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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1181: 여호와는 나의 현찰이시니……♫
2013.01.13(주일)

시편 23편을 읽는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다.

오늘은 지난주 시편121편에 이어 시23편을 본문 삼아 설교를 했다.

속출하는 자살자들의 위패에 한 결 같이 십자가가 걸려있다.
감히 망자의 면전에 대고 그(그녀)가 어떻게 죽었건 시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의 위패에 훈장처럼 걸린 십자가 문양에 대해서도 굳이 시비하지는 않을 거다. 위로 차원에서 십자가를 조화처럼 여기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목사인 나는 그 위패 속의 십자가가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다.
교회는 뭐했는가?
아니, 저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을까?


먼데 북극성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추상적인 존재로만 여기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그 누구나 겪는 생의 위기와 고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아주 먼, 존귀하여 근접할 수 없는 상징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입으로만 하나님을 말할 뿐 정작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경우에도 내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렇다. 우리네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불경스럽게도 아니 놀랍게도 다윗은 하나님은 목자라고 부른다. 오늘이야 신약의 복음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친근한 아량을 베풀었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부담이 없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다윗이 하나님을 왕도 아닌 양치는 목동을 지칭하는 목자라고 부른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발상이었을 거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감히 목동(목자)로 비유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오늘 시편23편에 첫머리에 나오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구절을 우리는 목가적인 낭만의 대상 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우리는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은유를 즐기고 있다. 낭만적인 성가곡의 주인공이자, 시낭송회에서 목가적 낭송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일 뿐이다. 

그런데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한 것은 문학적 상상력에서 우러른 것이 아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양치는 목동이었다. 양들의 목자였다. 사무엘상 17장에서 어린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자신을 만류하는 사울 왕에게 자신이 목자로서 양떼들을 맹수로부터 지켜 낸 용맹스런 행위를 설명하고 있다.

“다윗이 사울에 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17:34-37).”

그의 하나님은 그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 른 하나님이다.

다윗의 위기관리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그는 위기 때마다 자신을 건져주신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네 힘을 다 해 봐!”

한 아버지와 아들에게 주문한다. 집 앞마당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 몸집만한 돌덩이를 들어 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들은 너무 큰 돌덩이에 겁을 먹고 그 돌을 들어 볼 생각을 못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그친다. “한 번 들어 봐.” 아들이 마지못해 돌덩이를 들어 본다. 끄떡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 못 들겠어요.” 그러자 다시 아버지가 아들 에게 거듭 요구한다. “네 힘을 다 해 봐.” 아들은 다시 돌덩이를 들어본다. “아빠 끄떡도 안 해요. 끄떡도.” 그런데도 아버지가 또 다시 아들에게 요구한다. “네 가진 힘을 다 동원해 봐!” 아들은 못마땅해 하면서도 또 다시 제 몸집만한 돌덩이를 들어보려 안간 힘을 다한다. “아빠 보셨잖아요. 내가 가진 젖 먹던 힘까지 다하는 모습을. 정말 방법이 없어요.” 아들이 주저앉는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나무란다. “너는 네가 가진 힘을 다 동원하지 않았어?”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아빠가 직접 보셨잖아요? 내가 죽을힘까지 다하는 것을.”

그러자 아버지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던진다.

“아냐, 너는 네 가진 힘을 다하지 않았어.”
“……”
“너는 아빠인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어.”
“네에?”
“그래, 네가 가진 힘이란, 이 아빠의 힘까지 포함한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의지 하지 않는다.

왜일까?
믿음이 없어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 걸까?
아니다.
우리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 민족이 없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힘이 내 힘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위 예화에 나오는 아들처럼 자신의 힘만 자신의 모든 힘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편기자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라고 고백했다. 여호와의 힘이 ‘나의 힘’이라는 말이다.
미소년 다윗도 그랬다. 골리앗 앞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구사했다. 즉 자신의 힘인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그는 구사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5-47).”


해답은,
내가 여호와를 어떻게 부르는가에 있다.

어린 다윗이 여호와의 힘을 의지했던 이유는, 여호와에 대한 그의 호칭에 있다. 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 이유도 우리가 부르는 여호와에 대한 호칭 때문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내 것 삼을 수 있는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달려 있다.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불렀다. 그가 체험한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처럼 양떼를 지켜주시던 목자셨다. 생생한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른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응급실이나 현금자동지급기 같은 분이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이런 여호와에 대한 호칭은, 우리에게는 목가적 낭만만 선사할 뿐이다.
그림의 떡 같은 하나님이실 뿐이다.
우리는 실감나는 여호와의 호칭을 택해야 한다.
이 고백은 우리 피부에 와 닿게 바꾸어 보자면,

여호와는 나의 현찰이시니……♫

귀에 쏙 들어오지 않은가? 맘에 확 들지 않은가? 여호와는 나의 현찰이시니, 라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고, 손에 쥐어지는 호칭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불러라. 그래야 여호와의 힘을 우리는 때마다, 일마다 의지할 수 있다. 여기 성경에 나타난 단적인 예가 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자신의 힘이신 여호와는,
나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그 안에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다.

당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라.
여호와는 나의 (                     )이시니.
괄호를 채워보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여호와는 나의 현찰이시니……♫

현찰이신 하나님께 구하라.
119이신 하나님께 SOS를 쳐라.
아빠이신 하나님을 졸라라.

네 힘을 다 해 봐!
아빠 아버지의 힘까지 동원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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