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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면-안수집사(2008. 6.1(꿈 있는 교회))

 

먼저 말씀의 권면을 드립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영혼이 알곡 되는 일이 신앙하는 일입니다.

안수례의 의미는 그 영혼이 알곡임을 만인 앞에 공포하는 예전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임직식의 원형은 모세와 여호수아 사이에 있었던 지도력 승계입니다.

신 34장 9절 "여호수아에게 지혜와 신이 충만했다." 

여호수아는 '이미 신에 감동된 자'였고, 안수를 통해 모세 이후의 지도력 계승을 공식화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 와서도,  사도행전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6:3)라는 말씀에서 보듯, 그들은 이미 성도들 사이에서 검중된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행13:1-3)했을 때에도 성경은 바울은 물론 바나바에 대해서 그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행11:24)라고 먼저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입증되지 않는 자를 세우는 것은 임직이 아닙니다. 안수는 이미 지도자로 입증된 지혜와 믿음의 사람에게 그 직임에 걸맞는 직무와 권위를 부여하는 의식입니다.

 

여기 오늘 안수집사로 안수례를 받고 임직된 세 분은 안수집사로서의 자격이 입증된 '이미 알곡 된 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알곡은 신앙의 완성이 아닙니다. 알곡은 그 신앙하는 일에 있어서 현재진행형의 상태에 있는 결과가 아닌 과정입니다. 과정으로서의 완성입니다. 

 

알곡은 그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 알곡은 알곡이어야 합니다.


알곡은 쭉정이가 아닙니다. 쭉정이는 쉬이 나풀거리나 이내 날아가 버리는 특성이 있습니다.

욥은 과연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불려가는 겨 같이 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느냐 [욥 21:18]"라고 반문하며, 항변했지만, 시편기자는 분명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4]라고 정언적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존재란, 어깃장 놓으며 말 비튼 욥의 반문이나, 시편기자의 선언에 의하면 악한 자, 쭉정이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곡은 바람에 날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알곡의 알곡다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안수집사로 임직을 받은 세분의 안수집사님들은 지난 20년간 4차례나 교회가 이전한 어려움과 탈출기회(?)를 소망의 인내로 견뎌 오신 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구리시에서 한참 먼 이곳 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까지 교회가 옮겨왔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 땅에 대한 비전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고무적인 말씀까지 들었습니다.


이런 심지가 굳은 분들에게 이 권면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지만,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라는 권면에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그 흔들림 없는 충성을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때까지 이 꿈이 있는 교회에 바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은 주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가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계3:11-12)”    


그렇습니다. 이기기까지, 꿈 있는 교회의 기둥이 되기까지, 주의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배반치 않는 ‘알곡들’이 되시길 권면 드립니다.


둘째, 알곡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여기 `한 알의 밀'이란 헬라어 "호 코코스 투 시투"로서, "한 톨의 밀, "한 알갱이의 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한 알"의 작은 밀알은 완전한 밀알입니다.  이 생명의 알곡은, 고통과 죽음의 절망 속에 있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신, 밀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은 알곡입니다.

 

그런데, 그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이라는 말씀이 앞서 나옵니다.

알곡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 생명을 얻는 생명인데 그 생명력 있는 알곡이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휴면하는 알곡이 있답니다. 씨앗의 휴면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생명 있는 씨앗이 적당한 발아조건을 주어도 일정기간 동안 씨앗이 발아하지 않을 때, 휴면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휴면기간은 씨앗의 종류에 따라서 크게 다릅니다. 그런데, 연꽃종자는 무려, 2000년간의 휴면기간 후에 발아되기도 한답니다. 이렇게 종자의 휴면은 수주 에서 수년, 심지어는 수백 년간 지속되기도 합니다.


왜 씨앗이 수면을 할까요?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는데, 껍질이 너무 단단하거나, 발아 억제 물질이 있는 씨앗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씨앗의 휴면 메카니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휴면 메카니즘을 깨뜨릴 수 있는 휴면타파법이 있습니다. 그 씨앗의 휴면 타파하는 법은, 물과, 불에 그 휴면 씨앗을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여기 세분 안수집사님은 ‘알곡’임을 증거하고, 인정받았지만, 행여 휴면 메카니즘에 빠진  발아억제 물질에 감염된 알곡인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믿음생활을 해 나아가다 보면 행여 우리 가운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그 받은 바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리는 휴면 상태에 빠질 수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악하고, 사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험한 영계에 우리가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일 이 사명의 길을 가다가 넘어지더라도 뒤로 넘어지지 말고, 앞으로, 강단 앞으로 넘어지시기 바랍니다.


만일, 씨앗의 휴면 메카니즘에 빠진 듯싶으면, 이 강단에 나와 성령의 불이 임할 때까지, 눈물로 매어 달리시기 바랍니다. 그 성령의 불에 자신의 눈물을 노출시키는 영적 지혜를 발휘하여 휴면마귀를 성령의 불과 통회 자복하는 눈물로, 그 휴면을 타파하는 알곡들이 되시기를 권면합니다.


또한, 알곡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하반절에,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사랑은 나를 버리는 아픔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버리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신 죽음으로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신 우리 주님을 본받아 죽고, 또 죽는 알곡 되시길 권면합니다. 죽으러 오신 주님 따라, 우리는 이제 죽으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세분 안수집사님의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 결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수집사는 외적 관계도 바르게 정립해야만 합니다.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9-12)”

 

세분의 안수집사를 세우게 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서로 일으켜주고, 격려하며, 함께 승리하기 위해 서로가 필요함을 역설한 말씀입니다. 뜨거운 신앙 안에서의 연대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전4:11)

팔레스타인은 사막지대. 낮은 열사의 태양이 내려 쪼이나 밤에는 무섭도록 뼛속까지 에이는 추위가 몰아닥칩니다. 그래서 길가는 나그네는 밤이면 서로의 등을 대고 밤을 보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믿음 지키고, 교회를 세워 나갈 때 서로의 따뜻한 의지가 되도록 하시려고 세 분을 세우셨습니다. 


이상이 세 분 안수집사님 상호간의 연대를 말씀한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 보다 더 중요한 관계설정이 요청됩니다. 그것은 담임목사님과의 관계입니다.

저는 세분의 안수집사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과 세 제자의 관계를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주님과 목회자와 임직자들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저는 태양과 지구와 달의 관계로 비유,비교해 봅니다. 이 비유가 적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태양을 예수님으로, 지구를 목회자로, 달을 임직자로 대비해 봅니다. 우리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도, 달도 돌고 있음을 알지만, 달은 지구를 중심하여 돌면서 동시에 태양을 중심하여 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는 말입니다. 달이 지구를 젖히고 태양을 돌 수 없는 것처럼 이 꿈 있는 교회의 임직자들은 반드시 목사님을 중심으로 삼아 영적 양육을 받고, 성장해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일식은 지구와 맞서서 달이 태양을 삼키는(가리는) 행위입니다. 여기 꿈 있는 교회에서는 이런 기상이변이 일어나지 않기를 권면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평생 큰 교회 장로로 시무해 오신 한 장로님의 교회가 교회되는, 큰교회 되는 지혜의 말씀을 마감의 권면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 장로님은 중앙성결교회 이종신장로님이십니다. 그분은 그 대교회 장로로서, 또한 형님이자 담임 목사님이셨던 이만신 목사님의 동생으로, 수십년간을 지근거리에서 목회자와 임직자의 관계를 지켜보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혜로 목회자와 임직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 한마디로 정의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속한 교회의 당회원들이 담임 목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뒷소리를 할 때마다, 그 후배 장로들을 조용히 불러 식사도 대접하면서 이렇게 권면하신다는 겁니다.

 

"목사가 커야 니가 큰다”


저는 이 말씀에 동의했습니다. 아프게 동의합니다.

임직자 여러분 한번 따라 해 보십시오.


"목사가 커야 교회가 큰다.”

"목사가 커야 내가 큰다.”

  아멘, 아멘.


그렇습니다. 오늘 임직 받은 세분 안수집사님들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안에서 담임되시는 박이경 목사님을 중심으로 연대하여 반드시 기둥 되는 알곡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간곡히 권면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