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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228: 사명의 강 그 요단 건너기
2009.03.01(주일)

시간이 죄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이 시간을 묶어버렸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작동해야하는 기계처럼 시간의 압박을 인간들은 죄의 열매로 견뎌내야 한다.
신성한 예배조차도, 계시의 선포까지도 스톱워치에 지배를 받는다.
말씀선포가 길었다고, 회중들에게 사과하는 촌극은 유한한 인간의 영적 비애다.
아 슬프다. 분노를 넘어 슬프다.
우린 무엇을 위해 예배하는가?
우린 누구를 위해 예배하는가?
말씀 선포까지 무력화 시키는 시간이 무섭다.
부메랑 된 인간의 원죄가 야속하다.
그래도 102년의 그 교회 역사를 단 25분에 정리해 선포했는데……. 
동생같이 친근한 그를 탓할 수는 없고,

그 시간이 죄다.
인간이 죄다.

여기 어제 오후 3시에 있었던 중앙성결교회 임직식 설교를 올린다.
설교 내용보다 더 긴 설교 원문을 올린다.

사명의 강-그 요단 건너기


여호수아서 3장 1-6절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 가니라

이스라엘이 홍해를 앞에서 요구받은 것은,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나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지켜보는 것”(출14:13) 뿐이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에베소서 2장 8-9절

이것이 구원의 주권적 신비요, Amazing Grace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과정이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구원의 첫 단계 칭의 단계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간단히 구원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려 봅시다.
먼저 구원의 3시제입니다. 구원은 과거의 구원(--영생을 얻었고(요5:24)), 현재의 구원(---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미래의 구원(--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왔음이라(롬13:11))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중생(重生 거듭남,Regeneration/칭의,양자됨), 성화(聖化:Sanctification), 영화(榮化:Glorification)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중생은 칭의, 양자 됨 등 여러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중생은 생물학적 출생에 비유한 주관적 내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칭의(稱義)는 법률적 설명으로 하나님과 객관적인 법적 관계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변화이며, 이것을 가족관계에 비추어서 양자(養子)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사건을 어떤 방법으로 설명하느냐의 표현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는 회개하고 믿는 자(막1:15)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하시며(칭의,롬3:21-28), 동시에 위로부터 내리는 은총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新生,New Birth)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칭의는 성화의 출발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의 확신 여부를 말할 때 주로 과거의 구원(거듭남)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론에만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구원론을 말함에 있어 주로 칭의론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칭의는 성화의 과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칭의는 성화의 출발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는 칭의 받은 사람이 더욱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 한데까지 이르는 것(엡4:13)입니다. 그러므로 칭의 없이 성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성화 없는 칭의는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구원의 초보 논쟁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40년의 광야생활을 거친 후 요단강 앞에 섰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위대한 해방 자 모세의 대를 이어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백성들의 지지 속에 이스라엘의 새 영도자가 됩니다. 그는 그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 동편에 이릅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바라보면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려 듭니다. 가나안 중앙고지를 가는 길목에 요단 계곡의 주요 성채인 여리고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여 그는 두 명의 정탐꾼을 그곳으로 침투시킵니다. 거기서 그 정탐꾼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여인 라합의 보호 하에 여리고를 정탐하고 돌아옵니다.

그들 보고는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았다”(수 2:9)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라합이 전해 준 정보였습니다. 여호수아 군대는 정보력도, 모압 평지에서 모은 군량미도, 무기도, 전술도, 군사들의 사기까지 적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충분하고, 출중하고, 드높았습니다. 이런 비교우위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여호수아는 즉시 아벨싯딤에서 요단 강가로 이스라엘은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신중의 신중을 기하느라 사흘을 그 강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북쪽 헬먼 산의 눈들이 녹아 상당한 급류가 되어 흐르는 강은 그들 앞에 놓인 최대의 난관이었습니다. 그들은 도하가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드시 건너야만 하는 그 사명의 강 앞에서 그들은 난감해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한 해법을 일러주셨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말씀을 앞세운 신앙공동체의 성결, 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전술, 전략, 무기 그리고 군량미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명의 강 요단 건너기는 공동체의 성결이 그 무기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 3:5).

우리교단은 성결교회입니다. 전도표제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입니다. 그 대표적인 표지가 성결입니다. 오늘 임직식을 갖는 102년의 역사를 지닌 중앙성결교회가 우리 성결교단의 모교회입니다.

저는 교단 창립 90주년을 앞둔 1990년 대 어느 해, 한국성결신문 편집부장으로부터 무교동교회의 이전사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교회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열광, 신비, 반문화 - 1909년 대한매일신보 논설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대한 변증. 이라는 제하의 글을 썼습니다. 바로 이 중앙성결교회의 역사와 신앙이기에 간략히 설교와 관련된 내용만 정리해 봅니다.


우리교단이 중앙성결교회가 태동하던
1907년경의 시대적 상황입니다.

한국사에 있어서 19세기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전환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단순히 시간적 연속을 의미하는 한 세기가 아니라 근대사회로 옮겨가는 역사적 변혁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19세기 역사는 우리의 전통 문화에 접근해 오는 서구의 근대문물을 슬기롭게 조화시켜 자강(自强). 발전(發展)을 위한 시기로 전환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안으로는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힘을 기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침투해 오는 외세에 대응할 수 있는 힘조차도 기르지 못하였습니다.  1897년 청나라 제후국과 같은 형식을 탈피하고자 [대한제국] 을 세운 이 땅의 완전독립국의 꿈은, 열강 세력의 각축으로 노략 당하고 그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힘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침략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우리민족이 전개한 민족운동이 있었으니 그것은 의병항전(義兵抗戰)과 구국계몽(救國啓蒙) 운동이었습니다.

의병항전(義兵抗戰)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1907년 일제의 강요에 의한 고종의 퇴위와 강제적인 한국군의 해산으로 그 절정에 다다르고, 1910년이후엔 만주등 해외로까지 이어져 해방 때까지 일제와 투쟁하였습니다. 

그리고 구국계몽운동은 주로 개화파 특히 기독교를 중심한 종교계의 민족운동과 더불어 추진  되었습니다.  

의병항전(義兵抗戰)의 일관된 목표가 국권회복 자체에 두었다면,
구국계몽(救國啓蒙)운동은 민족 실력의 양성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즉 당장에 자주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래를 위해 민족의 교육과 민족문화의 수호 및 경제자립을 통한 실력양성 운동을 전개하여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1907년은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퇴위, 군대해산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이 계속됐고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동우회(同友會) 및 기독교 청년회원등 2천여명이 종로에서 반대시위를,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대일항전을 개시하였던 다사다난한 한 해였습니다. 

바로 이같은 해에 우리 성결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것입니다. 

1907년 5월 30일 한성부 중부 염동(漢城府 中部 汭:現, 관철동과 종로 2가 사이)에 셋방을 얻어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걸고 직접전도의 방식으로 황토현(黃土峴:現,종로 2가와 세종로 부근)에 나가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이란 찬송을 불러대며 방황하는 상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사역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 1908년 구리개[銅峴洞:現, 남대문 1가와 을지로 1가 부근)로 옮겼다가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다시 한성부남부 무교동(漢城府 南部 武橋洞:現,무교동 12번지(을지로 1가 부근))으로 옮겨 명실상부한 ‘무교동’ 시대를 열어가게 된 것이다. 그 후 숱한 우여곡절 끝에 1979년을 끝으로 무교동 시대를 마감하고, 1979년 이후 동대문 중앙성결교회 시대를 열어 오늘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 1907년 이후 1세기에 걸친 한국 성결교회의 역사는 부흥운동의 역사였습니다. 이명직-이성봉-이만신 목사로 이이지는 성령운동, 성결운동의 역사였습니다. 그분들은 이 땅의 성결성 회복에 앞장 선 영적 준령들이었습니다.

한 예를 듭니다.
저는 희귀한 빛바랜 흑백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진은 단체 사진입니다. 1950년대 지방도시 어느 교회(목포중앙성결교회 또는 목포북교동교회) 앞마당에서 목회자를 모시고 온 성도들이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저는 처음에 그 사진이 목사 취임식이나, 교회 임직식 후에 찍은 사진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 한 가운데 한 아낙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배경을 알아 봤더니, 바로 그 여인네가 그 단체사진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사연인즉슨, 그 여신도는 처녀의 몸으로 혼인을 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에게 본부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도 애까지 낳고 살아왔기에 그럭저럭 살아왔었답니다.

그러다가 이성봉목사님의 부흥집회에서 그 여인이 성결체험을 하게 되었답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허물과 죄를 자복했고, 성결의 은혜를 힘입었습니다. 성결의 은혜를 힘입은 그녀는 자신의 현실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본부인도, 남편도, 교우들도 괜찮다며, 당신의 잘못은 없다며 그 결혼 생활을 계속 해 나갈 것을 강권했지만 그녀는 그 모든 청을 거절하고 그 집을 나오기로 결단 했다는 겁니다. 애는 물론 입고 있던 속옷까지 다 벗어 내 놓고 그녀는 그 집을 나왔으며, 아예 그 불순한 인연을 끊을 작정으로 먼 타지로 떠나기로 했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그 성결한 여인을 위해 교회는 송별예배를 드려줬고, 그 예배 후 함께 기념촬영까지 하며 그녀의 순결한 영혼을 위로하며, 기억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 성결교회는 이 땅의 영혼들을 정결케 하는 개인적 성결회복에 선두주자로서의 영적 역할을 활발히 감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결교회가(중앙성결교회) 걸어 온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1907년 그 시기에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민족운동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의병항전과 구국계몽운동이었습니다. 이런 항일정신에 촉구하고, 문맹을 퇴치하는 일에 힘쓰며, 갖은 압력 속에서도 그 논조를 굽히지 않았던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의 입장에서 볼 때 이하에 소개되는 우리성결교회의 신앙과 전래의 배경은, 저들 민족주의자들 눈에는 친일매국노집단이요 반문화적 단체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논설을 통해 복음전도관이었던 우리 교회의 신앙을 반민족, 반문화 집단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로 짐작되는 배경을 저는 이렇게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1901년 일본에서 최초로 시작된 성결교회는 다른 예수교파들이 일본정부와 국민들로 부터 탄압을 받고 있을 때 아무런 탄압 없이도 성장해 나갔고, 일본제국의 군벌에도 적극 협력하였던 연유에서, 뿌리를 그곳에 둔 한국의 성결교회가 반민족적 집단으로 매도당할 수 있었을 것이며,

둘째로는 우리교회의 신앙이 지닌 신앙수용의 동기가 정치적, 민족적 동기의 유형이 아니라 종교적 동기의 신앙유형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비정치화, 비민족화의 신앙정화운동은 몰역사적 운동으로 받아 들여졌을 것입니다.

셋째, 이상과 같은 특성에 더하여 우리교회가 강조한 신유의 복음과 상대적으로 일천한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교단이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보인 국민계몽운동(학교, 병원 등의 설립)에는 참여할 수 없는 우리의 내외적 한계. ‘예수 천당 식’ 직접전도 방식에 대한 원시적 반감 등이 반계몽적, 반문화적 집단으로 평가 당해 버린 한 요인으로 작용 했을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이유들이 원색적 열광, 신비, 그리고 반문화로 특징짓게 된 초기 우리교회의 신앙인 것이다.

저는 이런 내 나름대로의 진단을 토대로 우리네 신앙의 특징을 열광, 신비 그리고 반문화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단의 역사적 공헌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초기 우리 성결교회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전적인 권위에 대한 철저한 복종과 문화에 대한 충성의 요구을 단호히 거부하는 유형(Christ, against the culture)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계시와 이성, 그리스도와 가이사,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 사이에 명백한 구별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그들의 공헌은 교회와 사회에 변혁을 가져왔으나 결코 그들이 당초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도사들이 자신의 영혼과 그의 형제 수도사들의 영혼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갱생시키기를 꿈꾸지 아니하였으나 역사가들이 그들은 유럽을 갱생시키며, 사회의 붕괴를 막으며 정치질서를 재건하며 공공교육을 수립하고 문화예술을 보존하는 일에 공헌했다고 평가 하는 것처럼, 성결의 은혜를 강조한 성결교회의 신앙이 오늘날 떠들썩한 [말씀의 생활화]운동의 신앙적 기초와 토양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그 극심한 핍박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성결하게 사는 우리교회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적 삶이 이 땅에 참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선배 신앙인들이 그 피로 지킨 성결의 복음이 과연 이 시대에 얼마만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가 라는 의문 앞에 서 있습니다.

지난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셨습니다. 그분의 선종은 종파적, 교리적인 면은 차치하고, 공시적 관점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성결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40만 명이 조문 대열에 자진하여 합류할 만큼 신드롬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근래에 보기 드문 영향력을 그분은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작금 극심한 경제 불안 속에서도,
사람들이 물질에만 목말라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가 봅니다.

사람들이 정작 목말라하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민중들은 사람다운 사람, 예수의 사람을 희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 날, 심판 주로 오시어 심판하실 때에 그 심판의 표준과 근거가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야고보 선생은 경건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서 1장 27절.”

여기서 말하는 경건은 헬라어의 ‘드레스코스’입니다. 이는 종교의 외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돌아보고 라는 말은 남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방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의 사회성, 성결의 사회성을 지칭합니다. 이 본문에서 야고보 선생은 사회적 성결(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과 개인적 성결(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을 동시에 이야기하면서도, 사회적 성결, 성결의 사회성(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작은 자, 소외된 자, 약한 자, 가난한 자의 벗, 쫓기는 자의 피할 바위. 그 갓파더 김수환.  현대의 도피성 된 명동성당. 그 성주의 대리인 김수환. 민주 인권 존엄. 그는 시대의 화두에 몸을 내 던젔고, 하여 그가 바로 시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처럼 민중들의 삶속에 있었고, 시대정신을 올곧게 하는 일에 몸을 내던졌습니다.

동대문을 복원한다고 합니다. 더불어 중앙성결교회도 그 복원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동대문을 복원한다는 말은 옛것을 숭상하자는 말만이 아닙니다. 골동품처럼 취급받아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전통유산을 시민들에게 넘겨주겠다는 발상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적 흐름에 발 맞춰 중앙성결교회는 그 성결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는, 그 성결의 복음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영적 작업이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교회를 세상에 봉헌해야 할 때입니다.

그 선봉에 오늘 직임을 받는 임직식의 주인공들이 서야 할 것입니다. 그 직분은 직위가 아닙니다. 직무입니다. 특별히  오늘 열 명의 장로를 세우는 이 예식은, 의인 열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름을 받는 예식입니다. 

중앙성결교회가 선교 2세기에 접어들었다는 말에는 무슨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까? 이제 한국 교회는 초기 성화의 단계를 이미 벗어나 온전한 성화를 위해 신앙적 정진을 해야만 한다는 사명이 부여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 중에서 사는 것에 보다 강조점을 둘 만큼 성숙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만이 아니라 교회 밖을 향해서도 우리는 눈을 돌려야만 합니다. 로쟌 언약의 고백대로 “왕왕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데 대한 참회의 심정”으로 우리는 이 사회 현실을 올바로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복음주의의 각성이 수반될 때, 우리 성결 신앙은 이 사회를 신앙에로 불러일으키는 역사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로저 쉰(Roger L.Shinn)의 말대로 신앙은 ‘강요(imposed) 될 수 없으나 때때로 ’불러 일으킬‘(evoked)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일 중 하나가 기풍(ethos=공동체정신)의 윤리적의미를 재발견하거나 진작 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예를 형제로 맞아들이는 초대교회의 기풍(ethos)이 수세기 후에 노예제도가 참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원리적 중요성을 교회가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미추, 남녀, 흑백, 귀천, 노사, 남북, 동서, 고아도 과부도, 작은 자도 차별하지 않는 성숙한 기풍을 진작시켜 이 땅에 모두가 하나 되는 영적 관행을 정착시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공동선을 추구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결의 기풍이 이 땅의 윤리로 자리 잡아 가도록 우리는 보다 힘써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는 이른바 영역주권사상(sphere sovereignity)을 제창하였습니다. 이 영역주권사상이란 우주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소유이나, 그 권력이 땅위에서 구체적으로 인간을 통해 행사될 때는 한 사람 또는 한 기관에 의해 독점 행사될 수 없고, 삶의 여러 영역들에 분산되어 행사되어야 한다는 사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든 국가든 그 기능은 각기 다를 지라도 모두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목적에 있지 않고, 기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 모든 영역이, 다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예수안에서, 이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 말씀을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 되었다. 지상의 모든 거주자들이, 인류가, 매사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험합니다.

이 시대의 인간 이성이 길 잃고 방황하는 자리에 해체주의라는 괴물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해체주의적인 태도에 기인한 포스트모던한 시대는 중심을 해체하고, 절대를 상대화 시키는 음모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 해체, 교회의 영적 권위 타파, 냉소가 그것입니다. 대신 절망, 우연, 불확실성, 혼돈, 불신, 삶의 무의미성, 배금주의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세속화된 이 시대의 냉소적 특성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입니까?
교회마저 이기주의에 빠졌다고 세상은 소리칩니다. 교회가 배금주의에 빠졌다고 시비합니다.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마저 기댈 언덕이 되지 못한, 그 기댈 언덕이 없는 이 땅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백안시하고, 권위를 부정하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서슴치 않는 것은 행여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비본질적인 요소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복음의 본질까지도 상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정신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를 직시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자기 개혁이 없는 종교는 늘 세속화의 표적이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히 성화론(聖化論)에 깊은 통찰과 강조점을 두고 있는 웨슬레의 구원론에 서 있는 우리 성결교회의 신학적 입장이야 말로, 유일하게 선교 2세기 한국교회의 온전한 성화를 위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성결교회의 영적 자부심과 영적 사명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102년 전통의 중앙성결교회에서 임직을 받은 임직자들은 이런 영적 자부심을 지니고, 그 자부심에 합당한 성결인으로 살아 요단을 건너시기를 축원합니다. 온전한 성화를 이룬 베드로 사도는 그의 마지막 서신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아멘.


마지막으로, 오늘 임직자식과 관련하여 중앙성결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공동체적 성결의식 강화를 위한 한 권면을 드립니다. 우리는 그 사명의 강 요단을 함께 건너 가야할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결케 하기 위해서 서로 간에 성결해야만 공동체적 성결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결이란 늘 상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 사람, 공동체의 성결을 위해 서로를 바라보는 새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입니다. 


나는 지난 2005년에 이어 지난 2007년 5월에도 펜실바니아(Pennsylvania)주 랑카스터(Lancaster)라는 도시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재세례파(Mennonite)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들어 와 정착하여 세운 종교도시입니다. 그 도시는 미합중국을 이끄는 복음주의의 힘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매우 귀한 곳입니다. 그곳은 뉴욕과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쉽게 들릴 수 없는 곳입니다. 저는 미국에 들어가는 이들이 다른 그 어떤 곳 보다 꼭 이 도시를 순례(?)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그곳에는 성막(Hebrew Tabernacle)이 재현되어 있고, 18세기 생활양식을 고집하며 전깃불도 없이 호롱불로 밤을 밝히며 살아가는 재세례파 원리주의 집단 아미쉬(Amish)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은 더 소박하게 더 심플하게, 교회 중심으로, 예배 중심으로 오직 예배와 경건한 삶만을 추구하는 신앙의 원형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차를 타고 다니며, 순수 농경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그곳의 신앙과 농산물들은 역설적이기도 '웰빙' 시대에 무공해 신앙, 무공해 농산물로 세계적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긴 것입니다. 모두가 병든 21세기에도 그들은 여전히 건강했고, 건강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설 만큼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빼놓을 수없는 또 하나의 신앙적 보물은 SIGHT &SOUND THEATRES입니다.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복음적으로 각색한 뮤지컬을 공연하는 2천석 규모의 대형 극장입니다. 그곳은 평일에도 미 대륙 전국각지에서 찾아 온, 미국을 이끄는 참 힘인 2천만 복음주의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입니다.


지난 2005년에는 성서 이야기를 복음적으로 각색한 드라마 'RUTH'을 감상했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룻 이야기를 단순히 '효'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했지만 그 뮤지컬을 통해 보편적 세계주의자인 보아스를 통해 고발당하는 저들 이스라엘의 편협한 선민사상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에는 그 뮤지컬 "In the Beginning"(천지창조)을 감상했습니다. 입체적이고, 환상적인 초대형 무대와 복음에 온전히 절은 뮤지컬 가수들의 열창은 매우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과연 미합중국을 이끌어 가는 참된 힘, 그 복음의 힘이 절감되는 한 사건이었습니다. 영어로 노래하는 뮤지컬인지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성극이라서 그 흐름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하와(이브)가 아담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아담을 향해 울부짖으며 곡하던 노랫말 중 이런 가사가 순간 귀에 속 들어 왔습니다.


"You are my creator."

"---!!!."


순간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그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어가는 우리는 장인(匠人)이라고


그렇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창조자입니다. 아내 또한 남편의 창조자입니다.

10 년 후의 내 남편의 모습은  오늘 남편을 빚고 있는 그 아내의 창조물에 다름이 아닙니다.

역으로, 오늘 내 아내의 모습은 그 한 몸 되어 살아 왔던 세월 동안 남편인 내가 빚어 놓은 작품입니다.


이내, 가슴이 콱 메어 오면서 회한의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건축가였는지? 비단 아내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식들의 얼굴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파리한 몰골도 떠올랐습니다. 오늘 그들의 모습이 바로 내 창작품이라는 사실에 깊은 죄의식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여기 모인 성결공동체 일원 모두가 서로서로를 빚는 장인(匠人)들입니다.


오늘 원로장로가 되시는 이종신 장로님께서 후배 장로들이 당회장 목사님에 대해 이런 저런 불평을 늘어 놓을 때마다 저들을 “목사가 잘돼야 네가 잘 된다”며 다독거리셨다는 겁니다. 그 말씀이 바로, “You are my creator."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빚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에게 버린바 된 자들인 우리를 신부 삼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 주시는 신랑 되신 산돌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벧전 2, 3-4). 그리고 그분은 형편없는 우리를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합니다(히 10,24). 이렇게 말입니다.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나에게 상처받은 영혼들이, 이 말씀의 주인공이신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면으로 회복되어가길 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으면, 앞으로도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 또한 산돌되신 그분에 의해 다시 긍휼의 대상으로 지음 받기를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정리합니다.
홍해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순종과 믿음의 지팡이를 통해 갈라 주셨지만, 먼저 홍해를 갈라 주시고 통과하게 하셨지만. 요단강은 말씀을 앞세운 성결공동체가 믿음으로 그 위기의 강에 발을 내딛었을 때 그 요단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편 119:1-2),” 는 말씀처럼, 오늘 이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실천하는 성결 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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