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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263: 한 목자 한 무리 양 떼  
2009.04.12(부활주일)

오늘도 분주했다. 부활주일을 맞아 그에 합당한 축복과 여러 예식을 통한 축하를 나누었다. 그리고 오후엔 이문동교회 김용주 담임목사 취임예배를 다녀왔다. 그 교회가 수소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성도들의 발놀림이 경쾌했다. 치리권을 부여하고 그 교회 담임목사로 김용주 목사를 공포하자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간 그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가 잘 맞지 않았었든가 보다. 무안했다. 그 분위기에 설교문 일부를 그 자리에서 수정하기도 했다. 어찌됐든 그 상처를 다시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에게 권면했다. 그 몸에 밴 타율적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라고.

 

돌아오는 길에 모처럼 동행했던 동료들과 서울산업대학교 교정에 들렸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흔적이 그 호숫가에 은빛으로 반짝였다. 벌써 봄이 가고 있었다. 우린 그 별리를 못내 아쉬워했다. 진즉 들려 볼 것을. 그러나 그 봄의 끝자락을 붙잡고, 우리는 동심의 세계를 오갔다. 즉흥시인 박 목사의 봄노래는 우리네 가슴을 일렁이게 했다. 지난 금요 대회전에 대한 장광설도 오갔다.


아 드디어 우린 현세적 부활을 맞이했다.
이제 그 율법적(?) 마지못해 견딘 사순절은 멀리멀리 가버렸다.
예정된, 예고된 축제만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부활은 신바람 나는 삶의 희열이다.
난 지금, 그 기대로 충만하다.

 

다음은 이문동교회 김용주 담임목사 취임예배 설교문이다.


한 목자 한 무리 양 떼   / 요한복음 10장 7-18절

 


오늘 (이문동교회 김용주 담임목사 취임예배) 순서지를 보십시오.

다들 설교 제목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때깔이 곱지 않습니까?
때깔만 고운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늘 우리 이문동교회 취임하는 담임목사와 성도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이문동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시는 김용주 목사님에게 설교제목을 칼라로 뽑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늘 메시지의 핵심을 시청각적으로 인지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미리 확인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김목사님께서는 설교자의 명대로 진행했으며, 그 제목 하나 때문에 순서지를 칼라로 뽑느라 돈이 더 들어갔다고 답했습니다. 얼마나 예쁩니까?

저는 한 목자와 한 무리의 양 떼 사이에 놓여야할 문장은 사랑의 로고인 하트♡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바로 이 하트를 돋보이게 하려고 빨간 칼라로 제목을 뽑았습니다. 돈이 더 들었답니다. 사랑은 돈이 드는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한 목자 한 무리 양 떼   


사랑은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을 낳는 사랑은 체험적인 앎(기네스코)에서 싹틉니다.

체험적인 앎은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 그 출발이 가능해 집니다. 의사소통의 지름길은,

to listen입니다. to hear이 아닙니다.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낳습니다.

교회는 생명을 부여하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선한 목자 되시는 우리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사랑 없이는 절대로 생산 불가능 합니다.
교회는 생명을 낳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 사랑이 이룬 신앙 공동체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의 정점은 죽음입니다.
아가서 8장 6절에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말씀합니다.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다고 부연합니다. 천지를 일순 살라버리는 여호와의 불입니다. 그 사랑은 죽음을 개의치 않는 불입니다. 그 사랑은 죽음으로만 꽃피울 수 있습니다. 사랑의 죽음으로만 생명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을 낳는 사랑으로 선한 목자 되신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그 사랑으로 한 목자 한 무리의 양 떼가 되길 소원하고 계십니다.


생명을 낳는 사랑은 체험적인 앎(기네스코), 체험적 접촉에서 싹틉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는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요 10:14-15a)

이 본문에서 앎이란 지적인 앎이 아니라, 체험적인 앎입니다. 체험적인 접촉입니다.

체험적인 앎은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 그 출발이 가능해 집니다.


목자와 양 무리의 하나 됨을 위한 본문이 말하는 필수적인 요소는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안다(요 10장 3-4절)는 사실입니다. 상호 의사소통이 매우 원활한 관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름을 안다는 말은 목자가 그 양 떼의 그 생의 이력과 신앙의 내력을 안다는 말입니다. 양 떼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말은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다’는 양 떼의 탄성입니다.


사람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어려운 관계가 없습니다. 장애인 선교 사역을 해오고 있는 장애인의 대부 양동춘 목사님께 제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중에 제일로 인간관계가 어려운 장애인은 어떤 분들입니까? 시각장애인이 아니라 농맹아 청각장애인이라고 그분은 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지름길은, to listen입니다. to hear이 아닙니다.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이문동교회가

  한 목자 한 무리 양 떼 라는,

  생명을 낳는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귀 기울여 들어야(to listen) 합니다.

  양 떼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우려야만 합니다. 


여기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아름다운 소문이 천지 사방에 가득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그 칭찬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2장 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아멘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룬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목자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양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목자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귀를 기우리게 하려면, 그 누구보다도, 목자가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야만 합니다. 양 떼들이 그 목자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하려면, 그 목자의 말씀에 영적 권위가 깃들여 있어야만 합니다. 영적 권위는 그 목자의 하나님을 신앙하는 참된 태도와, 그 목자의 말과 삶의 진정성(authenticity)에서 나옵니다.

기독교교육학자
로저 쉰(Roger L.Shinn)은, 신앙은 '강요(imposed) 될 수 없으나 때때로 '불러 일으킬'(evoked)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목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의 글입니다. 김기우목사님 성결서원이라는 목회컬럼 및 설교집에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꼭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우리 김기우 목사님은 제가 알고 있는 여러 부류의 목사님들 가운데 ‘성자형’에 가까운 목사님이십니다. 이 선배님을 모든 후배들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작은 예수요, 성자십니다, 저도 글을 좀 쓰고, 숱한 책을 읽어 왔습니다. 그런데 제 가슴에 와 닿는 책이 바로 김목사님의 목회 칼럼집이었습니다. 그 책의 글들이 화려한 미사여구나, 깊은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어서가 아니라, 언행일치한 목자의 삶의 진솔한고백이 생생히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 명예목사 추대식 설교에도 그분의 글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목회적 지침이 담겨 있어서 여기서 인용하기로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그 아드님의 취임예배이기에 아픈 이야기도 될 수 있는 부분까지 죄다 대언해 보겠습니다.


“ 

목양을 하는 사람들은 대목자장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사항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그 기쁨을 누리는 목자들이다. 주인 되신 목자 장을 위하여 한 평생 희생을 각오해야한다. 목양은 자기의 욕심을 배양하는 직임이 아니라 주님의 사업을 확장하는 일에 목숨까지 바쳐야할 직임인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목장에서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면서 본분을 잃은 듯한 언행을 하게 된다. 이는 분명 거짓 목자의 태도이며 삯군의 모습일 것이다. 종 된 목자는 주인 되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응하면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할 것이다. 실적에 관계없이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정을 받으면 최고의 영광인 것이다.

오랫동안 한 목장에서 목양을 하는 청지기들은 주님 때문에 고분한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서글픈 일도 있기 마련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밝혀진 큰아들의 불평을 하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노예처럼 아버지를 위하여 일해 왔으나 자기에게는 염소 **라도 주어 벗들과 함께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동생을 위해서는 온갖 대접을 다한 아버지에게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은 일이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아버지와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여 자기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주어진 자기의 위치인 것을 망각한 행위이다. 진정한 목자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지체 없이 실행한 목자일 것이다. 비록 그 목장을 떠나라는 치명적인 음성이라도 실행해야 옳은 일일 것이다. 목장을 떠나라는 양들의 하소연은 목자의 자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양들이 살이 찌고 평안한 생활을 하게 되면 떠나려는 목자를 붙들게 될 것이다. 목자가 그 목장을 떠나게 되어도 그 목장이 흥왕하게 될 것이며, 목자도 자신의 능력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목회 경영을 하게 되면 피차 유익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기회를 잃은 목자의 우변을 듣고 자신을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양들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일찍 깨달아 기쁘게 수용하였다면 참으로 좋았을 것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지난날을 고백하면서 다윗의 위대한 믿음의 실행에서 벗어난 못난 행실이라 고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떤 연유에서인가를 따지기 전에 대면하거나 유선상으로, 자격 미달이니 목장을 떠나라는 양들의 권고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드린 지혜로운 목자는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에 잠겨본다.

인격적 수양이 부족한 목자는 양들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충격으로 받아드려 목양생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지만 성숙한 목자는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는 말씀을 숙지하고 자신의 행보에 적용시키는 자마다 복 있는 자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현재에 당한 고통이 장래에 대한 행복의 씨앗으로 믿고 서운한 감정을 내려놓을 뿐 아니라 함께 구원받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니 축복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대목자장 되신 예수님의 뜻일 것이다.

(김기우 저,『성결서원』「하나님의 음성」중에서).


다시 정리해 보면, 선한목자는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리는 자입니다. 궁극적으로 그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동시에, 양들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그 음성에 귀를 기우리는 자입니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 생명의 심장의 고동소리에 귀를 기우린다는 말입니다.
부디 성도들의 심장의 고동에 귀를 기우리는 목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15절) 참된 목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죽음으로 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됨이 있습니다. 그 하나 되는 사랑 안에서만 생명이 잉태할 수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다시 말해, 이문동교회 성도님들은,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목자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은혜를 누리시길 기원 드립니다. 동시에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자기 비움으로 하나 되는 기적을 이뤄 생명을 낳는 사랑공동체를 이루시길 기원 드립니다.


이문동교회가 생명을 낳는 사랑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이제 후로

  이문동 교회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군중, 무리에게는 타율적인 관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던 대로, 해왔던 대로 밀고 나갈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평원에 스프링팍이라는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물들은 그 집단이동시에 그들이 몰사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누군가가 앞서 뛰면 정신없이 온 무리가 집단달음질을 하다가 벼랑으로 떨어져 집단사 한다는 겁니다. 그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판단력 없는 이들이 군중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날 안위하시나이다(시 23: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양을 치는 목동이었던 다윗입니다. 주의 지팡이가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막대기는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방향을 바로잡아주는 채찍 같은 것입니다. 해왔던 대로, 하던 대로의 관성적 관습에서 벗어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인도함을 받는 이문동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시쳇말로 우린 욕하면서 배운다고, 우린 그 누구든지 자신이 상대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아정체성 아이덴티디(idetity)라는 단어는 아이덴티피케이션(동일시 identification)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차 롯을 예로 들어 봅시다. 아브라함을 떠난 롯은 그 종말이 불행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베드로 후서 2장 8절)

그렇습니다. 의인인 롯이 행음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거하면서 그 악인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도 들음으로 그들과 비슷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예수님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그 어려운 시련을 통해 이문동교회 성도들 안에 형성된 여러 정체성은 어떤 부분에서는 결코 바람직하거나,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정체성이 아닙니다.


여기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이제 후로는 더 더욱 성령을 좇아 행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그렇습니다. 성경은 거듭해서 우리들에게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린도교회를 지나 에베소 교회로 옮겨가야 합니다.

 

저는, 지난 어느 주일 저녁 교회문제로 질식할 것같이 힘들어하던 여러분과 대면한 한 자리에서,
다음 두 구절의 말씀을 전해 드렸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욥 7장 17-18).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6-28)

 

그런데 이 말씀이 주의 은혜로 예상밖에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심

그리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룬 선,

이 말씀이 홀연히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문동교회는 그 말씀의 응답에 감사하며,

이제 후로는 분열에서 일치로, 부조화에서 조화로, 주관에서 객관으로, 개별에서 보편으로, 나에서 너로, 너에서 우리로 나아가 오늘 본문 말씀처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인데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 있는(요10:16) 하나 된 생명을 낳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엡4:5-6a)인, 아버지와 나도 하나(요10:30)이듯 우리도 주와 하나인,  한 목자 ♡ 한 무리 양 떼가 하나인 이문동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문동교회가 상처 입었으나, 이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상처가 회복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그리스도께 받은 위로로 이웃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디 그 사명 잘 감당하여 상처 입은 많은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 이문동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될 줄 확신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는 일을 위해 우린 공동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나를 버리는 아픔입니다. 그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아픔을 주의 이름으로 자초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께서 선사하신 ♡ - 그 사랑, 생명, 죽음(자기비움)의 상징을 우리의 실행파일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이후로 이문동교회에 큰 부흥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하여 이문동교회가
한 목자 ♡ 한 무리 양 떼의 온전히 이루는 모범적인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확신합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5-1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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