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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1444 : 자살예방에 대한 본질적인 대안으로서의 전인 이해

2013.10.05(토)

 

자살 예방 특강을 했다. 

사단법인 한국상담심리연구원(김홍찬 원장)에서 

'자발 예방에 대한 그 본질적 대안으로서의 전인 이해'를 강의 했다. 

 

몸에 대한 바른 이해가 몸을 살리는 지적 도구임을 깨우쳐 주고자 했다. 

방법론이나 스킬이 같은 화학비료, 금비가 아닌 퇴비 같은 강의 내용이다.

 

잘 포장해서,  

널리 전해야 할 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풀어서

 

반응이 좋았다.

생각을 뒤집는, 뒤집어 바른 길 걷게 한 

새로운 아니 원초적 재발견이기 때문이다.

 

 

만사 원론에 충실해야 하고,

만사 정론을 찾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변죽이나 울리는 소리를 질러대는 

난장 같은 강단에서

 

 

 

1. 인간의 구성 요소에 대한 전통적 이론

 

1) 분리설

 

먼저, 인간구조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받는 견해는 인간은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이분설(Dichotomy) 이다. 오늘날 인간관의 저변에는 육신과 영혼에 대한 그리스적 견해가 깔려 있다. 그리스 헬라적 사고에서 볼 수 있는 영(정신)과 육(물질) 의 날카로운 구분인 이분설(Dichotomy)에서 영향을 받은 이론이다. 서양철학의 한 핵심이 영혼과 육신의 분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과 육신이라는 엄격한 잣대로 영혼과 육신 사이의 우월성을 논하곤 한다.

 

헬라 사상의 양대 산맥은 Plato의 이원론과 영지주의이다. Plato는 인간 안에서 영혼과 육신 사이의 연대성을 보면서도 이들의 이원성을 주장하는 이원론자였다. 그는 현상계와 사상계를 구분하는 두 개의 이원론과 영혼과 육체은 두 개의 구별된 본체, 즉 신적 기원을 갖는 사고하는 영혼과 육체이라는 인간학적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는 두 개의 구별된 본체, 즉 신적 기원을 갖는 사고하는 영혼과 육체라는 견해를 제시했었다. 육체는 질료(matter)라 불리우는 열등한 본체로 구성되어 있기에, 영혼보다 저급한 가치를 갖는다. 임종시 육체는 단순히 분해되어 버리나 이성의 영혼(nous)은 만약 그 영혼의 행위의 과정이 올바르고 존경을 받을 만 했다면 “하늘”로 되돌아가서 영원히 계속적으로 존재한다. 영혼은 본질상 파괴될 수 없으며, 보다 우수한 본체로 생각된 반면에, 육체는 영혼보다 열등하며 죽게 되어 있으며 완전파멸의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헬라의 사고 속에는 육체의 부활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Plato의 “죽음의 명상”은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를 드러낸다. 신체의 저질성을 말하고 있다. 헬라사상은 육체는 영혼이 갇혀있는 무덤으로 파악함으로써 육체를 악한 것으로 평가 절하하고 있다.

 

Plato는 영지주의자들처럼 모든 물질이 악하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육은 온통 악 투성이이며 비 본래적인 것은 사악하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그의 육은 영혼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였고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이데아의 세계로 나가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서 구원을 정신의 함양에 달린 문제로 보았다.

 

Plato 사상에서 보는 바, 헬라인에게 육이란 순전히 악한 것이라서 “육체는 무덤”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헬라의 이원론적 사고는 ‘육체의 경시화’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2. 인간 구성 그 분리설의 문제점

 

1) 분열증적 모델

Spykman는 즉 육체보다 우월한 영의 개념, 혹은 물질보다 우월한 정신개념을 “분열증적 모델”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2) 전체성의 단절

Moltmann은 Augustine의 육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 사상을 비판 하면서 Augustine의 영향을 받은 서구의 영혼 신비 사상은 “육체를 배제 시키고, 땅의 자연을 인간 정신의 지배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인격의 가치가 인간의 사귐보다도 높은 것으로 간주되는 서구의 개인주의를 낳았다.” 라고 비판하고 있다. 인간 구성 요소에 대한 분리설이 가져 온 전체성의 단절은 개인주의로 대표되는 개별적이고, 부분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양태를 생산해 냈고, 그 결과 착취, 파괴, 불화를 인류에 선사했다.

 

그동안의 Descartes식 기계론적 세계관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고 물질적인 세계를 하나의 기계로 이해했다. 심리학에 있어서도 이른바 구조주의 학파(structualism)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내적인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구성 요소별로 쪼개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행동주의(behaviorism)학파에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양식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마음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고 무시해 버렸다.

 

이 같은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보기'는, 결국 오늘에 와서 '전체성의 단절'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파생 시킨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견한 결과 총체적 이해를 결여해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쪼개 나가다 보면, 유토피아가 이 땅에 건설되리라 믿었던 인류에게 되돌아 온 것은 착취와 파괴, 불화 같은 것이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뿐만이 아니라, 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여 소위 생태학의 문제가 발생하게된 것입니다. 거기다 더하여 자기만족을 모르는 자본주의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긴밀한 유대 관계로 일정한 균형을 유지해 가야하는 유기체적인 전체의 생명력을 그 욕심으로 여지없이 짓밟아 버리고 만 것이다. 분열되고,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현대 사회를 창출해 낸 것이다.

 

3. 전인적 인간

 

1) 새로운 합의

 

전통적이지만 극단적인 분리설에 근거한 인간 구성 이해는 더 이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20세기 중반 이래로 새로운 합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분법적인 출발점(육과 영혼)은 통일된 결론(인간의 전체성)을 거부한다. 우리는 낡아 빠진 두 초점 안경을 버리고 단일 초점 안경으로 바꾸어야 한다.

 

Herman Ridderbos는 인간 이해의 새로운 기초를 세우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는 ”전 존재로서의 인간은 “몸”(body)라는 결론을 내렸다. “몸”(body)과 “살”(fresh) 사이의 관계를 다루며, “두 표현 모두가 인간 존재의 지상적 층면을 다루고 있는 다른 두 관점”이지만, 그 두 표현은 “현세적인 육체 안에 있는 전 인간을 표현하는 동의어”라는 주장을 하였다. “혼”(soul)과 “영”(spirit)이라는 말의 평행 구절인 “육체”(body)는 “인간존재의 구체적인 양식이며, 사람 자신과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며, 통합적인 인간 이해를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하나의 통일적이고 통전적인 존재인 것과 같이 인류도 하나의 전체라고 생각한다.

 

2) 과학적 절망과 전체성의 부활

 

20세기의 인간 구조에 대한 새 관점은 과학적 진보와 무관하지 않다.

Plato가 제창한 고전적인 영과 육의 이원론은 17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Descartes를 통하여 근대의 주체-객체의 이분법으로 바뀐다.

 

Descartes에 있어서 주체성은 사유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며 몸은 객관적인 사물의 영역으로 전락한다. 주체성은 사유하는 사물이며 몸은 물체적 연장이다. Descartes는 연장된 물체와 같은 몸을 기계로 간주하였다. 사유하는 영과 연장된 물체인 몸의 결합은 뇌 속의 송과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Descartes는 사유하는 영과 연장된 몸과의 관계를 지배와 소유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나는 소유하는 

주체이며 나는 나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

 

Descartes는 몸과 마음이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실체임을 입증하기 위해 물체의 무한분할가능성과 소멸가능성과 피동성에 정신의 분할불가능성과 불멸성과 능동성을 대비한다. 이처럼 몸과 마음은 의미상 서로 명백히 구분되는 개념들을 통해 파악되므로 서로 독립된 두 실체라는 것이다. Descartes나 그의 논점을 어떤 식으로든 수용하는 실증주의적 과학철학 등 현대판 경험론의 관점으로 보면 몸은 마음에 대해 매우 주눅 든 위치로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물질 곧 육체는 ‘끝없이 쪼개지고 끝내는 죽게 마련’이라는 본성으로 보아 그렇지 않은 정신과는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라는 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등장한 양자 물리학의 이론은 Descartes의 분리적 사고에 대한 혁명적 견해가 등장한다.

20세기 들어와서 양자 물리학의 이론이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모든 것을 분리해서 사고하던 뉴튼의 귀납적 세계관은 서서히 물러가고 사고의 혁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양자 물리학에 의하면 한 때 우리가 세계를 서로 분리해서 이해하려 했던 것은 잘못된 시도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가 하나의 총체적인 에너지 덩어리의 실체로서 서로 간에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떤 것도 우주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서로 긴밀한 관계망을 이루고 있다. 데카르트 식의 사고에서 볼 수 있는 서로를 예리하게 분리하는 사고는 더 이상 용납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Descartes식 기계론적 세계관은 육체를 분리하고 세계를 하나의 기계로 이해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유기체도 그 기계적 구성 원리만 알아내면 그 모든 비밀이 밝혀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물질의 최소 단위를 밝혀내면 인간 구조를 이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물질의 최소 단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가설이 원자의 내부를 이루고 있는 아원자(원자 이하; Subatom)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면서 그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도 사라졌다. 그리고 부분적이고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대비되는 전체적인, 통전적인(Holistic), 또는 총체적인(Totality)이란 용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3) 전인건강을 가능하게 한 전인적 인간관

 

전인적, 통전적 인간 이해는 인간의 전인건강을 가능케 하는 키워드이다. 전인건강(Holistic Health)이란 한 인간이 영적, 정신적, 신체적 차원과 대인 관계적 차원 및 대사회적 차원, 자연 환경적 차원에서까지도 성숙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의 전일적(Holistic) 결합체로써의 ‘몸’(Body)에 대한 재인식은 그 이론과 실제에 있어 두루 적용되는 실천적인 성찰이다.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법(또는 삼분법)에 매몰되어 상대적으로 ‘육신’을 경시해 왔던, 영적 억압에서 전인적 인간관으로 ‘몸’이 해방되는 신비를 우리는 경험할 수 있다. 더 이상 시대착오적인 분열증적 모델에서 벗어나 온 몸이 연합하여 우리 ‘몸’ 안에 평화를 이뤄 나아가야 할 것이다.

 

4. 전인 건강은 최우선적으로 건강한 자아에 기반을 둔다. 관계로서의 자아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실패함으로 전인건강을 누릴 수 없게 된다.

 

전인 건강을 누리며 살아야 할 한 인간 존재가 병들었다는 말은, 그의 영혼이 절망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고, 그의 몸은 두려움과 다른 파괴적인 감정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으며, 이것이 그의 몸의 회복 기능을 저하시켰다. 다시 말해서 그는 ‘총체적’으로 아픈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전인 건강을 누리지 못하여 탈진한 이유는 관계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Kierkegaard는 “자아란 무엇인가”를 자문한 다음, 이 중요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 다섯 가지 제한 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a. 자아는 관계다.

b. 자아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c. 자기 자신과의 관계인 자아는 타인 안에서, 그리고 이 타자와 연관된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확립된다.

d. 관계로서 자아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게 되면, 자연히 타인과의 관계도 실패하게 되며, 그 결과 이중적인 단절의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e. 자아는, 자신을 창조주 안에서 투명한 상태로 안식할 때에야 비로소 이런 절망이 뿌리째 완전히 제거되고 치료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1) 자기 자신과의 건강한 관계 속에서 전인 건강은 가능하다.

 

관계로서의 자아가 자신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은 인간의 구성요소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 철학은 영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인간을 공동체를 이루는 몸, 마음, 영혼의 일체성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인생의 각 단계마다 몸과 마음과 영성이라고 하는 자신이 받은 고유한 선물을 가능한 한 골고루 충분히 개발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애(自己愛)야 말로 전인 건강을 이룬 온전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건강한 자아로 남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받은 고유한 선물을 개발하도록 격려함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자신의 직업과 취미를 사랑하게 되고, 지구를 돌보고 지구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도록 도움으로써 우리의 어머니인 지구와 지구상의 생명체들의 경이스러운 관계망(network)을 사랑하게 되며, 모든 치유와 전인성의 원천인 성령을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별하거나 분리 될 수 없는 하나, 영과 혼과 육으로써의 인간은 영적으로는 영성적 삶의 촉진과 감격을, 혼적인 차원에서는 마음을 건강하고, 힘 있게, 육적인 차원에서는 건강한 몸 관리로 전인적 건강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

 

① 우리의 행복을 위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가끔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그 필요성이 가려지기는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능력과 가능성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St. Augustine은 “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되 주를 위하여 창조하셨으므로, 우리가 주 안에서 쉬기까지 우리에게는 쉼이 없나이다.” 라고 고백 했다.

 

② 전인 건강을 총체적으로 극대화 시키는 열쇠 중 또 하나는 정신건강과 생동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생각, 태도, 지각, 감정,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마음은 인간을 건강하게하고 치유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병들게도 하고, 치유 받지도 못하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몸과 영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치유할 수도 있는 마음의 힘은 계속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과학적 연구조사는 실직, 이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 등의 결과로 부정적인 신체 변화가 일어나고, 반면 애완동물을 기르거나, 정신 치유, 영적 치유, 고통스러운 결혼관계의 해소 등으로 긍정적인 신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인간의 가치와 질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전인 건강을 위해 마음을 힘 있게 하는 것(Empowering Your Mind)이 중요하다. 자존감(나도 천부적이요, 삭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 깨닫는 것), 능력(나는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사회에 중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힘(지식과 기술)), 내적인 힘(나는 나 자신을 지도하고 이웃들에게 건설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끼칠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인간됨의 기본적인 조건들로서 이 세 가지 욕구들이 충족될 때 우리의 마음은 힘을 얻게 된다.

 

③ 우리가 전인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우리 몸에 더욱 많은 애정을 가지고 관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적 전인성에 높은 대가를 지불할 때만 건강한 자아를 가질 수 있다. 가능한 한 생동하는 건강한 몸을 갖게 하는 것이 영적 전인성 뿐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전인 건강의 강력한 기초를 놓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우리의 총체적인 전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

 

효경(孝經)에도 공자위증자왈(孔子謂曾子曰): 공자가 증자에게 말하기를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 입신행도하여 양명어후세하여 이현부모가 효지종야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몸과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님에게서 이를 받았으니

감히 훼손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요,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서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님을 드러내드리는 것이 효도의 끝마침이다. 《효경(孝經)》

 

내 몸은 모두 부모님께 받았다. 그러니 감히 훼손하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자해(自害)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요, 성경은 더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을 박해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제 몸을 아끼는 것, 그것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요청되는 효의 시작(孝之始也)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성경/고린도전서 6장19절)

 

우리는 세속의 삶을 버리고 자신의 육체를 어거해 가면서 수도하는 자들의 삶이 더 위대한 영적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영혼처럼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것도 영적인 훈련이다.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 듯, 건강한 자아는 영과 혼과 육이 내 안에서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는 이분법적인 인간 구성요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자신의 몸을 대할 때 우리는 자신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할 수가 없다. 온몸과 영혼이 함께 건강해 지는 것 그것이 전인적 인간 이해가 총체적 전인건강을 이루는 비결이다.

 

2) 나와 너와의 건강한 관계 속에서 전인 건강은 가능하다.

 

배타적 인간관계는 건강한 자아를 갖게 할 수 없다. Kierkegaard의 말대로, “타인 안에서, 그리고 이 타자와 연관된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가 확립된다.”면 우리는 편협한 신앙, 계급주의적인 가치관, 인종차별, 성차별주의 등에 경사된 타인관은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자아를 형성케 할 수가 없다.

 

건강한 자아, 건강한 타자관은 ‘다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될 때만 가능하다. 인간관계가 타인 안에서 그리고 타자와 연관된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확립된다는 면에 있어서 나와 너의 다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Jones에 의하면 사람들은 다름(Different)을 다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름을 틀림(Wrong)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는 바로 이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여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계급주의적인 가치관, 인종차별, 성차별주의 등의 실례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차별 지수를 객관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국가인권위원회법 조항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30조 (위원회의 조사대상) 2항

 

② 평등권침해의 차별행위라 함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 된 전과, 성적(性的) 지향, 병력(病歷)을 이유로 한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김창국 위원장(64)과 주간동아와의 특별 대담을 통해 “차별을 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제는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특히 인권위에 가장 많이 접수된 사항이 장애인 차별이다. ‘한 나라에 장애인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다. 인권위는 ‘장애로 인한 교수 임용 차별’ 사건 등에 대해 시정을 권고하고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기는 여전히 힘겹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외국과 다른 독특한 한국만의 차별 문화가 있다고 보는가? 라는 물음에, “선진국에서 두드러지는 차별로는 인종, 고용, 종교 차별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차별은 지역, 성, 전과자 차별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차별 행위가 시대적으로 달라지는 특성이 있는데, 권위주의 시대에서는 전근대적 차별 문제와 지역 차별이 가장 심각했다. 최근엔 고용 형태가 급변하며 비정규직 차별 문제가 새롭게 등장했다.”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차별을 넘기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 라는 물음에, “차별 문제는 기본적으로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누구든 자신과 다를 수 있고, 다름으로 인해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넓게 퍼져야 한다. 인권위가 설립되고 수많은 차별 사건을 조사해서 권고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제야 ‘아, 그게 차별이었구나’ 하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쌓이고 차별과 관련한 각종 제도 관행 정책 법령 등이 마련되면 우리 사회의 차별 문제도 크게 나아질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다름을 차이가 아닌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그 의식구조에서 파생된 차별의 병리현상은 우리의 전인 건강을 해치는 흉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 의한 전근대적인 ‘계층적 이원론’(Hierarchial Dualism)이 한국 사회에 여전히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데 있다. 정신과 물질,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을 계층적으로 확연히 구별하는 존재의 계층(a Hierarchy of Being)적 사유는 엘리트 남자를 정점으로 창조세계 안에 지배와 종속의 억압체계를 허용했고, 결과적으로 반여성적이고 반생태적 태도를 초래하게 하였다. 특히 유교전통이 기반이 된 한국사회는 가치 서열적 사유와 이원론에 기초한 가부장적 영향으로 다름에 대한 차별은 그 도를 넘고 있다.

 

3) 인간과 자연의 건강한 관계 속에서 전인건강은 가능하다.

 

20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인류의 최대의 화두는 단연 생태계의 위기일 것이다.

 

Clinebell은 경고한다. “만일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와 더 넓은 세계의 상처를 무시한 채 당신 자신의 전인성을 극대화하려고 애쓴다면 당신은 막다른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개인주의적인 전인성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오류라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은 환경 속에 존재하기도 하고 환경의 일부이기도 하다.(All living things are both in and of the environment).⋯그것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없이 서로 뒤얽혀 있는 상호 의존성(interdependency)인 것이다. 만일 전체 가운데 어느 한부분이 불건강하다면 우리는 전체 중에서 다른 각 부분도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해야만 한다.⋯우리는 지구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의 각 세포가 우리의 일부분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구의 일부분인 것이다. 또 모든 질병은 당연히 환경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병든 지구의 문제는 우리의 삶의 육체적인 면에만 위협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들은 우리를 내적인 혼란과 좌절, 분노와 절망, 무력감이라는 마비된 느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Moltmann은 이렇게 답한다. 생태학적 위기와 자연 파괴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인식될 수 있고, 지배될 수 있고, 이용될 수 있는 이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로 이해하고 자연 그 자체를 존경하는 일이다.

 

환경정의가 실현되는 세계 공동체(a Global Community of Eco-Justice)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모든 경계선과 차이를 넘어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모든 인간들을 포함해서 상호의존성을 갖는 전체 생명체와 우리가 심오한 하나임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임을 깨닫게 되면 새로 태어나는 듯한 활기와 우리가 성령의 동반자요 공동창조자임을 느끼게 된다는 굉장한 선물이 주어진다.

 

Buber는 생명체의 거룩함에 대한 감각이 자연계와 우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 시키는지 묘사한다. “나는 나무 한 그루를 명상한다. 그리고 내가 그 나무를 명상하는 동안 만일 의지와 은총이 합세한다면 나는 하나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되며, 그 나무는 이미 그것(it :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인 그것 - 역자 주)이 아니게 된다.”

 

4) 인간은 건강한 사회관계 속에서 전인건강은 가능하다.

 

오늘날 현실적 사회관계는 소외되어 있다. 거의 모든 현대인들이 심한 소외 의식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다. 현실적 사회관계가 인간들을 참된 인간성에도 이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회의 소외현상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령과 성(性), 신체적・정신적 처지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본성적 내지 자연적 부동성(不同性)은 도외시하고라도 세계 안에는 사회 불평등과 불의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현대의 산업 사회는 인간의 소외가 극도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격적인 관계가 비인격적인 이해관계에 의하여 밀려나고, 개별 인간은 대중 속에서 고독을 체험한다. 최대한의 이윤 추구를 지상 목표로 내세우는 사회 구조는 인간을 왜소화시키고 고립 시키는 것이다. 산업 사회에서 정신 질환자가 급증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현대의 사회 구조에서 인간은 자아를 충만히 실현하기보다 자아의 의미를 상실하는 심각한 소외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a. 우리 사회-문화의 비인간화(비전인적) 현상들

 

1) 폭력의 신화 - 희생양 만들기

 

문예 이론가이며 인류학자인 Girard는 새 질서를 세우려는 자들은 여러 경쟁자를 만나게 되며, 그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새 질서가 이룩되는데, 그때 발생하는 폭력을 기원적 폭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창건자를 정당화시키는 종교의식은 그 기원적 폭력을 신화의 형태로 숨기고 있는데, 그 신화는 창건자가 저지른 박해를 긍정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즉 신화(神話)란 '희생된 자들의 유죄성(有罪性)을 믿도록 하는 사형 집행인들이 왜곡하여 쓴 텍스트'인 것이다. 그런데 신화는 이런 박해 기제를 간직하고 있다. Girard는 박해의 텍스트(교본)에는 4가지의 정해진 틀(상투형(常套型)이 있다는 것이다. 이 상투형들은 1) 폭력은 실재하며 2) 위기도 실재하며 3) 희생물은 죄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표지(標識) 때문에 선택되며 

 

4) 희생물이 이 위기의 책임을 떠맡고 그 공동체에서 쫓겨난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도식은 보편적이며, 어느 사회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식을 교묘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신화라는 것이다.

 

a) 한국 사회 대표적인 희생양의 표지(標識) - 지역, 전과자

b) 한국 사회 대표적인 희생양의 표지(標識) - 장애인

c) 한국 사회 대표적인 희생양의 표지(標識) - 여성 

 

‘희생양’은 누가 되는가? 욕망 지배적인 인간 집단의 문화적 가치에 이질적이거나, 일탈적이면서도 자신을 집단의 폭력으로부터 방어할 수 없는 무력한 자가 바로 ‘희생양’이 된다. 자기 방어 능력이 전무한 이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장애인들이다. 이러한 ‘전체빼기 하나‘로서의 ‘희생양’은 역사 속에서 마녀 사냥이나 반유대주의, 그리고 노예 제도 등을 만들어 낸 동기가 되었으며 현재 우리 사회에게 경험하는 장애에 대한 편견과 폭력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한 나라에 장애인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선진국에 비해 유독 장애인이 살아가기에는 힘든 사회이다. 장애인들은 희생양의 대표적인 표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장애인들에 붙은 희생양의 표지는 부정(不淨)만이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백인중심사회에서 유색인종이 온갖 편견과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듯이 능력이나 생산성(生産性)을 주요 가치로 내세우는 사회에서 신체 능력에 장애를 입은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과 무시와 차별은 자연스레 통용된다.

 

그 표지는 부정(不淨)과 무능(無能)이다.

 

청소년을 자살로 모는 왕따. 학교폭력의 주된 대상이 이같은 희생양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Irigaray의 지적처럼 “서로 다른 성별의 문제는 다른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종족적 문제들 보다 더욱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인간은 단독존재가 아니라 공동 존재이다.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고 자신의 존재를 개발할 수도 없다. 남자와 여자는 상대방과의 전인적 관계를 맺는 가운데 고립 상태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존재의 충만에 이르게 된다.

 

5. 사회문화적 새 기운 - 사회 문화변동과 시대정신

 

1) 몸 담론의 등장

 

몸(Body Leib) 은 2000년 이상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남성의 지배, 즉 성적 이원론에 의해 억압되고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결국 몸에 대한 정신의 지배, 감각에 대한 인식의 지배, 감성에 대한 이성의 지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한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부터 ‘몸의 복권’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최근의 몸은 현상학, 페미니즘, 비판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철학에서 논의 되고 있는 주제이다. 현상학에서는 마음과 몸의 이분법을 넘어서 몸은 단지 물리적인 사물이 아닌 의지 기관이며,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선객관적이고 선의식적으로 이해하며, 세계를 통일된 것으로 파악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현상학에 따르면, 몸과 세계는 서로 작용하며, 몸은 타자와 관계를 맺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또한 몸-주체는 실천적인 능력을 갖는다.

 

2) 웰빙(Well-Being)문화

 

몸의 담론의 등장과 때를 맞추어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 안에 보편적 문화 현상으로 떠오른 용어가 웰빙이다. 건강한, 안락한, 만족한(Well) 삶(Being)을 살자는 문자적 의미로서, 행복. 안녕. 복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우리말 운동 단체’에서는 ‘참살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부르고 있다. 웰빙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현상과 관련된 용어이다. 웰빙이 보편적이라는 말은 건강하고, 안락한 삶은 온 인류가 역사 이래 갈망해 온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 근원이 60-70년대 미국의 히피족, 80년대 여피(Yuppi), 90년대 보보스(Bobos)족의 삶의 양식에서 기인한 이런 웰빙 바람은 공통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평화를 찾으면서 몸과 마음, 일과 휴식, 가정과 사회, 개인과 공동체가 잘 조화된 삶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바람은 2002년에 이르러 국내에 웰빙 바람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건강음식(유기농), 건강운동(요가, 참선), 건강생활(여행, 등산, 독서)을 추구하는 웰빙족의 등장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2003년에 이르러 국내에서는 이런 웰빙 문화나 웰빙족을 겨냥한 산업이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런 ‘웰빙’ 개념이 현대인의 삶 속에서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강력하게 부각된 이유가 무엇일까? 김석수는 그의 논문 “현대 웰빙(Well-Being) 문화의 발생 원인에 대한 분석과 미래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모색”에서 현대 웰빙 문화 현상을 이렇게 진단하고 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웰빙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웰빙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정신권력의 거대서사와 물질권력의 거대서사의 억압에서 탈출구를 찾고자 하는 현대인의 삶의 지향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웰빙문화는 의식을 쉬게 하고, 신체를 쉬게 하는, 그래서 의식과 신체가 조화를 이루는 놀이를 지향하는 문화이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웰빙문화는 몸을 정신권력과 물질권력의 감옥으로부터 구출하고자 하며, 실재(원본)로부터 이미지를, 의미(기의)로부터 표현(기표)을 탈출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또한 이 문화는 무의식의 욕망 세계를 의식의 규범체계로부터 구출하고자 한다. 따라서 현대의 웰빙문화는 몸놀이, 이미지놀이, 무의식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웰빙 문화는 철학적, 사상적 ‘몸’의 변천사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변천사는 크게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의 몸에 대한 이해, 그 차이에서 기인한다. 대체적으로 근대 이전의 서구의 역사에서는 육체의 문화는 저급한 것으로 규정되었으며, 따라서 육체적 가치에 관계된 부분에 참여하거나 속해 있는 주체들은 천민 부류에 속해 있었다. 또한 품위 있는 삶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문화는 이런 부당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의 역사를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바로 물질적 가치, 육체적 가치를 중시하는 부르주아지들이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상업적 정신, 기술적 정신을 부각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욕구 억제적인 삶보다는 욕구충족적인 삶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정신에 짓눌린 육체를 중시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오랜 시간 영혼의 감옥이었던 육체가 근대 이후 이 시대 정신의 화두가 되어 몸의 시대를 열고 있다. 물론 이 몸의 시대는 근대 이전의 육체(Hyle)를 저버린 정신(Nous) 절대주의나 근대 이후의 의식과 육체가 결탁한 절대주의 모두를 넘어서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적 경향은 당연히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웰빙 현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웰빙 문화는 21세기가 요구하고 있는 당연한 흐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놀이가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순수하게 진행되고 있지 못하다. 오늘날 웰빙 문화와 더불어 전개되는 놀이는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된 놀이가 아니라 또 하나의 권력놀이, 최소한 문화계급의 놀이가 되고 있다. 이처럼 놀이의 전략화(여가산업, 건강산업 등)가 또 하나의 권력을 산출함으로써 지배의 악순환이 재연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웰빙 문화가 제대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몸과 이미지와 무의식을 미끼로 삼아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문화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해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어야만 진정한 웰빙의 시대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해결은 국가기구나 거대기업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활세계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생활인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활세계의 주체들은 진정한 웰빙 문화, 이른 바 건강한 정신과 육체가 함께 조화되어 노닐 수 있는 몸의 문화운동의 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영혼일기 82: 故 최진실

2008.10.02(목) 

 

사건은 사건으로 덮는다더니, 정말 그렇다.

 

故 최진실.

그녀는 41살을 일기로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한때,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어쩔 수 없이 드러내 보이며 울부짖던 그녀가, 일시 재기하는 듯하더니, 과연 그 무엇을 감추고 싶어 그리도 모질게 생을 마감했는지. 바보같이 오히려 감출 수 없는 진실,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만인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떠났으면서.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은 그의 저서 『이미지』에서 “스타란 의사사건(pseudo-event)이다”라고 말한다. 이 정의를 리차드 다이어(Richard Dyer)는 이렇게 해설한다. “스타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 의미는 비어있다. 따라서 스타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지 어떤 재능이나 특정한 자질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용모상 사소한 차이를 기반으로 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유명인의 본보기다.”

 

지금 아내가 켠 방송에서 그녀를 부검하기로 했다는 끔찍한 말이 튀어나오고 있다. 그래봤자. 그녀는 비어있을 것이다. 그녀의 재기를 도왔던 억척주부 맹순이의 이미지는, 오늘 우리에게 그 이미지가 빈 의미,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허구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 우린 이미 그 맹순이와 감정적 친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며 고혹적인 마력으로 뭇 남성들을 휘어잡았던 환영에, 우린 빠져있다. 투사(projection) - 우리는 그녀에 몰입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그녀의 파경에 대해 그 여자하기 나름, 을 기억해 내며, 그 남자보다 그녀를 더 미워했다. 그녀의 남자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그 남자는 그 남자의 잘못된 삶의 결과였을 텐데도 말이다. 그녀는 그 어떤 남자도 이상적인 남자로 만들었어야만 했다고 우리는 우겨댔다. 내가 그랬다.

 

그녀는 섭섭했을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 주지 못하는 관객들에 대해서. 그래서 그녀는 그 어미에게, “세상 사람들이 섭섭하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 것일까? 그녀는 비어 있었고, 허약했다. 몸무게가 39kg뿐이었다고 방송은 말했다. 그런 그녀가 맹순이 같아야만 한다고 세상은 우겨댔다. 그러나 그녀는 공공연하게 새벽이 외롭고, 무섭다고 말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영혼의 감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혼의 감기는 아무나 걸리는 것이 아니다. 비어 있고, 허약했기에 그녀는 그 무병(巫病)을 앓았다.

 

레오 로웬달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이성을 완벽하게 발휘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천재들, 홉스, 루소 같은 사상가, 니체, 칸트와 같은 철학자,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와 같은 창조적인 예술가,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학가, 뉴턴이나 에디슨 같은 과학자들을 생산적 우상들(idols of production)이라고 명명했다. 이런 과거의 우상들이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위대함과 천재적인 능력으로 인한 불멸의 영웅이라면 현대의 우상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존재로서 명멸하는 스타들이다. 그래서 현대의 우상들은 소모적이며 명멸하는 순간적인 존재이다. 현대사회에서 매스미디어를 통한 문화산업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첨병과 같은 존재로서 로웬달이 말하는 소비적 우상들(idols of consumption)을 생산해 냈다.

 

고 최진실의 죽음에 대해 우리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문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넘어, 우리의 비고, 허약한 대중문화의 병폐를 제 것 삼으려는 이들이 줄을 이을까 걱정이다. 소비현상으로서의 스타에 대한 관객과의 관계설정이, 상당수의 대중들에게는 ‘자기동일시(self-identification)'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방범죄, 베르테르효과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 소비적 우상들을 그렇게 소비해서는 안 된다. 지난 80년대 분신정국처럼, 90년대 연이어 터진 각종 대형 사고처럼(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등), 최근 몇 해 동안 연이어 터진 스타들의 자살행진은 그런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전 외형적 부실로 각종 건축물들이 무너져 내렸다면, 이젠 내적 부실로 우리는 영혼의 감기를 앓다가 극단으로 자신을 내몬 우리의 허약한 문화정체성을 대하고 있다. 그 영혼들은 한 결 같이 고독했다.

 

W.E 오츠(Oates)는,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은 자신의 영역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우울증 환자는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 곁에 항상 붙어 있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영역엔 살비비고, 땀내음을 공유할 남편이 없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동거하는 또 다른 남자가 있어서 자살하지 않은 것 아니었을까? 그 어떤 남자든, 아니 사람이 그 곁에 있었기에 그는, 구원을 얻을 기회를 얻은 것 아니었을까? 바보 같은 최진실, 다른 남자라도 옆에 끼고 살 것이지, 그 메시야를 만날 때 까지. 故 최진실은 MBC 무릎팍 도사에게 그 밤의 시린 고독을 당신이 채워 줄 수 있겠느냐 따져 물었었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종교는 다른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혼자만의 영역으로서의 고독을 처리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무릎팍 도사(道士)에게 그런 구원을 요청했었던가 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녀도 기독교신자였다는데, 故안재환도, 故이은주도 역시 크리스천이었다는데. 그런데, 그 종교도 그를 구원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 그 종교가 아니라, 그 예수를 믿는 이들이 그녀의 사랑의 대상일 수도 없었단 말인가?

 

오츠의 글이다. "어떤 여 환자가 병원 원목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은 목회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본다는 말은 이제 그만 해 두시고 당신들이나 우리를 도와 줘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지는 당신들의 행동에 따라 우리 스스로 결정하겠어요!”

 

한때 내게 너무도 사랑스러웠던 청춘. 그러나 파경 무렵 내 미움덩어리였던 여인. 그러다 맹순이로 회복되면서 다시 내 안의 연인이었던 故 최진실. 그녀는 예뻤다.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종교가 이 시간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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