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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316: 기이한 꿈 - 사랑 안에서, 설교 3편
2009.06.14(주일)

강행군이다. 어제 13일 토요일에는 우리 서울중앙지방회 남전도회 체육대회와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를 치렀고, 오늘 14일 주일은 퇴계원교회 임직식과 청소년부 여름 수련회 교사 페스티벌이 있었다. 그 현장을 분주히 오가야 했고, 세 번 설교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동선을 따라 약속은 약속으로 이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관계는 나에게 작은 희열을 안겨 주었다.

이 주일 새벽 기이한 꿈을 꿨다.
죽은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교단 총회 석상에서 위로의 상을 받는 꿈을 꿨다. 나는 그동안 자살은 그 무엇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참된 말로 그분의 죽음을 혹평했었다. 결벽증적인 양심선언으로 죽어 버리지 말고, 순교자적 신앙고백으로 살아가라고 힘주어 말했었다. 그런데 우리 막내딸이 그런 나에게 은근한 반기(?)를 들었다. “사람이잖아, 그분도 사람이잖아 사람이라서 그런 거야. 사람이 불쌍해, 불쌍하잖아.” 그랬다. 그래도 난 그 인간애를 무시했다.

그런데 이 새벽 그가 위로의 상을 받는 기이한 꿈을 꾼 것이다. 순간 잠에 확 달아나 버렸다. 난 눈을 뜨고 생각했다. 그래 참된 말조차도 사랑으로, 그 사랑 안에서 발화해야만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나는 들었다. 그 꿈은 교리를 논하고, 진리를 설파할 때도 그 사랑으로, 그 사랑 안에서 말해져야 한다고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순간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랑에 감전되는 듯 했다. 그 사랑으로 충만해지며 만물이 사랑스러워졌다.

나는 잠자고 있는 아내를 보듬어주며, 아내 옆에 누워 콜콜 자고 있는 강아지 이름을 나직한 목소리로 불러댔다. 아지야~. 근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 집 강아지는 애완견이 아니다. 그래서 낯가림이 심하고, 주인한테도 와서 먼저 안기는 법이 없고, 게다가 이젠 나이 들어 늙은이가 되어  만사가 귀찮은 듯, 제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는 아이다.

근데 그 사랑으로 충만해진 내가 그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일순 고개를 휙 돌려댔다. 그 뜻밖의 반응에 놀란 내가 무지 반가운 맘으로 손을 내밀자, 내 손을 핥기 시작했다. 한동안 녀석은 내 손을 핥았다. 감동이 내 안에서 일었다. 세상에나 저런 미물도 사랑으로 충만한 영혼의 음성에는 반응을 하는구나. 그동안 내 말에 응답 없던 영혼들은 그들이 죽은 영혼이어서가 아니었구나. 그래 그 삭막한 심사는, 내 사랑 없는 교훈이 조성한 사막이었구나. 이런 반성과 회개가 내 안에서 솟구쳐 올랐다. 이 아침은 그 사랑으로 가득 찬 아침이었다.

나는 오늘 주일 설교 본문을 에베소서 4장 15-16절을 택했고, 설교제목을 ‘사랑 안에서’라고 잡았었다. 그래선지 꿈속에서도 나는 그 설교 본문을 묵상했던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기이한 꿈을 꿀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이 주일 새벽이 미물도 응답하는 사랑의 날개 짓을 펼칠 수 없었으리라. 나는 이 말씀을 우리교회 주일예배와 오늘 오후에 있을 퇴계원교회 임직예배 설교 본문으로 삼았다.

그리고 오후 늦게 퇴계원교회 임직식을 마치자마자, 베데스다 나눔교회로 달려가 청소년부 지도자를 대상으로 설교 아닌 강연을 했다. 본문은 에베소서 4장 11-14절까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그 설교문을 여기 정리해 본다.


  
1.
서울중앙지방회 남전도회 연합 체육대회 설교문
2009.06.13(토)

푯대를 향하여

고린도전서 9장 24-27절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아프리카 초원 스프링 팍 이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물 집단이 종종 벼랑에서 집단 추락하여 몰사하곤 한답니다.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그 집단몰사의 이유가 향방 없는 달음질에 있다고 합니다. 그 동물들은 어느 한 마리가 앞서 뛰면 함께한 무리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앞선 녀석을 무조건 따라 뛰다가 낭떠러지로 집단 추락해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인간 사회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그 누군가가 앞서 뛰면 아무런 생각 없이 무리지어 뛰는 군중심리, 모방범죄가 그런 사실을 방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향방 없는 달음질하고 있는 스프링 팍 무리 같습니다. 자기 골문을 향하여 볼을 차대고, 역주행을 일삼는 우행을 자기 성찰 없이 감행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본질보다 현상에 얽매인 향방 없는 달음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슈퍼 새앙쥐 처럼 몸집은 비대해 졌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영적 정체 현상이 그 천성 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방향에 있습니다.

올림픽의 구호가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게입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 스피드가 아니라 방향에 있습니다.

그 달리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아는 일이 보다 더 중요하며, 또한 자기 궤도를 밟고 달리는 금도가 절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친선 체육대회는 분명한 방향이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 12-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는 저 높은 곳이라는 푯대가 있습니다.
"우리의 바라(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 함이니라"(고후4:18).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주께서 예비해 놓으신 저 하늘나라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천성이 우리의 푯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적 푯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영적 순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연합 체육대회는 그 푯대를 향해가는 도상의 안식입니다. 이곳은 이기는 데만 목적이 있는 투우장이 아닙니다. 서로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은혜의 마당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인내로 끝까지 달음질하는 영적 경주를 연습하는 훈련장입니다. 오늘 우리 여기서 힘 얻어 모두 함께 천성을 향한 진군에 더욱 매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저 높은 곳, 그 푯대를 향한, 향방 있는 달음질로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일 낮 예배와 퇴계원 교회 임직식 설교문
09. 06.14 주일

사랑 안에서


에베소서 4장 15-16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 성장학자 맥가브란 박사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제일  가는 소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퇴계원교회는 성장의 성장을 거듭하는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는 자녀를 13명 낳았다고 하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2년 연속 임직식을 거행하는 교회는 임진왜란 이후 없는 사건 같습니다. 주님의 제일가는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있는 퇴계원교회가 그 은혜 안에서 계속적인 부흥을 이루길 소원합니다. 이룰 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더한 성장과 부흥을 이룰 수 있을까?

사족 같은 이야기기 일수 있으나, 오늘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던 유월을 맞이했기에 예화로 들어 보고자 합니다.

지난 3월 북한산 비봉대로 향하는 그 산자락에 위치한 이북5도청에서 나는 이런 교양강좌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양강좌를 맡은 예비역 장군 김희오(喜午) 옹의 여러 말씀 중 이런 말이 귀에 들려왔습니다.


6.25 전쟁은 '점령정책'이 잘못되어 동족상잔의 참극을 빚는 오점을 남겼다. 그 전쟁 발발 최초의 6개월 동안, 우리 민족은 남과 북 상호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죄과를 범했다. 먼저 북한군이 남하한 3개월 동안에는 좌익세력들이, 다시 북진을 시도한 3개월 동안에는 우익세력들이 번갈아 가며 인민들을 총과 칼로 무지막지하게 쓸어 버렸다. 그들은 군법에 의거하지 않고, 감정적인 맞대응으로 살육전을 감행한 것이다. '점령정책'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고, '점령정책'이 제대도 하달되지 않은 연고였다. 사상이 뭔지, 이념이 뭔지도 모른 이들이 미움의 이데올로기로만 무장한 채, 무분별한 무차별적인 만행을 상호 감행했던 것이다.


'점령 정책.' - 멋진 말입니다. 우리 민족상잔이 비극은 바로 그 제대로 정립되지도, 하달되지도 못한 ‘점령점책’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념할만한 이런 멋진 '점령 정책'도 있었습니다.


1934 년 10월 16일에 중국 남부 장시 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해방구)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피해, 8만 명의 중국 홍군(중국 공산당 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 입은 2만 명을 포함한 2만 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습니다 저우언라이와 주더, 린뱌오, 펑더화이 등이 이끄는 홍군이 1935년 10월 옌안에 도착해 자리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킬로미터나 되었으며,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천 명뿐이었습니다. 공군까지 동원한 국민당군의 탄압, 더위, 식량부족으로 도중에 죽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이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습니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혁명을 위한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 혁명의 이념을 농촌지역에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이 농민 출신인 홍군은 민폐를 전혀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의 지지를 받게 한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피비린내 나는 대장정을 통해 농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 배경에는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는 모택동의 '점령 정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유명한 흔히 3, 8작풍(作風)이라는 점령정책, 규율이었습니다. 그  3대 기율과 8가지 행동수칙은 다음과 같다.(설교 시간에는 소개하지 않았으나, 이 설교문을 참고할 이들을 위해 붙여 놓는다)


3 대 기율이란,

첫째, 명령에 절대로 복종할 것.

둘째, 민중으로부터 바늘 하나, 실 한 올도 빼앗지 말 것.

셋째, 사용한 모든 물품은 반드시 돌려 줄 것 등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8 가지 행동수칙은,

첫째, 잠자려고 인가에서 빌려온 문짝은 제자리에 걸어놓고,

둘째, 잠잘 때 사용한 짚단은 묶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고,

셋째, 주민에게는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대하며 가능하면 모든 일이건 도와주고,

넷째, 빌려 쓴 물건은 돌려주고,

다섯째, 파손된 물건은 바꾸어주고,

여섯째, 농민과의 거래는 정직해야 하고,

일곱째, 구매한 모든 물건은 값을 지불하고,

여덟째, 위생에 신경을 쓰고 변소는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우는 것 등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민족적 큰 목표를 위해 정적을 살려 주기도 했다. 소위 제 2차 국공합작은 항일전보다 중국공산당 토벌(내전)에 더 관심을 가졌던 장개석이 친 국민당 세력인 장학량에게 친일반역자로 몰려 연금을 당하고, 처형 일보 직전에 놓였을 적에, 모택동이 그를 살려준 일생일대의 큰 모험의 산물이었다. 그는 명분을 중시했고, 인민의 마음을 사는 일에 주력했다.


모택동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 공산주의자도 명분을 중시하고, 인민의 마음을 사는 점령정책을 정직하게 실천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는 무엇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있습니까?

지역교회 고린도 교회는 은사와 능력과 헌신이 넘쳐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선생은 오늘 보편적 교회상을 설명한 에베소서에 와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치란, ‘사랑 안에서’ 가능한 것이라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은 사랑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랑 안에서.

이것이 교회의 부흥의 비결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점령 정책’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참된 것(말)조차도, 사랑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나는 이 새벽 기이한 꿈을 꿨습니다.
죽은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교단 총회 석상에서 위로의 상을 받는 꿈을 꿨습니다. 나는 그동안 자살은 그 무엇도 정당화 할 수 없다 는 참된 말로 그분의 죽음을 혹평했었습니다. 결벽증적인 양심선언으로 죽어 버리지 말고, 순교자적 신앙고백으로 살아가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막내딸이 그런 나에게 은근한 반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이잖아, 그분도 사람이잖아 사람이라서 그런 거야. 사람이 불쌍해, 불쌍하잖아.” 그랬습니다. 그래도 난 그 인간애를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새벽 그가 위로의 상을 받는 기이한 꿈을 꾼 것입니다. 순간 잠에 확 달아나 버렸습니다. 난 눈을 뜨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참된 말조차도 사랑으로, 그 사랑 안에서 발화해야만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나는 들었습니다. 그 꿈은 교리를 논하고, 진리를 설파할 때도 그 사랑으로, 그 사랑 안에서 말해져야 한다고 나에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순간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사랑에 감전되는 듯 했습니다. 그 사랑으로 충만해지며 만물이 사랑스러워졌습니다.

나는 잠자고 있는 아내를 끌어안으며, 아내 옆에 누워 콜콜 자고 있는 강아지 이름을 나직한 목소리로 불러댔습니다. 아지야~. 근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집 강아지는 애완견이 아닙니다. 그래서 낯가림이 심하고, 주인한테도 와서 먼저 안기는 법이 없고, 게다가 이젠 나이 들어 늙은이가 되어 제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는 아입니다.

근데 그 사랑으로 충만해진 내가 그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일순 고개를 휙 돌려댔습니다. 그 뜻밖의 반응에 놀란 내가 무지 반가운 맘으로 손을 내밀자, 내 손을 핥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녀석은 내 손을 핥았습니다. 감동이 내 안에서 일었습니다. 세상에나 저런 미물도 사랑으로 충만한 영혼의 음성에는 반응을 하는구나. 그동안 내 말에 응답 없던 영혼들은 그들이 죽은 영혼이어서가 아니었구나. 그래 그 삭막한 심사는, 내 사랑 없는 교훈이 조성한 사막이었구나. 이런 반성과 회개가 내 안에서 솟구쳐 올랐습니다.
이 아침은 그 사랑으로 가득 찬 아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울 수 있는 사랑의 힘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영혼들.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탑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 김정란은

사랑으로 나는, 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지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 입니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입니다. 사랑으로 나는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입니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 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나 그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 고전 13장 13절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거기에 부흥이 있고, 사람 살림이 있습니다. 우린 서로서로가 이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서로서로 서로간의 ‘창조자’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다시 한 번 더 말해보고자 합니다.


나는 지난 2005년에 이어 금년 5월 펜실바니아(Pennsylvania)주 랑카스터(Lancaster)라는 도시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재세례파(Mennonite)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들어 와 정착하여 세운 종교도시입니다. 그 도시는 미합중국을 이끄는 복음주의의 힘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매우 귀한 곳입니다. 그곳은 뉴욕과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쉽게 들릴 수 없는 곳입니다. 저는 미국에 들어가는 이들이 다른 그 어떤 곳 보다 꼭 이 도시를 순례(?)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그곳에는 성막(Hebrew Tabernacle)이 재현되어 있고, 18세기 생활양식을 고집하며 전깃불도 없이 호롱불로 밤을 밝히며 살아가는 재세례파 원리주의 집단 아미쉬(Amish)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은 더 소박하게 더 심플하게, 교회 중심으로, 예배 중심으로 오직 예배와 경건한 삶만을 추구하는 신앙의 원형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차를 타고 다니며, 순수 농경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그곳의 신앙과 농산물들은 역설적이기도 '웰빙' 시대에 무공해 신앙, 무공해 농산물로 세계적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긴 것입니다. 모두가 병든 21세기에도 그들은 여전히 건강했고, 건강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설 만큼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빼놓을 수없는 또 하나의 신앙적 보물은 SIGHT &SOUND THEATRES입니다.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복음적으로 각색한 뮤지컬을 공연하는 2천석 규모의 대형 극장입니다. 그곳은 평일에도 미 대륙 전국각지에서 찾아 온, 미국을 이끄는 참힘인 2천만 복음주의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입니다.


 지난 2005년에는 성서 이야기를 복음적으로 각색한 드라마 'RUTH'을 감상했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룻 이야기를 단순히 '효'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했지만 그 뮤지컬을 통해 보편적 세계주의자인 보아스를 통해 고발당하는 저들 이스라엘의 편협한 선민사상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년에는 그 뮤지컬 "In the Beginning"(천지창조)을 감상했습니다. 입체적이고, 환상적인 초대형 무대와 복음에 온전히 절은 뮤지컬 가수들의 열창은 매우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과연 미합중국을 이끌어 가는 참된 힘, 그 복음의 힘이 절감되는 한 사건이었습니다. 영어로 노래하는 뮤지컬인지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성극이라서 그 흐름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하와(이브)가 아담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아담을 향해 울부짖으며 곡하던 노랫말 중 이런 가사가 순간 귀에 속 들어 왔습니다.


"You are my creator."


"---!!!."


 순간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그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어가는 우리는 장인(匠人)이라고


 그렇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창조자입니다. 아내 또한 남편의 창조자입니다.

10 년 후의 내 남편의 모습은  오늘 남편을 빚고 있는 그 아내의 창조물에 다름이 아닙니다.

 역으로, 오늘 내 아내의 모습은 그 한몸되어 살아 왔던 세월 동안 남편인 내가 빚어 놓은 작품입니다.


 이내, 가슴이 콱 매어 오면서 회한의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건축가였는지? 비단 아내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식들의 얼굴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파리한 몰골도 떠올랐습니다. 오늘 그들의 모습이 바로 내 창작품이라는 사실에 깊은 죄의식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You are my creator."


 베드로 사도는 사람에게 버린 바 된 자들인 우리를 신부 삼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 주시는 신랑되신 산돌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벧전 2, 3-4). 그리고 그분은 형편없는 우리를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합니다(히 10,24). 이렇게 말입니다.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그렇습니다. 우린 서로서로 서로의 창조자들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세상을 점령하는 부흥의 역사가 계속 이어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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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임직식 신앙의 삼원색 [2] 김성찬 2009.03.30 1273
15 명예(원로)목사추대245: 아름다운 승계 -구리제일교회 명예목사 추대 및 담임목사 취임예배 [1] 김성찬 2009.03.22 1510
14 교회설립예배234: 내가 온 것은 - 예수 비전교회 설립예배 김성찬 2009.03.08 1278
13 271: 목사안수식 김성찬 2009.04.20 968
12 담임목사 취임263: 한 목자 ♥ 한 무리 양 떼 -이문동교회 담임목사 취임예배 설교문 김성찬 2009.04.12 1325
11 성전헌당258: 다시 그 성막으로 - 예광교회 성전 헌당 예배 설교 김성찬 2009.04.06 2106
10 착공예배252: 하늘의 하나님이 - 베데스다 돌봄센터 착공 감사예배 [5] 김성찬 2009.03.31 1782
9 교회설립277: 그 힘찬 능력으로-힘찬 교회 설립 예배 설교 [4] 김성찬 2009.04.26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