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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489: 사랑 안에서 행할 참된 것-명광교회 직원헌신예배 설교
2010.01.31(주일)

참 어려웠다. 명광교회 직원헌신예배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 하고픈 설교 주제는 쉽게 정했었는데, 그 설교 주제에 맞는 본문을 택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성경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난 말씀에 무지하다. 성경을 모른다. 나는 성경을 너무 모른다. 그래서 그 설교 주제에 맞는 본문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 복불복 게임하듯, 대충 그런 류의 말씀이 있을 법한 책을 뒤적여댔다. 한심했다. 그 무궁무진한 말씀의 보고에 근접도 못한 채, 내 알량한 기억을 더듬어 극히 한정된 말씀을 차용했다. 차용? 그러니 문제다.

그러다가 에베소서 4장 11-16절로 본문을 정한 후, 궁리 끝에 제목을 ‘사랑 안에서 행할 참된 것’으로 정했다. 그러나 그 제목이 그 본문과 관련 된 내용을 전개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고 막상 설교를 작성하려들자, 그 본문이 너무 밋밋했다. 오묘한 발상이나, 서사적 내용이 너무 빈약했다. 무미건조한 낱말풀이를 해야만 했다. 내 기본이 약하다는 말이다. 말씀 자체만으로도 은혜가 되는 말씀이 얼마나 많은데, 내 성경지식이 부족해 난 그런 보석 같은 말씀을 놓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을 바꿀까 여러 번 생각했으나, 이미 제목과 본문을 전송해 버린 지 오래였다.

좀체 설교가 구성되지 않았다. 그 어떤 기발한 발상도, 영감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내가 제일로 설교하기 어려운 본문을 택한 것이다. 억지춘양으로 말씀을 내가 하고픈 내용과 보릿자루 꿰듯 꿰맞춰야 했다. 한동안 진땀을 빼다가 그동안 행했던 설교 문들 가운데 그 주제에 적합한 내용을 모자이크 하듯 따다 붙였다.

지난 주 초(初), 명광교회 박희수 목사님께서 제직헌신예배설교를 부탁하는 순간, 나는 “You are my creator."가 떠올랐다. 그 예화를 중심삼아 그에 적절한 본문을 택하려든 것이다. 오늘의 박희수 목사가 있기까지, 그 교회가 보여 준 그 몸 살리는 은사로, ‘서로 상합하여 교회를 세워나가는’ 요즘 보기 드문 성경적 행위라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런 선행과 감동을 격려해 주려고 에베소서 4장을 택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설교는 그 목적을 이뤘다. 설교 후, 강단에 오른 박희수 목사님께서, ”오늘 설교 내용 중, '그 어떤 목회자가 와도 우리 교회는 그 목사님을 1등 목사님 만들 수 있다' 고 했다는 어느 의정부에 있는 교회가 바로 우리 명광 교회라 생각했습니다. 몸 아픈 목사를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 주셔서 오늘의 박희수가 있게 해 주신 우리 명광교회와 성도들이야말로 바로 그런 살림이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에 화답했다.

그랬다. 나는 바로 그런 서로가 서로를 세워 준, 서로의 창조자인 명광교회를 말씀으로 격려해 주고 팠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말씀소원을 이렇게 이뤘다. 감사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명광교회 창립38주년 기념주일이란다. 그 창조적 상호 격려와 서로 세움의 선행이 주안에서 명광교회의 큰 부흥의 발판이 되리라 확신한다. 올해는 교육관을 신축한다는 데, 그 성업(聖業) 또한 은혜 속에 잘 진행되어 가리라 확신한다.

사랑 안에서 행할 참된 것
에베소서 4장 11-16절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 안에서 자라자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직분들이 있습니다. 11절 말씀에서 그 직분을 나열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오늘 본문에서 제시한 성격과 원칙에 맞는 선에서 그 명칭과 직위가 새로 정해 질수 있습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권찰 등등.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 직분을 맡은 이들의 직임되는,사랑 안에서 행할 참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 12절 말씀에 성도를 온전케 하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직들이 그 사랑 안에서 행할 참된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몸은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여기서 지체란 은사로 주어진 직분이란 말입니다. 우리교단 헌법에는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 집사 등등의 직분이 나옵니다. 직분에는 직임이 있습니다. 집사, 안수집사, 권사, 장로라는 직분에 따른 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직분은 직위가 아닙니다. 집사보다 높고 장로보다 낮은 직위가 아닙니다. 모든 직분에는 그 직분에 합당한 직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각 직분의 직임에는 높낮이가, 귀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예를 들어 권사의 직무는 무엇입니까? 교단 헌법 제3절 집사, 안수집사, 권사, 장로에 관한 내용 중 유일하게 제 40조 권사에 관한 내용에만 성경 말씀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권사를 세워(롬12:8) 교역자를 도와 교인의 생활을 돌아보며 심방권위하며 믿지 않는 자에게 전도한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성경적 근거가 로마서 12장 8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권위하는 자는 권위하는 일로.” 권사는 권위하는 자입니다. 권위하는 직임을 맡은 직분이 권사직분입니다. 이 말씀을 개역개정판에서는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권사라는 직임에 맡겨진 직무는 ‘위로하는 일’입니다.

권사는 권위 하는 자, 위로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위로로 위로하는 자입니다. 고후1장에서 바울사도는 자신의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3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그리고 이 짧은 11절(고후1:1-11)의 말씀 중에 ‘위로’라는 단어가 무려 1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본문 마지막 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1:11)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오늘 나의 직분자 됨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요, 그 다음은 내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이 은사인 직분을 맞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위로자, 기도의 위로자, 사랑의 위로자가 우리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명광교회도 지난 38년의 역사 가운데, 가까이는 박희수 목사님과 멀게는 개척자 김무경 목사님까지, 그 영적 지도자들의 말씀과 기도와 사랑의 위로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도를 위하여 말씀의 위로자, 기도의 위로자, 사랑의 위로자가 되어 줘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핸가 장충단교회에 부임해 왔던 윤종훈 목사님께서(지금은 뉴욕한빛교회 시무) 저에게 식사초대를 했습니다. 식사 후, 헤어지면서 그분은 저에게 시카고 한인 목회자들의 공동목양 컬럼집을 한권 선사했습니다.


그로 시작된 3인칭으로 서술된 한 주인공의 간증이 거기에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내 그가 바로 그 자신 윤종훈 목사임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유학 중, 곤고 중에 더한 곤경을 맞이했었답니다. 가난한 유학생 아내가 사형선고에 다름없는 백혈병에 걸려 버린 것입니다. 아내를 병동에 집어넣고, 낙망하여 그 병원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자신의 낙담하는 모습이 눈에 비췄던 흑인 청소부 아줌마가 그 표가 나게 무너져 내린 자신에게 다가와서는, 그 절망어린 목사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책 한권을 펴서 그에게 내밀더라는 것입니다. 뜻밖에 성경이었습니다. 그녀가 펴 보인 말씀이 바로 고린도후서 1장 1-11절이었답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 여인이 낙담한 목사인 그에게 천사였고, 권위자였고, 권사였습니다.

그 권사님의 위로에 힘입어, 그 말씀의 위로에 힘입어 그 목사님은 힘을 얻었고,
그 목사님의 아내인 사모님께서도 그 악한 병마를 떨치고 일어섰다고 합니다.


제직들은 누구나 다 위로자입니다. 말씀의 위로자입니다. 기도의 위로자입니다. 사랑의 위로자입니다.


지금부터 8년 전 저의 어머니께서 마지막 병에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 마지막 100일 동안 전 간병을 했습니다. 권능의 사역자요, 사랑의 사역자셨던 어머니셨기에 그 기간 동안 숱한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경향 각지의 능력자, 말씀의 권위자, 친인척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병문안을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그 숱한 위로자 중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선명히, 인상적으로 기억나는 한분의 권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가끔씩 말없이 문안을 와서 한나절을 말없이 위로의 침묵 기도로 어머니 곁을 지켜 주다가 떠나곤 했습니다. 저는 그의 군말없는, 빈 말없는, 말, 말없는 기도로 함께하는 위로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없이 기도로 함께하는 위로가 바로 그 사랑 안에서 행할 직분자들의 참된 일입니다. 우리 제직들은 바로 이런 귀한 직임과 직무를 맡은 자들입니다.


헌신, 보카치오(Vocatio)란 말은 내가 위대한 자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끝까지’ 한다는 말입니다.그 직위를 누리려하지 말고, 그 직임에 충실한, 성도를 온전케하는 제직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2.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데 있어 제직들이 사랑 안에서 행할 참된 직임은 무엇입니까?

12절 말씀에 봉사의 일을 하며, 봉사의 일을 하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봉사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 됨을 위해 헌신하는 일입니다.

에베소서에서의 봉사란, 4장 3절 말씀이 일러준 바,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라는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됨은 그 사랑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에베소서가 말하고자 하는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예수의 대속의 은총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대속이란 말은 영어로 atonement인데, 이 단어를 분절해 보면 at-one-ment 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는 ‘하나 됨’이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보편적 교회의 표상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 일치가 에베소서의 주제요 교훈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절).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우리를 위해 마다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 하나 됨을 위한 자기 비움으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그 하나 됨을 위한 올바른 태도에 대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먼저 4장 2절에 자신에 대하여(2절 상반절)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타인에 대하여(2절 하반절)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여야 합니다.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4:5-6a)기 때문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3-4).

저는 지방회장을 하면서 많은 교회를 둘러 봤습니다. 그런 가운데 원치 않는 분쟁에 휘말린 교회들을 접했습니다. 그 공통점의 하나는 용납이 없다는 점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예수가 없고, 심판이 없는 듯 행하는 공동체에는 내일이 없습니다.

성경에 일심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한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심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일심의 강도(强度)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심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이 사도행전 7:57절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향이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심으로, 성령 안에서 하늘 보좌를 향하여 함께 기도하자 능력이 나타나고, 물질을 유무상통하며 그래서 믿는 자의 수가 날마다 더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행 4:24) /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36-37)

일심으로 기도하는 그곳에 바나바 같은 일꾼이 헌신을 결단하고 나섰습니다. 일심으로, 한 마음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명광교회가 이런 사건, 바나바와 같이 온전한 헌신의 사람들이 이 교회에 보내심을 받는 역사가 임하길 빕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빌 1:27-28).

명광 교회- 얼마나 성서적인 이름입니까? 밝은 명, 빛 광, 곧 참 빛 되신 예수를 밝히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명광교회는 예수의 하나 됨을 위한, 대속의 은총을 사모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빛이 둘이어서는 안 됩니다. 참 빛 예수 그 하나만이 진리입니다. 달이 태양이 되려고 해를 가리자 지구가 암흑세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식입니다. 이런 신의 일식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주의 화평을 이루고, 그 화평을 누리고, 그 화평을 전하는 명광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일심으로 기도하고, 전도하여 날마다 구원받는 무리가 더하기를 기원합니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데 있어 제직들이 사랑 안에서 행할 참된 직임은 무엇입니까?

12절 말씀 하반절에 성도를 온전케 하고(돌보고), 봉사의 일(하나 되게 하고)을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세운다, 라는 ‘함께’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습니다. 표준 새 번역에는 엡4장16절이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므로, 온몸은 여러 부분이 결합되고 서로 연결되어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서 2장 22절 주의 몸 된 성전이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함께’라는 말속에는 상호 배려와 사심 없는 연대가 요구된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난 2009년 3월 31일 오늘 오후 7시 30분, 베데스다 선교회 33주년 & 법인 7주년 & 돌봄 센터 착공 감사예배를 드렸다. 감사예배 순서 중에 돌봄 센터 청사진을 디자인한 김성수교수는 "디자인은 '배려'입니다."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창조라는 말은 너무 불경스럽고, 자연과 사람에 대한 상호 거침없는 배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세워져 가는 교회는 서로 배려하는 교회입니다. 서로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교회입니다.(히브리서 10장 24절) 또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갈 6:6]는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세상을 뒤집는 자신의 빛나는 영적 전투에 늘 함께해 준 이들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사도 바울은 접두사 syn('함께‘라는 뜻)으로 시작하는 복합어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 함께 한 사람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가 제일로 많이 사용한 단어는 함께하는 일꾼이라는 의미의 동역자, synergos였습니다. 그가 목숨을 건 그 치열한 영적 전장(戰場)에는 외로움으로 옥쇄하지 않을 만큼의 전우들이 늘 함께 했다고 그는 술회했습니다.

한때 극렬한 복음의 핍박자가 그 임무수행을 위해 나섰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 극적으로 예수의 추종자가 된 사건은 그를 일순 외톨이 되게 해버렸습니다. 그는 일순간 옛 친구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나니아와 다메섹의 제자들(행9:10,23-25,행22:12-16)이 그와 함께 해 줬습니다. 복음에는 함께하는 동역자가 늘 수반 됩니다. 그 후 그는 고향 다소 주변에서 10여 년간 선교사로 일하던 중 구브로에서 온 레위 자손 바나바(행11:24-26)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바나바와 함께 역사적인 전도여행을 떠나는 행운을 얻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한 지체 실라(실루아노)(행15:40), 루스드라의 디모데(롬16:1-3), 사랑받는 의사요 문필가인 누가(몬24), 안디옥의 디도(고후8:23), 고린도의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아굴라(롬16:3), 바나바의 사촌 마가(골4:10;몬24) 등이 그의 사명의 길의 동역자들이었다고 그는 전합니다.

또, 갇힌 자되었던 바울은 그와 '함께 갇힌 자’(synaichmalotos)된(단어의 원 뜻은 함께 포로된 자) 동역자들이 그에게 있었다고 전합니다. 데살로니가 출신의 마게도냐인 크리스천 아리스다고(골4:10), 또한 ‘함께 갇힌 자’라고 불리우는 이는 골로새의 에바브라(몬23)입니다. 에베소감옥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16:7), 그리고 로마감옥의 골로새의 오네시모-그는 바울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몬10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멍에를 같이한(synathleo) 여인들에 대해 말합니다. 협력자들입니다. 빌4장 3-4절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보호자가 있었으니 그녀는 겐그레아의 여집사 뵈뵈였습니다.

바울은 아킵보(골4:17)를 가리켜 ‘함께 군사된 자’(synstratiote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과 ‘함께 군사된 자’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바울은 그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군사된 자’(빌2:25)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함께 군사 된 자’인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골로새서 1장 7절에서는 ‘함께 종 된 자’(syndoulos)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한다는 말의 의미가 매우 낯설게 묘사 된 구절이 있습니다.

빌2장 30절 말씀입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바울은 그 사역을 위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목회자는 그 사역을 위해 그 누군가의 조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자신의 그 필요를 에바브로디도가 채워줬다고 말합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1:24절) 헌신을 에바브로디도는 교회와 바울을 위해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죽기를 마다하지 않는 헌신이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


참으로 절묘한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에바브로디도는 없습니다.
나와 너희의 일만 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 성도들만 있습니다.

그러나 ‘없으나 있는,’ ‘아무 것도 아니나 전부인’ 에바브라디도를 우리는 발견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헌신입니다.

예수님 닮은 모습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죄 된 인간들을 구원해야 할 희생양으로서의 예수님처럼 에바브로디도는 자기를 비운(버린) 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함께’를 실천했습니다.이것이 명광교회를 섬기는 직원회의 역할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의지나 고집, 주의주장을 드러내지 않는, 없으나 있는 존재인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동시에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가교 역할을 목숨 걸고 행했다는 말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를 도와 목회자인 바울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제직들의 역할과 사명입니다.

바로 그런 귀한 일을 에바브로디도가 최선 다해 행했다고 바울은 전합니다.우리도 에바브로디도처럼 교회를 도와, 목회자의 부족함을 도와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목회자를 목회자 되게 하여, 제직회가 제직회 되는 역사를 주안에서 이루길 기원합니다.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을 위한 제직회의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주 안에서 빛나길 소망합니다.


이렇듯 바울과 에바브로디도는 서로를 세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세워주는 서로의 창조자입니다. 우리는 세운만큼 세움 받는 한 몸 된 상보적 존재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본인에게서 공개적으로 직접 들었기에 인용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의정부 모 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 받아갔던 그 선배 목사님은 자신이 그 교회에 부임할 무렵 그 부임을 막아보려던 이들이 그 청빙 받은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목회적 이력을 운운 하며 부임 방해 공작을 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좋지 않은 정보를 흘리던 사람들에게 바로 그 교회 권사님들이 이렇게 응대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 어떤 목사님이 오셔도 1류 목사님 만들 자신이 있어!” 라고.

 

그런 성도들의 속 깊은 배려로 자신이 무사히 그 교회 부임할 수 있었고, 그분들의 격려로 자신이 그 교회에서 은퇴하여 원로목사가 될 때까지 성공적으로 목회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빚는 작은 창조자입니다.

나는 지난 2005년에 이어 금년 5월 펜실바니아(Pennsylvania)주 랑카스터(Lancaster)라는 도시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재세례파(Mennonite)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들어 와 정착하여 세운 종교도시입니다. 그곳에는 성막(Hebrew Tabernacle)이 재현되어 있고, 18세기 생활양식을 고집하며 전깃불도 없이 호롱불로 밤을 밝히며 살아가는 재세례파 원리주의 집단 아미쉬(Amish)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은 더 소박하게 더 심플하게, 교회 중심으로, 예배 중심으로 오직 예배와 경건한 삶만을 추구하는 신앙의 원형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빼놓을 수없는 또 하나의 신앙적 보물은 SIGHT &SOUND THEATRES입니다.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복음적으로 각색한 뮤지컬을 공연하는 2천석 규모의 대형 극장입니다. 그곳은 평일에도 미 대륙 전국각지에서 찾아 온, 미국을 이끄는 참힘인 2천만 복음주의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입니다.

지난 2007년 니는 그곳에서 뮤지컬 “In the Beginning"(천지창조)을 감상했습니다. 입체적이고, 환상적인 초대형 무대와 복음에 온전히 절은 뮤지컬 가수들의 열창은 매우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과연 미합중국을 이끌어 가는 참된 힘, 그 복음의 힘이 절감되는 한 사건이었습니다. 영어로 노래하는 뮤지컬인지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성극이라서 그 흐름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하와(이브)가 아담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아담을 향해 울부짖으며 곡하던 노랫말 중 이런 가사가 순간 귀에 속 들어 왔습니다.

“You are my creator."

"---!!!."


순간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그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어가는 우리는 장인(匠人)이라고


그렇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창조자입니다. 아내 또한 남편의 창조자입니다. 10년 후의 내 남편의 모습은 오늘 남편을 빚고 있는 그 아내의 창조물에 다름이 아닙니다. 명광교회 38년의 역사는 그동안 이 교회를 섬긴 이들이 서로를 창조한 산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에게 버린바 된 자들인 우리를 신부 삼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 주시는 신랑 되신 산돌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벧전 2, 3-4). 그리고 그분은 형편없는 우리를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합니다(히 10,24). 이렇게 말입니다.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빚는 작은 창조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성도로서의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호 협력 속에서만 교회는 지어져 갈 수 있습니다. 바울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한 동역자 에바브로디도. 에바브로디도를 함께 군사 된 자로 섬긴 바울 사도. 서로의 상보적인 한 몸 된 서로 세움이 그 사역을 빛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세운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인,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서로 세워 준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인 우리를 잇는 가교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를 마다않으신, 구속의 주님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일에 우리 명광교회 제직회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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