하고 만다. 마리아의 이용가치가 떨어졌다는 것을 판단한 바리새인은 마리아를 죽음으로 이르도록 하나 예수가 나서서 마리아를 살려주고 마리아는 예수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다.

 

Act 2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을 살려 준 예수를 집으로 초대하지만, 제자들은 예수가 마리아의 집으로 가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막으나 예수는 자신의 뜻에 따라 마리아의 집으로 간다. 마리아는 잠든 예수를 지키며 순수한 사랑의 고백을 하지만, 예수가 창녀 집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예수를 옭아매는 빌미가 되어 버리자, 절망감에 사로잡힌 마리아는 환각 상태에 빠져든다. 마리아의 유년시절, 고향 막달라에서 로마 군인들로부터 당한 집단성폭행의 고통스러운 순간이 되살아나며 의식이 분열되어 간다. 그 위기의 순간에 예수가 마리아를 찾아 와 깊은 상처로부터 구원해 주고 마리아는 비로소 예수를 진정으로 만나게 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조차 외면당한 채 재판을 거쳐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마리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마리아는 예수가 외롭고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순간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연인으로 기록된다. (여기까지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 홈페이지에서 따옴)   

 

프로이트로, 프로이트를 넘어 - 로마를 넘어 골고다로   

 

여기서 마리아(Maria Magdalena)의 로마는 성적 해방구로써의 로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해 억압된 모든 소망이 ‘Sex'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고향 막달라에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당한 집단 성폭행 자체가 이 뮤지컬이 드러내고 있는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그녀는 고향에서 성폭행을 당한다. 그녀의 고향은 인간 의식 세계의 기저인 무의식의 심층이다. 그녀는 바로 그 고향에서 로마 군인들이라는 표상를 통해 인간의식세계 그 무의식의 심층에서 나오는 인간 행동의 근원적인 욕구, 성충동이나 성욕의 피해자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프로이트의 인간 의식 세계 즉, 이드(Id, 무의식)와 에고(Ego, 자아 자기보존 본능, 쾌락원칙), 수퍼 에고(Super Ego, 초자아, 질서, 규범, 현실의 원칙) 이론으로 이 텍스트를 분석할 수 있다.   마리아 그녀는 로마(에고; 쾌락원칙), 군인(수퍼 에고; 성충동이 제도적으로 억제된)들의 리비도(이드; 성충동)의 희생자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유대사회(수퍼 에고)에서 리비도의 지배를 받아 형성된 자아인 창녀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로마 군인들이나 그들에게 성폭행 당해 창녀로 살아가는 막달라 마리아가 드러내 보이는 정신분석학적 징후는 그들이 리비도를 오도했거나 불충분하게 표출한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병든 것이다. 억압된 모든 소망인 'Sex'가 그 ‘새 여자 되기’라는 그녀의 본원적 소망을 억압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성적 해방구를 찾는다. 그 너무도 문란하여 차별 없는 성적 해방구, 로마행을 그녀는 희구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넘어야할 태산준령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군가를 리비도의 희생자로 만드는 일이다. 물론 강요된 것이다. 그 대상이 바로 예수다. 그런데 그녀에게 그 유혹을 강요하는 집단이 이드만큼 초잔인성을 지닌 수퍼 에고로써의 (대)제사장들의 무리이다. 그녀의 쾌락 본능(자아)을 억제하는 수퍼 에고(초자아) 즉, 율법(주의자)인 그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오히려 그녀의 오도된 무의식의 세계를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매섭게 매질하던 그 집단이 그녀에 그 회초리에 그 남자의 남성을 묻혀 오라고 강요한다. “그 놈도 남자거든 율법을 범하게 해.”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살로메가 아니었다. 예수가 헤롯일 수 없었기에. 그녀는 이브일 수도 없었다. 그가 첫 아담이 아니었기에. 데릴라일 수는 더 더욱 없었다. 그가 삼손이 아니었기에. 그랬다. 그녀는 예수에게 팜므파탈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와 결혼할 수 없었다. 하룻밤 동침할 수도 없었기에. 그리고 오히려 그녀의 안방에서 무사(無邪)한 맘으로 한숨 단잠을 이룬 것 밖에 없는 예수가 그녀의 집에서 자고 나왔다는 비난을 받자 그녀는 절망한다.

 

그녀의 움막같은 안방은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파멸의 자궁이었다. 그들의 꿈 해석이 그랬다. 이 같은 사실은 그들이 스스로 퇴폐적 상상력의 화신임을 고백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리비도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리려던 그들의 정신적 쾌락이 나사렛 청년 예수에 의해 좌절되자 그들은 집단 신경증에 빠져 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를 죽이려든 것이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 그녀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과 몸을 섞은 리비도의 화신들에 둘러싸여 패악질을 당한다. 그들 모두는 순간 ‘이성 밖’의 사람들이 된다. 그토록 그들이 강조해 마지않던 이성적인 품위를 저버리고 그들은 남근모양의 돌덩이를 손에 쥐고 흔들어 댄다. 널 다시 한번 더 죽여줄께! 전도된 성도착증이다.

 

그 로마의 식민지 된 유대 사회가, 도그마에 절은 그 종교집단이 그 자신들이 추앙하던 권력에 성폭행 당해 가학적-항문기적 성격으로 무장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의 성교를 대변보는 것으로 상상한 항문기적 환상으로 예수의 마리아집 유숙을 성교로 상상했고, 그 상상력이 허구임을 깨달아 알자 그들은 좌절하여 가학적 공격을 되려 그녀에게 퍼부어 댄 것이다. 그들은 이성 그 안과 밖을 오가는 혼미(昏迷)다. 프로이트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예수는 ‘이성 위’에 있었다. 예수에게도 성욕이 있었을까? 라는 식의 우문이나,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고 식솔들을 거느렸다는 식의 인간미 넘치는 현답이 여기에서 요청되지 않고 있다. 그런 우문과 현답(?)은 여기서 의미가 없다. 그 프로이트식의 섹슈얼리티는 해답이 안 나온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성 안에도 이성 밖에도 아닌 이성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녀를 구원할 수가 있다. 예수가 율법 안에도, 율법 밖에도 있지 않고 율법을 완성한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왜곡된 리비도의 화신이 된 그녀와 발끈 그녀를 죽이고자 남근석를 치켜 든 잔인한 초자아(무리들)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 중에서 'Sex'가 소망이 아니었던 자가 먼저 ‘Sex'가 전인격인 이 여자를 그 돌로 치라!”   여기에 극적 반전이 있다. 여기에 구원이 있다. ‘새 여자 되기’가 유일한 소망이었으나, 새 여자가 될 가능성이 현실 무망한 세계에 처한 ‘헌’ 여인이 그 로마가 아닌 골고다로 선회하고 있다. 이젠, 헌데나 서로 핥아 줄 수밖에는 별도리 없는 로마가 아닌, 그녀를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는 골고다의 예수에게로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녀는 생애 최초로 Sexless의 쾌감을 누리고 있다. 이드와 수퍼 에고 사이에서 압사되어 가던 퇴행적 자아(가학적-항문기적)가 위에서 임하는(from above) 은총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다.

 

“(그들처럼)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그 정죄는 하나는, 돌든 자 즉,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자(에고)들의 정죄(수퍼 에고)요 다른 하나는 정죄할 수 있으나(수퍼 에고) 정죄하지 않는(above Super Ego) 그분의 정죄이다. 그녀는 정죄할 수 없는 자들의 정죄에 시달려 왔다. 큰 도둑은 저 회당에 있고 작은 도둑은 이 무저갱에 처한 현실에 분노해 마지않던 그녀의 무기력한 분노는 이 한 말씀에 의해 그 기력을 잃는다. 자신과 교접한 자 그 누구도 그녀를 새 여자 만들어 주지 못한 현실 세계가 갑자기 그 아가페적 사랑 안에서 새 세상으로 바뀌는 신비를 맛본다. 끝없이 손가락을 빨아대면 나올 것이 ‘구토’ 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르트르의 실존, 그 한계를 그녀는 여기서 뛰어 넘는다. 그것이 ‘from above’ 다.

 

“나 같은 창녀는 돌에 맞아도 괜찮아 근데 다들 어디 갔어?”   그녀는 그 밤 최초로 단잠을 이룬다. 죄가 깊은 곳에 넘치는 은혜로 ‘새 여자’된 그녀가 ‘내 남자’라고 부르는 예수 안에서. “엄마 나 새 여자로 바꿔줘요.” 울며불며 매달리는 악몽도 이젠 더 이상 그녀에겐 없다.   그녀는 이제 골고다로 향한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는다고 거드름 피우던 그의 제자들이 “왜 당신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길로만 나아가시는가요?”라고 항변하며 달아나 버린 해골의 곳으로 그녀는 달음박질을 한다. 오도된 리비도의 화신이었던 남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옥합을 예수의 장사를 위해 깨뜨리는 그 거룩한 낭비를 아끼지 않은 여인. 한 때,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적 언사로 그녀를 비난해 대던 또 하나의 수퍼 에고(율법)였던 예수의 제자들에게 “당신네들은 나보다 더 예수를 모르는 군요”라고 반문했던 그 은혜를 안 은혜의 여인, 성녀 마리아가 이제 십자가로 향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정욕을 그 십자가에 못 박는 현장에 선다.

그녀는 목숨을 건 네레이터이다.

그녀는 ‘화려한 휴가’의 박신애(이요원 분)다.

아니, 5·18 실제상황하의 전옥주다.   

갈기갈기 찢긴 피가 철철 흘러요   나는 당신을 위해 해 줄 것이 없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 인가요   차라리 예수가 죽기를 바랬어요   

 

이것이 한때, 로마행을 희구했던 ‘헌’ 여인이 십자가를 가장 가까이에 지켜 본 ‘새 여자’ 된 이야기이다.

 

“저가 예루살렘으로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다.” 

“이 서울로, 이 스올(Sheol:음부,무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