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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연(서울중앙지방회)세미나 개회 예배 설교(2008.6.23)


미목연의 미래에 대해서

 

창세기 1장 1절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1장 20절 -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미래목회연구회란 대부분 젊은 목회자 그룹에서 사용하는 명칭인데, 서울중앙지방회에서는 이제 퇴물에 가까운 증경지방회장단들이 사용하는 것이 기이합니다. 젊은이 들이 보는 환상이란, 깨어서 보는 하늘의 신비라면, 늙은이들이 꾸는 꿈이란, 수면 상태에서 돌이키는 회상이기 때문입니다.(욜2:28-32;행2:16-18) 그래서, 미래란 환상-비전과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과거나 추억만 있는 수면상태의 백일몽을 꿈꾸는 노인네들이 ‘미래’를 말한다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노익장이란 말이 실감이 납니다. 


미래란 무엇입니까? 오늘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오늘 아닌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겐 항상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를 말하는 것은 진보된 오늘로써의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런 미래는 없습니다. 진보로써의 미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작금 우리의 현실은 역사의 진보라는 미명 아래 근원을 부정하고, 중심을 해체시키는 파괴공학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근대인들은 본질적인 세계로부터 추방의 역사를 진보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존 나이스비트의 지적대로 진보적 이상론은 과학 기술이 천국뿐만이 아니라, 지옥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짐에 따라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아니, 종말에 서서 볼 때, 진보적 이상론은 지옥만 창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서정이 부활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보가 단절된 막장에 이른 인간들은 허탈하기만 합니다. 모던한 시대를 거쳐 포스트 모던한 시대까지 지난 세기 그 시대정신이 남겨 놓은 분열과 해체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인간의 내면과 사회를 통합하고 치유할 수 있는 구원의 방식으로 서정이 급속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21세기 시대정신은 다시 서정입니다. 서정은 근원을 지향합니다. 위대한 과거, 황금시대를 지향합니다.


작년 2007년 신년 벽두, 젊은 피 원희룡이 전 두환 세배 사건으로 곤욕을 치뤘습니다. 변명질로 국민 통합 운운했지만, 성난 민심은 5공이 위대한 과거냐, 황금시대였냐, 본떠야 할 근원이었냐 정색하며 반문했습니다. 그는 궁색했습니다. 그 행태가 청산해야할 과거사에 굴신한 과거적 정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과거적인 것이 과거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을 때만이 그 과거는 구원의 방식일 수가 있습니다. 서정적 낭만의 대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우리의 위대한 과거, 오래된 미래 에덴을 회복해야 할 서정적 낭만의 대상으로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말씀에서 우리의 미래를 봅니다. 오래된 미래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목표를 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그것은 조화와 일치를 창조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3일 동안 하늘과 바다와 땅을 창조하신 연후에, 다음 3일 동안 하늘엔 새, 바다엔 물고기, 땅에는 온갖 육축을 채워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화룡점정 하듯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비균일을 균일하게 하심으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에덴을 창조하셨습니다.

혼돈을 질서로 바꾸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조화와 일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서울중앙지방회 기수 지방회라고들 합니다.  

행사 때 대열의 앞에서 깃발을 들고 앞서 나아가는 사람이 기수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조선 후기 주변 열강의 각축장이 된 형국입니다. 한 예로 대의원 선정을 놓고 봤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 안에 자율성과 자정능력이 망실되었음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미목연의 할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건강한 미래의 교회는 건강한 미래의 지방회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목회를 말한다면, 소망 있는 목회를 말하려면 지방회가 건강해야만 합니다. 지방회가 교회 정치와 치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미목연의 할 일은 조화와 일치를 구현해 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조화와 일치란 무엇입니까? 조화란 내 본색을 감추며 드러내고는 것이고, 일치란 일색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일곱 색깔 무지개가 조화와 일치의 원시적 원형입나다. 무지개는 일색이 아닙니다. 그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일색이 아니라, 일곱 색깔이나 됩니다. 그런데, 그 일곱 색깔이 한 색깔처럼 눈에 들어옵니다. 빨강색 무지개라거나, 파랑색 무지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무지개는 무지개입니다. 그것이 일치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의 연합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서울중앙지방회는 그 조화와 일치를 망실 당했습니다. 사탄이 가라지를 뿌리고 지나간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미움의 이데올로기로 꽉 차 있습니다. 살리는 생명의 언어가 아니라 죽이는 문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에는 미래란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은 그런 조화와 일치의 미래란 없습니다. 나는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습니다. 발전이나 퇴보만 보장되어 있을 뿐이다. 성경도 분명하게 인류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마지막은 마라나타(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의 은혜로 인간들이 꿈꾸는 허망한 미래가 끝나면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겐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가치관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젊은 목사의 취임예배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식순에서 난 약력소개를

맡았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취임하는 젊은 목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

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염려하며 강단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환몽처럼 손 하나가 툭

내 눈 앞에 튀어 나오더니, 자판 찍듯 한 자, 한 자 다섯 글자를 찍어대고 사라졌습니다.


앨 빈 토 플 러

???

미래학자? 미래? 미래에 서서 오늘을?


하여, 난 그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일에 서서 오늘 이 목회자를 바라

보십시오. 내일에 서서 이 젊은 목회자를 보면 이는 흠도 없고, 티도 없고, 점도 없는 주의 사자

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믿고 따라도 좋은 참 목자이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종말

론적 관점에 서서 서로를 대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물고 뜯으면 피차 멸망할 것이지만, 오래된 미래인 에덴의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며, 모두가

흠 없고, 티 없고, 점도 없는 존재라는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서로를 대하면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한가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를 여기 소개합니다.


조화와 일치란 무엇인가를, 따끈따끈한 오늘 아침 스포츠 뉴스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지난해 말에는 바로 이 장소에서 미목연 모임이 있었고, 안막회장님께서 히딩크의 리더쉽의 목회적 적용이라는 주제로 상호 토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매우 진지하고 유익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침 바로 그 히딩크의 리더십에 대한 기사가 포털 Daum에 실렸습니다


[엑스포츠뉴스 브랜드테마] - 엑츠 모닝와이드 조영준 의 Monday Essay 는

"히딩크의 마법은 보편적인 진리" 라고 말합니다. 다음은 그 기사의 내용입니다.


" 유로 2008에서 또다시 기적 같은 연승행진을 펼치고 있는 러시아 팀의 중심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보가 한국 축구 팬들에게 더욱 화자가 되는 것은 2002 월드컵에서 이룩한 한국 팀 4강 진출의 위협이 러시아란 팀을 통해 유로 2008에서 재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유로 2008 조별리그 예선전에서 잉글랜드를 제치고 결코 축구강국으로 부를 수 없었던 팀인 러시아를 본선으로 이끌었습니다. 러시아 대표팀 감독이 되기 전에 히딩크는 2002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4강에 진출시켰고 2006 월드컵에서는 호주 팀을 이끌고 16강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이젠 러시아란 팀마저 강팀으로 변모시켰습니다.


하나,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조화와 일치의 비법입니다.


그가 추구하는 축구 스타일은 한국 팬들에게도 익숙한 'Total Soccer'입니다.

다른 말로는 'Physical Soccer'로도 불리고 있는데 전후반 90분을 쉴 틈 없이 뛸 수 있는 체력을 바탕으로 수비수들과 미드필더, 그리고 공격수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최고의 조직력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히딩크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축구입니다.

 

히딩크가 그동안 맡았던 한국과 호주, 그리고 러시아 팀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모든 포지션에 위치한 선수들이 특정한 플레이에 얽매이지 않고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시종일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공격과 수비를 모든 팀원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해나가는 플레이를 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정한 선수들의 개인기에 의존하지 않고 축구란 스포츠가 근본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최고의 조직력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히딩크가 지향하고 있는 축구입니다. 언뜻 보면 어느 감독들이라도 이러한 축구를 완성해 나갈 거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축구가 아닌 다른 종목들도 기본이 가장 가르치기 어렵다는 것처럼 '가장 보편적'인 것을 완성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둘, 그는 실패를 교훈 삼았습니다. 우리 서울중앙지방회도 지금까지 실패한 조화와 일치를 그 실패를 교훈삼아 복구해 내야 합니다.


히딩크의 비범함은 결코 그의 '타고난 천재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념으로 내세우는 것은 현장에서 직접 겪은 산 경험입니다. 히딩크는 지금까지 항상 성공 가도만 달려온 지도자가 아닙니다. 때론 실패를 직접 맛보면서 패배를 단지 '추락'으로 끝내지 않고 '발전을 위한 경험'으로 승화시킨 것이 오늘날의 히딩크를 만든 큰 원천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스포츠 지도자라 하더라도 늘 승승장구할 수는 없습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짜인 경기들을 치러나가다 보면 승패는 항상 공존하게 됩니다. 감독의 의도한 방향이 성공했다면 여기에 더욱 완벽을 가하고 실패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스스로 깨달아 팀 전력의 향상에 약으로 써야합니다. 


이것은 아주 보편적인 부분이자 모든 지도자들이 기본적으로 이룩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쉽게 말로는 내뱉을 수 있어도 결코 이것을 제대로 실천해 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셋, 이상적인 지방회를 위한 바람직한 관계설정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고 기본기의 중요성과 체력의 강조를 증명하기 위해 강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이끌어 왔습니다.


지도자와 선수들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무 수직적인 관계도, 너무 수평적인 관계도 아닌 서로 의사 소통교환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에 놓이는 것입니다.

모래알 팀이 서로 합쳐지려면 정신적인 부분에서 팀원들과의 벽이 없어져야 합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팀을 맡으면서도 이것을 강조해서 나이로 직계가 이루어진 한국대표팀의 고질적인 상하관계를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 제대로 된 패스는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팀원들과의 신뢰가 있어야 제대로 이루어진다 " 고 말했습니다.


선수들에게 결코 가볍게 다가서지 않으면서도 모든 선수들과 의견소통을 원활하게 해내는 리더십은 훌륭한 지도자들만이 가지는 덕목입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완전한 팀워크를 만든 다음, 히딩크는 선수 구성원들의 가장 이상적인 조합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거듭합니다.


팀의 포메이션을 이리저리 바꾸어보고 아기자기한 실험을 거듭하는 것은 어느 감독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실험의 방향성과 목적을 분명하게 쫓고 있는 감독들과 아무런 확신 없이 이렇게 해봤다가 저렇게 해보는 감독들은 서로 간에 명암이 엇갈립니다. 물론 전자의 감독들이 극히 드문 것은 사실이죠."


이상이 거스 히딩크의 리더십에서 발견해 낸 조화와 일치의 사례입니다.

 

그렇습니다. 상호 신뢰가 바탕된 팀웤을 이루는 조화와 일치가 우리의 미래입니다.

우리, 오늘 실패를 딛고 일어서 하나 된 미래를 창출해 나아갑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

르심을 입었느니라(엡4:1-4)

 

작품(WORK)과 텍스트(TEXT)는 다릅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작품을 독자인 우리 몫으로 넘기셨습니

다.

텍스트는 독자의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로되, 우리에게 내어 주신 이상 말씀은 우리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일은 바로 우리들의 일이요, 몫입니다.

자연 만물이, 모두 다 그분의 작품이지만, 그 모든 것은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넘기신 텍스트입니다.

우리는 그 텍스트들을 해석함에 있어, 자의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그 작품을 만드신 창조주의 깊으신

뜻을 발견해내는 해석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 창조 목적과 다시 오실 그 왕국 사이의 긴장을 긴장되게 하는

참된 목회도(道)에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미목연의 미래가 있습니다.

미목연 회원 여러분!

말씀을 말씀되게 하여, 우리의 위대한 미래를 창출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