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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예식설교 1233: 설교/날마다

2013.03.24 19:29

김성찬 조회 수:778 추천:20

영혼일기 1233 : 날마다
2013.03.23(토)

중앙교회 새벽예배 설교  2013.03.23(토)

 

제목 : 날마다
본문 :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금번 2013년 중앙교회 특별새벽기도회의 주제가 ‘예수님이 가신 길, 내가 따라 가야할 길’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바로 오늘 제가 택한 본문이 그 주제의 배경되는 말씀임을 발견했습니다. 정곡을 찌른 듯, 일치된 영감이 선사한 영적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오늘 말씀의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를 죽이려하고 있다. 그러니 그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유대지역으로 피신하라는 바리새인들의 충고를 듣습니다. 이 충고 아닌 충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본문에 나타 난 “내가 갈 길”
즉, 예수님이 가신 길은 어떤 길입니까?

마가복음 10장 45절이 그 길의 성격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러 오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속의 길을 가심에 있어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유혹이나, 비난이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라는 선언 속에서 우리는 사명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가신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발견합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Christlikeness, 예수 같음, 예수 닮기입니다.

내가 따라 가야할 예수님이 가신 길은, ‘예수 같음’으로만 다다를 수 있는 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중에서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이라는 부분에 주목합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사명의 길을 완주하시고, 승리를 이루신 키워드를 발견합니다. 여기에 우리 성도들이 따라 가야할, 예수님이 가신 길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는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그 비결은
날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복음이 말하고 있는, 교리나 신앙고백 위에 굳게 서야 하지만, 동시에 그 복음을 실천하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날마다’는 실행파일과 같은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본디 목적을 이룰 십자가의 길, 그 길을 길 되게 하는, 길 위의 언어가 ‘날마다’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날마다의 승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승리만을 믿고 무사안일에 몸을 누이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가 죽어할 사명의 땅 예루살렘을 향하여 날마다 전진하셨습니다.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는 구세주의 사명에 대한 자부심을 안고, 아무데서나 죽지 않는, 피할 수 있으나 피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어제처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예수의 길을 가셨습니다.

쉼 없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쉼 없는 신앙의 전진이 가능하던가요?

저희 교회 큰 믿음을 지니신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느 날 뜻밖의 이런 통보를 해 왔습니다. 쉬겠다는 겁니다. 주일을 쉰다는 겁니다. 주일 성수를 위해 가게 문을 닫겠다는 말이 아니라. 주일날 예배를 잠시 쉬겠다는 겁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내 나는 그분의 쉼을 허락했습니다. 쉰댄다. 그래 쉴만도 하지. 쉬어라, 쉬어. 푹 쉬다 돌아오시라. 난 그렇게 기도만 했습니다. 아멘도 잃은 흐린 그녀가 마른 이삭에서 아멘을 탈곡해 내려 몸서리를 치고 있는 영적 실상을 내가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이 믿기지 않는 그녀의 풀리지 않는 현실이 눈물겨웠기 때문입니다. 해서 난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탈진이 로뎀 나무 앞에로 몸을 숨긴 엘리야의 모습과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분은 한 달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맘이 곤한 이인 그녀가 눈물범벅이 되어 십자가의 길로 돌이켰습니다.


날마다는 힘듭니다. 굴곡 없는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서만이 골고다로 난 십자가의 길을 향해 날마다 쉼 없이 가셨습니다. 주님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그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끝내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9:23,25).”

날마다에 제 목숨이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에 승리한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그의 자랑은 날마다 죽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서전 같은 고린도후서에 이르러 그 자랑인 날마다 죽는 일이 죽을만큼 힘든 사역이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장에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고하신 옥한흠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분은 제자훈련사역에 남다른 성취를 이루셨지만, 저는 그분이 대설교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분이 65세에 은퇴하시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매주 준비하는 설교 원고 작성이 너무 힘들어, 그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조기 은퇴를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글을 좀 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은퇴의 이유가 내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우 매월 쓰는 큐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에세이와는 달리 큐티 집필은 퍽퍽한 닭 가슴살을 씹는 것과 같습니다. 군대에서 제일로 힘든 제식 훈련을 받는 기분입니다. 세상에는 제일로 오래 사는 두 부류의 직종이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학자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나 보자 하는 맘으로 죽을 수 없답니다. 다른 한 부류는 목사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언제 오시나 고대하는 바람으로 오래 산다고 합니다. 반면 글 쓰는 사람이 통계적으로 제일로 단명하다고 합니다. 고(故) 옥한흠 목사님께서도 설교 원고를 준비하는 중압감과 노역 때문에 일찍 은퇴하셨고, 일찍 별세하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매주 설교 원고 준비의 노역. 그 날마다에 힘겨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일이 결코 쉽잖았어도, 바울 사도와 옥한흠 목사님은 날마다 죽는 예수의 길을 끝내 인내하면 좇아 간 승리한 사도들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날마다 죽는 것이 자랑인 이 멋진 자랑.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거절하고, 아무데서나 죽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사명의 골고다를 향해 전진하는 일입니다. 현대의 문제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향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성도들의 문제도 능력이 아니라 방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힘이 들고 어려워도 날마다 찬송하며 나아가야 갑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날마다의 승리를 맛볼 수 있을까요?

날마다 먹는 밥이 몸에 보약이듯, 날마다의 승리는 날마다 영혼의 근력을 키우는데 있습니다. 건강한 아이를 얻으려면 삼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새벽에 강단에 모여 신령한 하루를 열게 된 배경은, 이 교회를 위해 날마다 기도의 무릎을 꿇어 오신 기도의 어머니들의 단련 된 무릎의 근력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비결은, 영혼의 근력을 키우는데 있습니다. 날마다 기도로 하루를 열고, 날마다 말씀으로 맘을 열어 영혼의 근력을 기르십시오. 단련된 근육의 기억이 너와 네 집을 구원할 것입니다.

본문에 한절 앞선 누가복음 13장 32절에도 우리가 육신적으로 건강해지고, 정신적으로 강건해지고- 완전에 이르는 그런 참으로 복된 존재가 되는 길이, 날마다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 교직생활 내내 투병생활을 했었습니다. 독한 병마는 양한방의 갖은 처방에다가 몬도가네 식 섭생으로도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매일 밤 교회당에 나가 기도하던 중, 시103편의 말씀을 받았고, 그 주어진 큰 확신에 거하게 되면서 나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날마다에 구원의 확신, 치유에 대한 확신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말씀보고, 날마다 운동하고, 날마다 공부하고, 날마다 용서하고, 날마다 배려하고, 날마다 격려하고, 날마다 사랑하며 살면 우리는 이 땅에서도 작은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날마다는 ‘오늘’입니다. 교단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순교성지를 오가며 저는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순교는 그분들이 날마다 교회와 신앙을 믿음으로 지킨, 오늘의 연장선상에서 행한 날마다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날마다의 순교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날마다의 순교가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산 순교라면, 이는 단 하루도 오늘의 사명을 내일로 미뤄서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손에 쥔 현찰 오늘을 포기해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 상의 오른 편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라고 내일의 구원을 주께 바랐으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는 시제는 항상 현재, 오늘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일로 미루지 않으시는,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에 부지런하신 주님의 오늘에 있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강권했던 호세아 선지자도 하나님은 새벽 빛 같이 (날마다) 일정한(어김없는) 분(호6:3)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임한 날마다 새로운 구원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안에 있습니다. 구원은 날마다 새로운 영원한 현재적 사건입니다.

여기서 저는 찬물을 끼얹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날마다’ 승리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허망한 존재여서, 한순간만 방치해 버리면 폐차장으로 핸들이 꺾인 폐차처럼, 절로 폐차장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매여라!
십자가에, 그 사랑에, 그 은혜에, 예수에 매여라!

퍽퍽한 큐티 원고를 그만 쓰려고 하지만, 억지로라도 매이면 남는 게 있다는 욕심 때문에 나는 매월 힘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날마다의 승리를 맛보려면 우리는 매여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1:11)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를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인간들의 선한 결단이란 유효기간이 고작 삼일이라는 말입니다. 광야 백성이 사흘 길을 참지 못했음을 우리는 봅니다. 엄살이 아닙니다. 광야를 가보셨나요? 실제로 사흘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돌아 서면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환경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기도하고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찬송을 잃고, 말씀을 까맣게 까먹곤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는 말씀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는 말은 날마다의 승리는 “그 사랑에 매인 존재”만이 가능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날마다 죽는, 십자가의 길, 예수를 따라가는 삶은, 그 사랑에, 그 은혜에 매임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후배 목사 이야깁니다. 그 목사의 아들이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해 겨울 탈영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들의 장래가 나락으로 떨어지던 그 겨울, 아들을 찾아 헤매던 그 후배 목사와 나는 그 일로 매일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핸드폰에서 울려나오던 컬러링이 이런 찬양이었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

전혀 그 긴박했던 상황을 배반한, 말도 안 되는 가사 말을 지닌 컬러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찬양을 들으며, 우리의 산 신앙고백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다는 고백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배 목사는 확고하게 주의 사랑에, 그 은혜에 매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은 무사히 돌아 왔고, 정상적인 ‘날마다’의 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은혜에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은혜에 매여 날마다 죽는 것이 자랑이었던 사도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누가 진정한 사도냐고 하도 시비하기에

사도 중의 사도라고 목청 드높였던 내가(고전9:2;갈1:1)

당한 고난이 뭐가 그리도 대단하냐고 따져 묻기에

사십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노라 가슴 뻐기던 내가(고후11:24)

할례자들이 두려워 이방인과 밥 먹던 중 꽁무니를 감춘, 당신의 수제자 게바에게조차 그 절반의 진리에 섰다며, 감히 핏대를 세우며 복음적 면책을 서슴지 않았던 이신득의의 절대 옹호자인 내가(갈2:11)

 

교리에 교권에 찌든 내 본색을 훤히 드러내게 하는

 

그 은혜 앞에 서면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요(고전15:8)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엡2:3)

하나님의 교회를 돌로 친 박해자요(고전15:9)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할 수 없는 면목 없는 종이요(고전15:9)

죄인 중의 괴수요(딤전1:15)

예수 부활을 맨 나중에 목격한 늦깎이 증인이요(고전15:8)

태형 정도로는 갚을 길없는 복음의 빚진 자요(롬1:14)

 

그 은혜 앞에 서면

 

외아들을 나같은 죄인을 위해, 그런 나에 대한 거룩하신 당신의 사랑의 증거로 주신(롬5:8)

그 사랑의 빚은 천하 인간 그 누구도 갚을 길 없기에 거져 주신

 

그 은혜 앞에 서면

 

내 봉사도, 내 충성도, 내 희생도, 내 인내도, 내 헌신도, 내 업적도, 내 성취도,

그 밖의 내 모든 자랑도

 

그 은혜 앞에 서면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은혜의 하나님의(고전15:10)

그 은혜 앞에 서면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롯이 당신의 선물인, 구원

그 은혜 앞에 서면(엡2:8)

절대 가치를 지녔기에 값없이 주신, 구원

그 은혜 앞에 서면

 

내 갚을 길 없는 무능과 불능을 아시고 공짜로 주신(엡2:8), 구원

그 은혜 앞에 서면

 

나는 자랑할 것이 예수밖에 없는

안팎을 뒤집어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갈6:14)

 

그 은혜 앞에 서면

 

외려 약한 것을 자랑하는(고후11:30)

내 몸의 예수의 흔적을 승리의 깃발로 흔드는(갈6:17)

권세도, 재물도, 사랑도, 명예도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모두 다 배설물로 여기는(빌3:8)

오직 더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고전9:19)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인, 날마다 죽는(고전15:31).

그 은혜 앞에 서면

그리 되기를 눈물로 엎드려 기원하는


기도/ 주여 그 은혜에 매여, 날마다 죽어, 새로운 구원을 맛보는 영혼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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